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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삼촌' 현기영의 탄식 "이런 역사인식의 정권이라니!"

[제주 사름이 사는 법] 현기영 작가와 제주4·3

등록|2024.04.02 07:02 수정|2024.04.02 08:08

▲ 현기영 작가는 1978년 중편 <순이삼촌>을 발표해 금기시해오던 제주4·3을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낸 이래 제주도가 겪은 엄청난 비극적 사건을 수많은 소설로 형상화함으로써 4·3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 황의봉


제주4·3 76주년이다. 인구의 10분의 1에 달하는 3만여 명이 희생됐음에도 억눌린 채 숨죽이며 지내야 했던 제주는 이제 비로소 봄다운 봄을 맞이하는 느낌이다. 물론 아직도 왜곡과 폄훼의 망언이 사라지지 않고, 파헤쳐야 할 진상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제주도 출신 작가 현기영은 이 봄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중편소설 <순이삼촌>으로 4·3의 비극성을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낸 때가 그의 나이 37세. 지난해 장편소설 <제주도우다>를 출간하기까지 거의 반세기에 이르는 세월 동안 4·3을 다룬 수많은 역작을 발표해온 현기영 작가는 올해로 83번째 봄을 맞고 있다. 4·3문학의 상징이 된 현 작가, 그의 인생에 드리운 4·3의 기억과 고통 그리고 되새겨야 할 의미와 과제를 되짚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현 작가와의 인터뷰는 자연스럽게 그를 4·3문학의 대표작가로 자리매김하게 한 <순이삼촌> 이야기로 시작했다. 이 작품이 세상에 나온 건 유신독재 서슬이 시퍼렇던 1978년 <창작과 비평> 가을호를 통해서였다. 1948년 이래 30년이나 금기시돼온 4·3을 주제로 한 소설이 세상에 나온 것은 충격적 사건이었다. 제주 출신 작가로서의 사명감이 이런 소설을 쓰게 했을까, 아니면 체질적으로 반골 기질이 작용했던 것일까?

"저는 처음에 순수문학을 할 생각이었죠. 197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 <아버지>라는 단편으로, 이게 데뷔작입니다. 거기 보면 심리적 갈등을 겪는 소년이 주인공으로 나오고 4·3이 막연한 배경으로 나옵니다. 이 소설은 이데올로기 같은 것 없는 순수문학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저도 모르게 4·3의 억압적인 분위기가 배경으로 깔려 있어요. 데뷔하고 나서는 그전에 습작했던 작품들을 발표하기 시작했는데, 한 1년쯤 지나니까 자연스럽게 제가 4·3으로 가고 있는 겁니다.

당시 4·3을 건드리면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그냥 그쪽으로 끌려가더라고요. 저에게 반골 기질이 있기는 하지만, 작정하고 4·3을 다루어야겠다 정한 건 아니었습니다. 대단한 용기를 낸 것도 아니었고요. 어떻게 보면 유신체제 공포 정치가 온 국민을 억압하고 있었던 시대에서 해방되고 싶은 마음이 꿈틀거렸던 것 같아요.

이 공포 정치의 주체가 군부였잖아요. 그리고 4·3 대학살도 군부의 범죄였으니까 이걸 얘기하지 않고서는 내가 문학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뭐라고 발언을 하고 난 다음에야 문학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춘문예라는 문단 등용문을 통해 작가가 되었지만, 글을 쓸 권리만이 아니라 사회적 의무랄까, 제주도민 모두가 앓고 있는 트라우마를 얘기해야만 된다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지요."


등단한 지 3년 만에 현 작가는 <순이삼촌>을 세상에 내놓는다. 400여 명이 집단학살 당한 북촌리 학살사건을 배경으로, 학살 현장의 시체 더미에 깔려 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나온 '순이삼촌'이 한평생 피해의식과 신경쇠약 등에 시달리다가 결국 학살터였던 옴팡밭으로 다시 들어가 목숨을 끊고 만다는 줄거리다. 4·3의 진상이 철저히 가려졌던 시대, 제주도민 누구도 입밖에 4·3을 떠올리지 못한 시절이었다. 어떤 반향이 있었을까.

