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외국민 투표율은 62.8%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고 사전투표도 막이 올랐다. 한가한 시간을 골라서 찾은 5일 오전 10시경, 우리 동네 '사전투표소'는 투표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뭔가 작정하고 나온 듯한 유권자들의 표정에서 이번 총선은 다른 때와는 묘하게 다른 느낌을 받았다.

본격 선거철이다. 벽보도 붙었고 후보의 공약이 담긴 플래카드도 사거리마다 나부낀다. 후보의 공약을 어필할 수 있는 곡을 개사해서 들려주는 차량이 골목골목을 누비고 있다. 관심이 가는 후보의 유세 현장에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인다.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낯선 풍경인데도, 평소와 달리 누구도 거부감을 표시하지 않는다.
 
권력을 향한 의지는 잠자는 세상을 깨우는 것 같다. 나아가 세상을 들썩이게 한다. 유튜브 채널을 들어가도 온통 총선 관련 영상으로 도배된다. 한 정치인의 일정을 따라다니며 그냥 보여주기만 해도 동접자가 만 명을 훌쩍 넘기도 한다니 너 나 할 것 없이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대열에 동참하는 실정이다. 섬네일을 통해 약간의 자극적인 내용을 제시하면 시청자들의 후원까지 쏟아진다.

지난 정부에서 코로나를 거치며 세상이 사라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스크의 두께만큼이나 숨쉬기가 힘들었던 것은 코로나 때문이었을까? 마스크 두께 때문이었을까? 간신히 그 구간을 넘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새로 들어선 정부는 무엇을 하든 그 이상을 보여주었던 것 같다. 정말 중요한 국민들 먹고사는 문제나 역사 인식의 관점에서도, 국제적 위상이나 남북 관계에서도 무엇 하나 당당하지 못한 느낌이다. 게다가 지난 2년간의 정부의 행태는 내게, 국민이 그들의 안중에 있지 않다는 확신을 갖게 했다.

진심으로 잘못했다는 사죄의 말 한마디를 외면하던 이들이 이제는 구석구석을 챙기겠다고 말한다. 매일 국민을 삶을 살핀다고 하고 우리와 같은 사람들을 향해 관심이 있다고 고개를 숙인다. 위험한 것은 이맘때는 거짓의 당사자조차 거짓을 진심으로 믿는다는 것이다. 이른바 돈과 권력을 향한 주술적 효과가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당의 정체성이나 국정 운영의 방향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눈앞의 표를 위한 공약들이 난무하고 있다. 양심이니 본분이니 다 필요 없다는, 상대를 이겨 인생을 건 전투에서 성공할 수 있다면 그깟 양심 언제든 버릴 수 있다는 자세다.

때가 때인지라 영화 <스윙보트>(2012)가 유튜브에서 다시 조명되며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경쟁하는 인물들의 모습은 영화가 선보인 그때나 2024년 총선이나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정치는 생물이라더니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모든 것을 가볍게 버릴 각오를 영화는 보여준다.

"과거를 잊으면 실수를 반복할 수밖에"

간단히 소개하자면, 영화는 미국 뉴멕시코주의 작은 도시 텍시코에 사는 버드 존슨(케빈 코스트너)을 주목한다. 별다른 직업 없이 낚시와 맥주를 즐기며 빈둥거리는 중년의 싱글대디인 버드. 정신연령은 아빠보다 더 높을 것 같은 12살 딸 몰리(매들린 캐럴)는 이런 아빠를 챙기며 집을 돌본다.

이들의 운명이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 것은 바로 대통령 선거다. 아빠의 투표를 참관하기 위해 투표소 앞에서 아빠를 기다리던 몰리는 아빠가 오지 않자 몰래 대신 투표하게 된다. 몰리가 대신 행사한 버드의 표는 투표소 정전으로 인한 선거시스템 착오로 무효표가 된다. 선관위의 추적으로 버드는 10일 안에 재투표할 수 있게 된다. 버드에게 주어진 이 한 표가 박빙의 승부를 펼치던 공화당소속 현대통령과 민주당 대선 후보 가운데 차기 대통령을 결정짓게 된 것이다.
 
