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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하려고 초등생 아이와 8시간 운전... 보스턴 민심은?

주보스턴총영사관 재외투표소 참관인으로 보낸 하루

등록|2024.03.29 11:29 수정|2024.03.29 11:29

▲ 미국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에 마련된 재외투표소에서 재외동포들이 27일(현지시간) 투표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남쪽에서 피어올라 오는 벚꽃이 서울에서 절정을 이룰 즈음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가 열린다. 미국에 살고 있는 나는 지난해 11월, 재외 선거에 참여하기 위해 일찌감치 '국외 부재자 신고'를 했다. 싱가포르에서 살던 2022년 제20대 대통령 선거에 참여한 경험이 있어 서둘러 총선 준비를 한 셈이다.

이번 선거는 지난 대통령 선거와 다른 방식으로 참여했다. 바로 투표참관인! 투표가 적법한 절차에 따라 이루어지는지 확인하고, 공정하고 깨끗하게 투표가 이뤄질 수 있도록 협조하는 역할로 재외선거 첫날인 27일(현지시각) 투표장을 지켰다.

51.7cm 투표용지에 입이 딱 벌어져
 

▲ 재외 투표 첫날, 나의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고, 투표참관인으로 이번 선거에 동참한다는 뿌듯함이 녹아있는 투표참관인 명찰 ⓒ 김보민


투표함에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면 일회용 자물쇠로 투표함의 앞쪽과 뒤쪽을 잠근다. 특수봉인지 위에 투표관리관과 투표참관인이 성명을 기재한 후 자물쇠 위에 부착해 투표함을 봉인한다. 투표 관리관, 책임위원, 투표참관인, 투표장 안내 요원 등이 모두 투표장에 모인 오전 8시, 책임위원이 투표 개시를 선언하면 그날 하루 투표가 시작된다.

매사추세츠주를 비롯해 인근 네 개의 주에 사는 한인이 3만 명 이상이어서 보스턴에는 두 곳의 투표장이 마련됐다. 내가 투표참관인으로 상주한 곳은 몇 달 전 여권을 갱신하기 위해 방문했던 보스턴 총영사관이다.

책임 위원 및 다른 투표참관인 등 투표소에 모인 사람들이 가장 먼저 투표했다. 신분증을 제시하고 이름·생년월일을 통한 본인 확인, 전자서명을 한 후 투표용지 2장과 회송용 봉투를 받았다. 50cm가 넘는 비례대표 투표용지를 실물로 보고 입이 딱 벌어졌다. 투표장에 가기 전, 나의 소중한 한 표를 던질 후보와 정당을 미리 생각해 뒀지만 서른여덟 개의 정당명을 빛의 속도로 훑은 후, 정갈한 마음으로 각각의 투표 용지에 기표했다.

기다란 비례대표 투표용지를 알뜰하게 접어 회송용 봉투에 넣고 봉인했다. 회송용 봉투 겉면에는 나의 선거구와 주소가 명시되어 있었다. 4월 10일에 이 봉투가 열릴 것을 생각하니 떨리는 마음이 손 끝으로 느껴졌다.

투표장 떠나지 못하는 불법체류자

이른 아침이었지만 투표장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나처럼 체류 비자를 소지하고 미국에 체류하는 한인의 경우, 여권만 제시하면 본인 확인이 가능하다. 하지만 미 영주권자들의 경우 여권 확인 후 영주권 카드까지 확인되어야 선거에 참여할 수 있다. 투표를 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2시간을 운전해 오신 한 분은 영주권 카드를 가지고 오지 않아 투표장 앞에서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가야 했다.