"<순이삼촌>을 써놓고 나서 두려웠어요. 출판을 했던 창비사에서도 겁이 났는지 한 3개월을 묵히더라고요. 작품이 발표되자 문단은 물론 지식인사회로부터 많은 격려를 받았고, 힘을 얻었죠. 그러면서 설마 나를 어떻게 하랴, 하면서 두 편을 더 썼어요. <도령마루의 까마귀>와 <해룡 이야기>로 역시 4·3을 주제로 한 소설입니다. 그러고 나니 이제 무서워지는 거예요. 그래서 세 편을 쓰고는 이제 순수문학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던 순간에 그만 절 잡아서 족치는 거 아닙니까."
 

현기영 작가가 결국 고초를 겪게 된 건 1979년 <순이삼촌>을 비롯해 4·3을 다룬 작품들을 묶어서 소설집 <순이삼촌>을 낸 것이 빌미가 됐다. 자신의 교사 시절을 그린 자전적 소설 〈위기의 사내〉에서 당시 합수부에 끌려가 당한 고문을 "아, 이 고통스러운 육체를 벗어버릴 수만 있다면! 정신을 배반하는 육체, 제 몸이 이렇게 저주스러울 줄이야.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 차라리 죽을 수만 있다면! 까무러치기라도 했으면…"이라고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런 경험이 그의 이후 소설 창작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10·26 후인 11월 24일에 명동 YWCA 위장결혼 사건이 있었잖아요. 윤보선 함석헌 백기완 등 재야인사들이 주도한 유명한 사건이지요. 그때가 <순이삼촌> 소설집이 출간된 직후였습니다. 그 무렵 저는 서울의 한 고등학교 영어 선생을 하고 있으면서 제주사회문제협의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제주도 출신 후배들과 어울리고 있었어요. 그날 후배들을 만나 막 새로 나온 소설집도 줄 겸 YWCA 집회에 간 것이었는데, 마침 후배 한 명이 붙잡히고 만 것입니다. 제 소설집을 소지한 채로 말이죠. 그 바람에 저에게도 불똥이 튄 것이지요. 사건 발생 이틀 후 학교에서 수업 중 연행돼 끔찍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순이삼촌>이 판매금지가 됐고요.

당시 고문 사실을 발설해서는 안 된다, 또 이런 소설을 더 이상 써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4·3 이야기를 계속 써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다만 톤은 낮췄습니다. <순이삼촌>이나 <도령마루의 까마귀> <해룡 이야기>가 굉장히 날카롭고 공격적이었던 것에 비해 좀 부드러워진 거예요. 예를 들어 <아스팔트> 같은 소설이 피해자와 가해자의 화해를 다루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 사실 4·3을 지나면서 제주도민들이 가해자와 피해자로 갈라지고 했지만, 거대한 학살 세력에 의해 당한 다 같은 희생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악랄하게 행동한 가해자들은 지탄받아 마땅하지만 말이죠."


"<순이삼촌>은 4·3 영령이 명령해 어쩔 수 없이 쓴 게 아닌가"
 

현기영 작가가 펴낸 소설집<순이삼촌>과 <마지막 테우리> <아스팔트> 등 작품집에 실린 중·단편 소설을 통해 제주4·3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했을 뿐 아니라 이재수의 난을 다룬 <변방에 우짖는 새>나 4·3 직전 제주도의 상황을 상세히 파헤친 장편 <제주도우다> 등 제주 근현대사를 탐구한 소설로도 주목을 받았다. ⓒ 황의봉