두 후보는 한 명의 유권자를 위한 구애에 대대적으로 나선다. 버드가 입을 열면 그게 바로 그들의 공약이 된다. 양쪽 진영이 지향하는 정치의 방향과는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영화는 보수와 진보 중 누가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코믹한 상황을 관객이 즐기게 한다. 어쩌면 정치가 그렇다는 강력한 조롱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한 표가, 한 표의 권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일깨워준다.

오래전에 선보인 영화지만, '살아가기 힘들다고 정치에 무관심하면 다시 속박당하게 됩니다'는 말이나, '단순히 대통령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사람이 아니라 말만 앞세우지 않는 더 큰 인물이 우리에겐 필요합니다'는 대사는 여전히 유효한 것처럼 보인다. 마치 지금 2024년 한국의 현실을 얘기하는 듯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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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문명사회들은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속박에서 자유로,
자유에서 번영으로,
번영에서 만족으로,
만족에서 무관심으로,
무관심에서 다시 속박으로.
이런 역사의 굴레를 벗어나려면 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과거의 실수를 잊으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 속, 몰리의 대사)

버드와 같은 극단적 상황은 아니지만, 몰리의 말대로 어쩌면 고민하는 우리 모두는 스윙보터(누구에게 투표할지 결정하지 못한 이들)가 아닐까 싶다.

투표하기 시작한 이후로 약 40년간 매번 공약에 속고 진심을 가장한 눈물에 속다 보니 이제는 그들의 진심이 뭔지 알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서서히 정치에 대해 무관심하게 만들고 급기야 정치 혐오로 이어지게 된다. 그리하여 시민이 가장 원하지 않는 결과, 선거판에 뛰어든 이들이 가장 원하는 결과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오랜 시간을 투표에 참여한 유권자로서, 정치가 하루아침에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내일 당장 무엇을 바꾸겠다고 하는 말이 얼마나 허황된 구호인지도 경험으로 알고 있다.

대형 스피커의 볼륨을 잔뜩 키워 마치 내가 주인공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지만 당선, 확정과 동시에 앞으로 4년간 그들은 주인 노릇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투표를 하는 이유는 이것이 어렵게 획득한 권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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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후보들의 재산이 공개됐다. 재산을 속이거나 허위로 발표하면 선거법에 위배되니 적어도 정확하려고 노력은 했을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후보들의 평균 재산은 27억 7천만 원. 선관위에 오른 부동산 목록이 4페이지를 넘어가는 사람도 있었다. 역시 이들은 나와 다른 세상의 사람들이다. 거기에 4년 전 출마자의 1인당 평균 재산은 15억 2천만 원이었으니 그들의 부류는 경제상황이 어떻든 4년이라는 시간에 비례해 재산을 살뜰히 불린 모양이다.

최근 경제가 어렵고 국민들의 소득이 줄었다고 발표되는 상황에서도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억' 소리가 난다. 여당 선대위원장의 말처럼 "여기서 이러지 않아도 얼마든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 황송하게 국민을 향해 봉사까지 하겠다고 한다. 나는 그런 시혜가 조금도 반갑지 않다. 그들 말이 조금도 내 가슴에 와닿지 않았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려주고 싶다.

방법은 있다. 그야말로 삶의 접점이 하나도 없는 이들을 그것도 '갑'이 되어 만날 수 있는 때가 바로 지금이다. 지금이 우리가 인생에서 원하는 게 뭔지 생각해 보고 그게 얼마나 가치 있는지 결정을 할 때가 아닐까 싶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이참에 '갑질' 한번 당당하게 해 보는 것은 어떨까? 혹시라도 우리가 후손에게 남긴 가치가 될지도 모르는 것까지 깊이 새길 수 있다면 더 아름답겠고.

투표는 매우 중요한 '사회적 약속'이다. 우리는 투표를 통해 후보들이 대중을 향해했던 자신의 약속을 지킬 것을 압박해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합의되지 않은 약속을 요구하는 것과 같다. 표를 행사하는 것으로 당선자와 공약 이행 의무의 약속이 체결되었다는 증명이 된다. 투표를 함으로써 비로소 약속이 성립하는 시스템, 이제 우리가 시스템을 움직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