또 어떤 분은 지난 2022년 대통령 선거에서 재외 선거를 하고 나면 자동으로 계속해서 재외선거에 참여할 수 있다고 여겨 이번 선거를 위한 국외 부재자 신고를 하지 않아 투표를 하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국외 부재자 신고를 미리 하지 않은 분 중 볼멘소리를 하던 분도 있었다. 선거관리위원회 이름으로 보스턴의 한인 온라인 뉴스 사이트와 한인 식당 및 한인 대형 슈퍼매장 등에 재외 선거 안내를 했지만, 자신은 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4월 총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본인이 해외에서 살고 있다면 해외 체류자가 선거에 참여하는 방법을 미리 찾아보는 것도 유권자의 몫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점심시간 직전, 대학생들로 보이는 앳된 청년들이 삼삼오오 투표장을 찾았다. 보스턴과 매사추세츠주에는 대학이 많아 한인 유학생도 많다. 풋풋한 대학생들을 보니 나의 인생 첫 번째 투표가 떠올랐다. 한일 월드컵의 열기로 뜨거웠던 2002년, 21세기 들어 처음으로 치러진 제 16대 대통령 선거가 그것이다.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만나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선거가 펼쳐졌고, 잊을 수 없는 대통령을 당선시킨 선거였다. 이번 총선에 참여하는 대학생들도 이번 투표가 자신들의 삶에 크고 작은 영향을 무수히 줄 것이라 여길까 궁금했다.

한참 전에 본인 확인을 했는데 아직도 투표장을 떠나지 않고 계신 분이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지 귀를 쫑긋 세우고 관계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분이 가지고 오신 여권으로는 본인 확인이 어렵다고 했다. 전산상으로는 주민등록이 이미 말소되었고, 미국 체류가 허용된 서류는 없는 상태, '불법체류자'였다.

언제 어떻게 이 멀리까지 와서 생활하다 불법체류자가 되었을까? 해외에 살고 있고, 해외살이를 하는 다른 이민자들을 통해 들은 이야기가 있기에 이 단어가 지닌 무게와 고단함이 저절로 상상되었다. 투표장을 떠나는, 성도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이의 뒷모습을 보며 무탈하시라는 말을 나지막이 읊조렸다.

투표 마감 30분 전 다시 오신 '그 분'
 

▲ 보스턴 총영사관에 마련된 제 22대 국회의원 선거 재외투표소에서 투표참관인으로 참여했다. ⓒ 김보민


투표 마감 30분 전, 어디선가 뵌 듯한 인상의 여성 한 분이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와 투표장에 들어오셨다. 이른 아침 영주권 카드를 가지고 오지 않아 투표를 못하고 발길을 돌린 분이었다. 투표장에서 무려 2시간 떨어진 곳에 사는 분이었는데 다시 집에 가서 영주권 카드를 가지고 오셨다고 했다. 여성분이 기표소에 들어가시고 투표장 한가운데 서 있는 아이에게 오늘 학교가 쉬는 날이냐고 물어봤다.

"엄마 투표하는 것 보려고 학교 안 가고 따라왔어요."

엄마와 이미 여섯 시간 차를 탔을 아이에게 쿠키와 볼펜 한 자루를 챙겨 주며 오늘 가장 고생한 사람은 우리 어린이라는 말을 건넸다. 주말에 투표장에 올 시간이 없어서 영주권 카드를 챙겨 다시 왔다는 여성은 퇴근길 보스턴 주변 국도길을 뚫고 집으로 가려면 일분일초라도 빨리 나서야 한다며 투표장을 나섰다. 그녀와 초등학생 어린이의 여덟 시간 자동차 여행이 의미 있기를 바랐다.

"투표를 마감합니다."

책임위원의 투표 마감 선언과 함께 오늘의 투표가 마감되었다. 선거 위원, 참관인, 안내자 등의 선거 관계자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봉인된 투표함을 열었다. 특수봉인지를 떼어내니 봉인지 위에 Void(보이드, 무효하다는 뜻)라는 단어가 나타났다. 즉, 한번 떼어낸 봉인지는 다시 활용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투표함 내 회송용 봉투를 모두 꺼내 투표자 수를 집계하고, 회송용 봉투를 모아 재외 투표 보관 봉투에 담아 봉인한 후, 총영사관 내 금고에 비치 후 금고 위에 특수봉인지를 붙였다. 이렇게 전 세계 115개국, 178개 재외공관에 마련된 220개 투표소는 오는 4월 1일까지 매일 아침 8시 투표를 개시하고, 오후 5시 투표를 마감한다(일부 투표소의 운영 기간과 시간은 현지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한국의 여느 투표장에 비하면 작고 소박한 규모이지만 투표장 분위기를 미리 맛봤다.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을 슬쩍 내뱉는 분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고요히 진중하게 투표했기에 민심이 무엇인지 나는 알 도리가 없다. 다만 시험을 먼저 친 사람으로서 마음 편히 4월 10일 개표 방송을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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