임규찬 평론가는 "작가의 회고에 따르면, 1970년대 말 겪었던 필화사건 이후 거의 1년 반 동안 펜대를 꺾은 채 술로 허송해온 시기가 있었는데, 어느 날 한 여인이 나타나서 어서 일어나라고 무섭게 야단쳤던 꿈이 너무도 생생했다고 한다. 그 여인이 바로 '순이삼촌', 그제야 작가의 분신으로서 그녀가 항상 내면에 살아 있음을 깨달았다는 것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4·3 유족이나 진상규명에 헌신해온 사람, 혹은 연구자 중에서 4·3 영령들과 만나는 체험을 이야기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어찌 보면 현기영 작가야말로 4·3 영령들이 그에게 빙의하여 억울한 사연을 세상에 이야기해온 매개체였는지도 모른다. 4·3 영령들과의 영적 교감이 있었다면 그의 문학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 궁금하다.

"<순이삼촌>을 쓴 것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반골 기질은 있었지만, 원체 겁이 많기도 했던 아이가 사자 아가리 속으로 대가리를 집어넣은 격이에요. 그러니까 <순이삼촌>은 용기가 있어서가 아니고 4·3 영령이 내게 명령해서 어쩔 수 없이 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종의 빙의 현상으로 볼 수도 있겠는데 누가 보면 무속적이다, 신비주의적이다, 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냥 뭐 알 수 없어요. 그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순이삼촌'이 야단쳤다는 꿈 이야기는 낮잠을 잤을 때의 일이었고, 악몽을 꾼 적도 있습니다. 앞에서 4·3 소설을 썼으니 다시 순수문학을 해볼까 했다고 말했잖아요. 그 무렵 악몽을 두 차례나 꿨어요. 4·3 영령들이 무슨 지도부처럼 여럿이 앉아서 현기영 끌어오라 하고는 고문을 하는데, 제가 보안사에서 고문당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고문을 하는 겁니다. 네가 왜 4·3에서 벗어나려고 하냐, 매우 쳐라, 하면서 패는 거예요. 비명을 지르면서 깨어나서는 이제는 4·3에서 벗어날 수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작가 현기영의 인생은 4·3과 뗄 수 없는 숙명으로 엮여 있다. 노형국민학교 입학하던 해인 1947년, 4·3 발생 한 해 전 3·1운동 기념식 발포사건이 발생하자 제주도 전체가 총파업과 동맹휴학 등으로 대혼란에 빠져들었고,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하게 됐다. 그리고 그해 늦가을 가족이 고향인 노형리에서 안전지대라 할 제주성 내로 이사를 하는 바람에 위험 지역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대학살극이 벌어졌던 중산간 마을에서 제주의 중심지로 이사한 후 현 작가는 참혹하기 짝이 없는 유격대의 주검 등 4·3의 참상을 어린이의 눈으로 목격해야 했다. 그는 당시 상황을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언어절(言語絶)의 참사'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초등학생 눈에 비친 언어절의 참상에 트라우마가 생긴 것은 당연했다. 작가의 인생에 어떻게 작용했을까.

"저의 장편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에도 나와 있습니다만, 학교에 가려면 관덕정 광장을 지나가야 했습니다. 거기서 벌어졌던 즉석 재판을 목격했고 광장에 내걸린 목 잘린 머리통도 보아야 했어요. 철창 끝에 참수한 머리를 꽂고 행진하는 광경, 산에 올라갔던 피난민들이 먹지도 못하고 옷은 다 해어진 채로 백기를 들고 내려오는 장면들이 기억납니다.

유격대 사령관 이덕구의 주검을 십자가처럼 생긴 형틀에 매달아 놨더라고요. 뭐 예수도 아닌데 말이죠. 제가 나중에 역시 순교자의 모습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요. 이덕구 앞가슴 주머니에는 숟가락이 하나 꽂혀 있었어요. 소설 제목에 '숟가락 하나'라고 한 것도, 다의적이죠. 사실 4·3항쟁도 민생투쟁 아닌가요. 먹고 사는 게 제일 중요한 것이고 먹기 위해서는 숟가락이 필요하겠지요.

