나에게 '눈찢기' 한 프랑스 아이에게 해주고 싶은 말
10개월여 해외여행 중 내가 겪은 인종차별... 우리 안의 '차별 감수성'도 키워야
▲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시상자 키 호이 콴을 지나치는 모습을 보이자, 누리꾼들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엠마스톤의 ‘패싱’이 노골적으로 시상자를 무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 연합뉴스
며칠 전 진행됐던 제96회 미국 아카데미(오스카) 시상식이 때아닌 인종차별 도마에 올랐다. 전년도 수상자로부터 남우조연상을 받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시상자인 키 호이 콴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트로피를 낚아채듯 받아가며 포옹이나 악수 등 감사의 예를 표하지 않아서 논란이 된 것. 그는 반면, 키 호이 콴 옆에 서 있던 다른 백인 배우들과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나눴다.
여우주연상 수상자인 엠마 스톤 역시 전년도 수상 배우인 양자경(량쯔충, 미셸 여)이 전하려는 트로피를 백인 배우 제니퍼 로렌스를 통해서 전달받는 듯한 장면을 연출했고 공식 시상자인 양자경에게 어떤 예우도 하지 않았다(후에 양자경은 엠마 스톤과 포옹하는 당시를 촬영한 사진을 본인 인스타에 올리며 사태 진화에 나섰지만, 엠마 스톤은 별다른 행동이 없었다).
이를 두고 의도적으로 차별했다기보다 은연중에 일어난 '미세한 공격이나 차별(micro aggression)'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이는 노골적인 폭력이나 혐오성 차별은 아니지만, 당사자로서 느끼기에는 모호한 경계에 있는 차별적인 행동을 말한다. 당하는 입장에서 보면, '내가 무시당한 것 같기는 한데 대놓고 뭐라 하기에는 애매하지만 정작 기분은 나쁜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동양인 외모 비하하는 서양인의 제스처
인종차별? 그러고 보니 나도 최근 해외여행 중에 몇 번 당한 기억이 있다(지난해부터 300일 동안 19개 나라 67개 도시를 돌아다니고 올해 초 귀국했다). 프랑스 파리 근교에서 트램을 타고 이동 중에 차창 밖으로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남자아이들과 눈이 마주쳤다. 반가운 마음에 웃으면서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랬더니 그중 하나가 두 손가락으로 눈을 양 옆으로 찢는 동작을 하는 게 아닌가.
앗, 이건 바로 말로만 듣던, 서양인들이 동양인의 외모를 비하하는 제스처인 일명 '눈 찢기(칭키 아이, Chinky eyes)'? 순간 내심 놀라고 당황했지만 내가 탄 트램은 이미 그곳을 지나치고 있었다. 기분이 나빠졌지만 아무런 대응도 못한 채 순식간에 상황이 끝나버렸다.
▲ 지난해 해외여행 중에 나도 인종차별을 당한 기억이 있다. 당시 프랑스에서 간 와인 도시, 디종에서 찍은 풍경. ⓒ 김상희
다음에 이런 일이 생긴다면 꼭 다음과 같이 이야기해 주고 싶다. '손흥민 축구 때의 관중 갈랜드의 이야기'를 말이다.
"얘들아, 너네 손흥민 알지? 손흥민이 뛰던 잉글랜드 프로축구 경기 관람석에서 관중 한 명이 손흥민을 향해 양손으로 눈 찢기를 했다더구나. 나중에 적발되었는데 로버트 갈랜드라는 사람이었대.
그는 인종차별 혐의로 법정에서 벌금형과 사회봉사명령을 받았고 3년간 축구 경기장에서의 직접 관람이 금지됐대. 또 월드컵 등의 국제 축구 대회 기간에는 외국으로 못 나가게 여권을 반납해야 하는 벌을 받았단다."
살짝 과장해 말하자면, 6개월의 중남미 여행 중에 나는 '내 이름은 치노'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길만 지나가도 어찌나 나를 불러대는지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이런 식이다.
"헤이, 치노(Chino, 중국인 남자)? 치노? 치나(China 중국인 여자)? 치나?"
어쩌다가 "칭챙총!(Ching Chang Chong, 서양인들이 중국말을 흉내 낼 때 하는 말, 일종의 의성어)"이란 얘기가 들리기도 했지만, 그중에서도 '치노'는 너무 빈번하게 일어나서 일일이 대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피곤했어도 가끔 "노 치노, 꼬레아노(중국인 아니에요. 한국 사람입니다)"로 정정해주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그냥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얼핏 보면 동양인 외모라는 이유로 상대를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헤이, 중국인!"으로 부르는 격이다. 이 경우, 동양인을 중국인으로 퉁치는 데 대한 무지, 나아가 상대에 대한 무례함도 있거니와 어떨 땐 동양인을 차별하는 의미가 들어간 경우도 종종 있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는 동양인에 대한 막연한 관심의 표시인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그게 꼭 저런 식이어야 할까. 그냥 자기 나라의 예쁜 말인 "올라!(안녕!)"를 쓰면 안 되나? 아니면, 쿠바에서 많이 들었던 말처럼, 친근하게, "헤이, 아미고!(안녕, 친구!)" 하든지.
인종 차별 논란, 그런데 우리는 다른가
우리나라에 온 지 10년 정도 된 캄보디아 여성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다. 한국에서 버스를 타면 자기 옆자리가 비었는데도 아무도 앉지 않는다는 것이다. 버스 승객들이 더 안 좋은 위치라 하더라도 한국사람 옆자리를 선호한다고 한다.
이렇듯 차별인지조차 구별하기 어려운 미세한 인종차별(micro aggression)이 우리 일상 속에서도 숨 쉬듯 일어난다. 내 속의 인종차별을 경계해야 한다. 인종차별은 곧 문화차별, 종교차별과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 대구백화점 광장 인근에서 마주친 할랄식품산업 반대 현장. 할랄(아랍어로 '허용된다'는 뜻, 이슬람교에서 인정한 제품)과 할랄산업에 대한 무비판적이고 무조건적인 반대는 자칫 문화 차별, 종교 차별로도 이어질 수 있어 위험해 보였다. ⓒ 김상희
오는 3월 21일은 유엔이 정한 인종차별 철폐의 날이다. 1960년 3월 21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샤프빌에서 일어난 인종 분리 정책에 반대하는 집회에서 민간인 69명이 희생된 사건을 계기로 인종차별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기 위해 1966년부터 정해서 기리는 날이다. 여전히 지구 곳곳에 노골적이거나 안노골적이거나 인종차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가슴 아프다.
언제부터인가 '성 인지 감수성(性認知 感受性)'이란 말을 자주 듣는다. 성차별과 성의 불평등을 인지하는 감각의 예민함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성인지 감수성이 점점 더 필요해지는 것처럼, 이제 다인종과 다문화가 뒤섞인 지구마을을 살아가는 지구시민이라면 '인종차별 감수성'을 높여야 할 때다.
'인종차별 철폐의 날'이 아예 필요 없어질 그날까지 말이다. 당장, 할리우드 배우들부터 좀 달라져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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