지금은 제가 어느 정도 괜찮게 말을 하지만, 어렸을 땐 오랫동안 말을 더듬었어요. 나중에 자라서 술을 마시게 되면서 조금씩 나아진 것 같습니다. 4·3 직전 무렵부터 집안에 불화가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맡겨지는 바람에 우울했던 데다가 4·3의 참화를 목격했으니까 아무래도 트라우마가 생길 수밖에 없었겠죠."


"마을 사람들에게 울면서 매달리거나 협박조로 호소하기도"
 

▲ <순이삼촌>의 무대인 제주 북촌리의 희생자 추모식에서 분향하는 현기영 작가. ⓒ 현기영


현기영 작가의 4·3 소설을 보면 지식 청년과 교사, 학생, 공무원, 경찰, 해녀, 일본 귀환자 등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그래서일까 4·3에 대한 시대 상황과 등장인물의 심리 묘사가 매우 섬세하고 리얼하다. 현장취재와 증언 수집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을지 짐작이 간다. 그가 제주 출신이기는 하지만, 1987년 6월항쟁 이후에야 비로소 4·3의 진상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 점을 감안하면 1970년대에 어떻게 4·3을 정면으로 다룬 소설이 나올 수 있었을까 궁금해진다.

"저도 4·3이 일어나기 전에 발생한 3·1사건을 비롯해 당시 제주도의 상황을 잘 몰랐습니다. 모두가 쉬쉬하던 때였으니까요. 그런 분위기에서 <순이삼촌>의 무대였던 북촌리로 가서 학살사건의 증언을 들으려고 했습니다만, 마을 분들이 저를 의심하면서 말을 해주지 않는 겁니다. 마침 그 마을 출신의 동창이 있어서 그 친구를 앞세우고 갔는데도 역시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더라고요.

제가 그때 마을 사람들에게 울면서 이야기를 해달라고 매달리기도 했고, 때로는 협박조로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젊은 작가가 와서 그 참혹했던 사건을 이제는 세상에 드러내야 하지 않겠냐고 호소하는데도 불구하고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다면, 나중에 여러분이 돌아가셔서 먼저 가신 고인들을 무슨 면목으로 만날 거냐, 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분들이 의심한 건 당시만 해도 함부로 진상을 말했다가는 정보기관에 잡혀갔기 때문입니다. 제주도에는 굿이 흔했는데, 4·3 때 억울하게 죽은 영혼을 달래는 원혼 굿이란 게 있습니다. 이런 굿을 하게 되면 경찰이나 안기부 같은 데서 몰래 와서 엿듣습니다. 무당이 증오의 말이나 분노의 말을 하지 않을까 감시하기도 하고, 밀항자의 이름이나 어떤 정보를 얻으려고도 한 것이지요. 이런 시절이었습니다. 6월항쟁 이후 4·3 진상규명 작업이 진행되면서 많은 증언이 나왔고 그걸 제가 다 소화해서 소설을 쓸 수 있었지요."


현기영 작가는 4·3 소설 이외에도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제주도를 휩쓴 방성칠의 난과 이재수의 난을 소재로 한 장편 <변방에 우짖는 새>라든가 1932년 제주도 해녀 투쟁을 그린 장편 <바람 타는 섬>을 발표하기도 했다. 어찌 보면 소설이라기보다 소설 형식을 빌린 역사 탐구서 같은 느낌이 드는 작품들로, 제주의 역사와 민초들에 대한 작가의 깊은 연민과 유대감을 엿볼 수 있다. 그가 보는 제주도, 제주공동체는 어떤 것일까.

"제주도는 지금처럼 비행기가 없던 시절에는 한반도의 맨 마지막 아래쪽에 있는 절해고도의 거대한 땅덩어리 아닙니까. 그러니까 지리적으로도 거의 단절됐고, 언어도 육지와는 달랐기 때문에 특유의 공동체 문화가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경상도 공동체, 전라도 공동체라고는 하지 않잖아요. 역사적으로 제주도는 공동체적인 삶을 영위해온 것입니다.

한편으로 조선시대에 중앙정부는 제주도를 하나의 내국 식민지로 간주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문서에도 나타나 있어요. 천주교 제8대 조선대목구장인 뮈텔 주교가 고종의 황제즉위식을 마련해줬습니다. 그런데 제국이 되려면 식민지가 있어야 하잖아요. 당시 황성신문 주필이었던 장지연이 보니까 식민지가 있는 겁니다. 북으로는 여진, 즉 함경북도가 있고, 남으로는 탐라, 제주도가 있으니 명실공히 대한제국이 성립할 수 있는 거다, 라고 한 것이지요.

이렇게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본토와는 동떨어져 나름의 공동체를 이뤘던 제주도는 상부상조의 정신으로 똘똘 뭉쳐 살았다는 게 가장 큰 특징입니다. 제주도에만 있는 특수한 형태의 품앗이를 수눌음이라고 합니다. 농사일을 할 때 이웃끼리 서로 돌아가면서 도와주는 공동작업의 전통이 이어져 왔습니다. 바다에 공동으로 미역밭 같은 것을 조성해 공동으로 물질을 하고 공동으로 판매했던 해녀들의 작업도 그렇고, 한라산 기슭에 마을 공동목장을 조성해 번갈아 가면서 말을 돌보았던 전통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제주도는 공동체의 전통이 강했습니다."


제주공동체 이야기를 하다 보니 화제가 '장두'로 이어졌다. 현기영 작가의 장편 <지상에 숟가락 하나>에 "민중 속에서 장두가 태어나고 장두를 앞세워 관권의 불의에 저항하던 섬 공동체의 오랜 전통, 그 신화의 세계는 그날로 영영 막을 내리고 말았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제주도에서는 백성이 학정으로 인해 도탄에 빠졌을 때 자주 민란이 발생했는데, 이때 리더인 장두가 나와 민중을 이끌고 목적을 달성한 후 자기 목숨을 내놓곤 했다.

위에서 현 작가가 소설에서 언급한 장두는 4·3 때 유격대 사령관이었던 이덕구를 말한다. 그렇다면 현기영 작가는 4·3을 민란의 연장선상에서, 그리고 이덕구를 제주공동체가 배출한 '장두'의 하나로 보고 있는 것일까.

"저는 4·3을 이데올로기적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민란의 전통이 있고 그 연장선상에서 4·3이 발생한 것이라고 보는 입장입니다. 이덕구는 처음엔 중요한 위치에 있던 장두였죠. 그리고 자기 목숨을 내놓으려고 했겠지요. 그런데 옛날엔 민란이 일어나면 장두가 대표로 죽었는데, 4·3 때는 온 백성들을 다 죽여버렸잖아요. 장두의 목숨이 수많은 희생의 하나에 불과한 결과가 된 것입니다. 말이 안 되는 사건이지요.

그래서 이덕구에 대해 영웅적이라고 얘기하기가 참 곤란해요. 비극적인 인물이 되어 버린 거예요. 이 점을 내 독자들이 불만스러워합니다. 이덕구를 훌륭한 장두로 묘사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말이죠. 일각에선 4·3 봉기가 결과적으로 많은 도민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면서 좌익 모험주의로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4·3이 일어나기 전에 3명의 청년이 고문당해 죽는 등 당시 봉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려 있었기 때문에 앉아서 죽느니 일어서서 싸우자 한 겁니다. 작년에 나온 제 소설 <제주도우다>에 당시 상황이 자세하게 나옵니다."


"역사 왜곡하는 작업 진행 중, 어처구니가 없다"
 

▲ 2019년 제3회 제주4·3 평화상을 수상한 현기영 작가가 수상소감에서 “4·3의 진실을 지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되새기는 재기억의 노력, 즉 끊임없는 기억운동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제주4·3 평화재단


'불어라 4·3의 봄바람, 날아라 평화의 씨'. 제76주년 4·3 추념식 슬로건이다. 이제 4·3의 진상도 어느 정도 밝혀졌고, 희생자 유족 등에 대한 배·보상도 진행되고 있다. 현시점에서 제주인은 4·3의 피해의식에서 벗어났다고 볼 수 있을까, 나아가 4·3의 상처를 완전히 극복한 것일까.

"생존 희생자는 거의 돌아가실 때가 되었지요. 그분들은 평생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웃어도 깔깔대고 웃지 못하는 우울한 삶을 살아왔어요. 요즘 들어 억울하게 옥살이한 분들에게 재심을 통해 무죄가 선고되고, 피해보상금이 나온다고 하니까, 처음엔 환호성을 지를 순 있겠죠. 그러나 그다음엔 다시 우울하게 되는 거예요. 유족들의 경우는 자기 부모나 할아버지 할머니가 왜 죽었는지 모르는 겁니다. 누가 말해주는 사람도 없고, 알아봐야 삶에 도움도 안 되니 잘 몰라요. 그러니까 많은 도민이 4·3의 참모습을 모르는 상태로 지금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얼마나 많은 역사 왜곡, 역사 퇴행 작업을 벌이고 있습니까. 태영호라는 사람을 앞세워서 4·3 왜곡 발언을 하는데, 그가 무슨 용기가 있다고 그런 말을 하겠어요. 역사를 왜곡하려는 세력이 밀어서 제주도민을 울리는 그런 말을 대신하는 겁니다. 지금 5·18이 모욕당한 것처럼 4·3도 모욕당하고 있잖아요. 이승만 기념관이니 동상이니 하면서 구체적인 건립계획을 이 정부가 세우려고 하잖아요. 제주 4·3의 대 도살자인 이승만을 기념한다는 게 도대체 뭐예요? 역사가 제대로 평가되고 왜곡되지 않도록 역사의 진실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는 한 제주도의 한은 풀리지 않습니다."


제주 4·3은 국가폭력으로 인한 대량 학살이라는 측면 이외에도 이에 맞서 저항한 항쟁이라는 성격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다. 또 단독정부 수립과 분단을 반대한 통일운동적인 의미도 있다. 이제는 4·3에 올바른 이름을 붙여주자는 이른바 정명(正名) 이슈가 대두하고 있는 시점에서 현 작가는 이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궁금하다.

"통일운동까지 말하기에는 지금 세월이 너무 바뀌었습니다. 안타깝지만 남쪽도 그렇고 북쪽도 마찬가지로 통일을 싫어하는 정세가 생겨나고 있잖아요. 반면에 화해와 상생은 큰 거부감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남과 북이 나름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같은 민족이니까 서로 화해하고 상생하자는 것이지요. 당분간은 뭐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아요.

4·3의 성격을 규정할 때 수난과 항쟁은 둘 다 중요하죠. 항쟁이라는 용어를 쓰면 좋을 것 같은데, 이 용어에 대해 거부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4·3 대참사 혹은 4·3 제노사이드처럼 수난을 강조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항쟁이란 말이 수난의 의미를 포함하긴 하지만 엄청난 죽음을 강조하기에는 오히려 약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드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당분간 그냥 4·3이라고 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국가폭력 이야기가 나왔습니다만, 캄보디아 킬링필드 사태도 일어난 지 얼마 안 돼요. 아우슈비츠, 제주 4·3, 대만 2·28사건 등이 일어난 후에도 여전히 국가가 자기 국민을 엄청나게 죽인 사건이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국가폭력이 언제나 잠재돼 있는 겁니다. 아우슈비츠 정문에 이런 글이 있다고 해요. '아우슈비츠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인류가 아우슈비츠를 잊어버리는 것이다'라고요. 이걸 4·3에 대입해보면 '4·3 대참사보다 무서운 것은 국민이 4·3을 잊어버리는 것이다'가 되잖아요. 잊어버리면 반복되는 것이에요."


현기영 작가는 소설로 4·3의 비극을 널리 알린 대표적 문인이지만, 1989년 제주4·3연구소를 창립해 초대 소장을 맡았을 만큼 4·3의 진상을 밝히고 역사 왜곡을 바로잡는데 헌신해왔다. 이런 그에게 4·3이 제주도를 벗어나면 아직도 국민적 이해도가 떨어지고 있는 현실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과거엔 공동체 의식이랄까, 민족의식이 있어서 민족적 불행에 대한 관심이 높았는데, 현대인들은 이런 큼직큼직한 사건에 무관심한 면이 있어요. 그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이익에 민감한 편입니다. 세계화니 뭐니 하면서 역사의식이 희박해졌고 스마트폰에 정신이 팔려 제대로 된 어떤 관점을 갖기가 힘든 측면도 있고요.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보수정권 아래서 이승만 기념관이나 동상을 세우자, 백선엽 동상 세우자 하는 말이 나오고, 태영호의 망언도 나오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걸 지지하는 사람들도 꽤 많잖아요. 심지어는 4·3특별법안을 발의하는 등 법 제정에 역할을 한 제주도 출신 국회의원이었던 사람이 이승만 동상을 광화문에 세우자는 추진위원장을 맡을 정도입니다.

지금 4·3에 대해 많이 알려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그 진면목이나 진실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어요. 해방 후에 제주도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단다, 죽을 짓을 했으니까 죽였겠지, 뭐 이런 식의 피상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아요. 그래서 많은 이들에게 정당한 역사의식을 갖게 해야 합니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정권이 중요합니다. 현재 야당인 전 정권은 역사인식에 있어 어떤 합리적 관점을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와는 정반대의 왜곡된 역사인식을 가진 정권이 있다는 건 기가 찰 노릇입니다.

지금 여당이나 야당이나 자본주의 체제에서 그 사상은 대동소이하다고 봅니다. 제가 볼 때는 진보니, 보수니 하지만 둘 다 보수이고 대동소이해요. 그런데 그 소이(小異)가 중요하다는 거죠. 이른바 스몰 디퍼런스, 소이가 저는 역사의 문제라고 보는 겁니다. 여당과 야당의 역사인식이 확연히 다르잖아요. 저는 그것이 매우 중요한 차이라고 봅니다. 친일파 문제도 그렇고 역사를 왜곡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니까 너무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순수문학으로 돌아가 다시 몇 자 써볼까 하는 생각"
 

▲ 2018년 4·3 70주년을 맞아 제주 출신 국회의원들이 마련한 ‘제주4·3 완전한 해결 어떻게 이루어낼 것인가?’ 주제의 심포지엄에 참석한 현기영 작가(앞줄 가운데). ⓒ 현기영


화제를 4·3에서 현실 문제로 돌려보았다. 1948년 4·3 봉기의 주요 이슈 중 하나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였다. 그만큼 제주도민의 통일 열망이 뜨거웠다고 할 수 있다. 반면 현 윤석열 정권은 대북 적대 정책으로 일관해 남북관계가 심각한 대치 상태에 놓여 있다. 평화통일 대신 대결국면으로 치닫는 현 상황에 대한 작가의 진단을 들어봤다.

"당장 통일이 목전에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단계적으로 화해하고 서로 상생하면서 화해 기간이 오래 지속하고, 그다음에 통일의 분위기가 진작되면서 비로소 통일에 다다를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화해가 아니라 불화, 그리고 이걸 넘어서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로까지 몰아가는 발언을 하고 있단 말이에요.

제가 보기에는 개인 간의 싸움보다 국가 간의 싸움이 더 쉽게 일어날 수 있어요. 쓸데없이 상대를 자극하는 말을 주고받다가 이게 분쟁이 되고 전쟁으로 비화하는 겁니다. 말이 무서운 거예요. 함부로 험한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오늘도 현 정권이 흡수통일의 의미로 통일방안을 이야기하던데, 그런 말 하면 북에서 좋겠어요? 흡수통일 운운하면 전쟁이라도 벌이겠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그런 말은 자제하고 어떻게 하면 화해하고 평화롭게 지낼까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천천히 통일을 생각해야겠지요."


현재 제주도의 최대현안은 환경오염이나 환경파괴, 그리고 이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제2공항 건설 문제다. 또 제2공항은 군사기지로 전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제주도를 평화의 섬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염원에 배치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평생 제주를 탐구해온 제주 출신의 노작가는 이 뜨거운 이슈에 어떤 견해를 갖고 있을까.

"제주도라는 섬을 하나의 선박에 비유해보지요. 승객을 너무 많이 태우면 침몰하게 됩니다. 자연환경이 망가진다는 얘기죠. 제2공항만 해도 이걸 건설하면 오름 2개가 날아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아름다운 자연이 관광자원인데 그걸 파괴해버리면 누가 구경하러 오겠어요? 정치인들이 국민의 눈높이를 말하는데, 이 눈높이를 끌어올려서 좀 더 나은 정책을 세울 생각은 하지 않고, 주민들의 이해득실에 영합하고 있으니 실망스럽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세계 평화의 섬, 제주'를 선언했으니 이걸 발판으로 해서 명실상부한 평화의 섬을 만들면 좋겠지요. 그러려면 평화와 정반대로 전쟁수단인 기지나 군사공항으로 전용할 수 있는 공항 건설을 막아야겠지요. 그런데 제주도가 군사기지화 되는 건 제주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전 국민의 운명이 걸린 문제인데도 제주도에서 이루어지다 보니 남의 나라 일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강정 해군기지나 평택 대추리 사태 등으로 평화운동이 많이 성장했잖아요. 평화운동은 제주도가 기점이 되지만 전국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현기영 작가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시작한 지 3시간이 되어 간다. 이제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다. 작가는 작년에 장편소설 <제주도우다>를 출간해 국내 최대의 종합문학상이라는 대산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현기영 작가의 필생의 역작이며 4·3 문학의 기념비적 작품"이라고 평가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공간 그리고 4·3에 이르기까지의 제주도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해 <순이삼촌>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작가의 대표작이라는 찬사를 듣고 있기도 하다. <제주도우다>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4·3 이야기를 소설로 쓰지 않겠다고 천명한 바 있는 현 작가에게 앞으로의 구상을 들어보았다.

"이 소설을 쓴 것은 4·3의 역사를 부정하고 또는 왜곡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어서 왜 4·3 무장봉기가 발발하게 되었는가를 탐구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해방공간의 시국 문제뿐 아니라 제주공동체가 갖고 있는 심성, 항쟁의 전통과 반골적 기질, 똘똘 뭉쳐진 공동체 의식, 당시의 정치적·경제적 모순, 당국의 가혹한 탄압, 이에 분노한 젊은이들의 봉기 등등을 다룬 것입니다.

4·3에 대해 소설로서는 제가 할 말은 다 했으니까 앞으론 쓰지 않을 작정입니다. 에세이 같은 글에서는 4·3을 쓸 수는 있겠지만요. 늦었지만 다시 순수문학으로 돌아가서 저승 문 앞에서 다시 몇 자 써볼까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저승 문 앞에서 다시 몇 자'의 글을 써보겠다는 말로 노작가와의 긴 인터뷰는 끝났다. 이제 그의 새로운 4·3 소설을 기다려서는 안 될 것 같다. 4·3의 남은 과제는 다음 세대가 짊어지고, 작가 현기영은 마음껏 글쓰기의 자유를 누리며 여생을 즐길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4·3의 진실을 알게 해준 그에게 독자로, 동시대인으로서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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