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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심리학자가 한국 드라마를 엄청 많이 본 이유

루디빈이 만난 드라마 같은 한국 "K-드라마처럼 더 행복한 한국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등록|2024.04.16 19:49 수정|2024.04.16 19:49
"안녕하세요. 저는 벨기에에서 온 루디빈입니다. 33살이구요. 브뤼셀 인근의 감옥에서 재소자들을 상대로 한 심리학자로 6년간 일하다 1년간 아시아 여행을 하고 있어요. 10대 때부터 한국 문화 열렬 팬이었어요.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실제 한국이 궁금해서 아시아에서 제일 먼저 한국을 여행하고 있어요. 한국은 실제로 어떤 매력이 있는지 보고 싶었어요."

오랜만에 벨기에 친구가 찾아왔다. 백화골에 세계여행자네트워크를 통해 찾아오는 봉사자는 주로 유럽 친구들이 많은데, 지금까지 벨기에 사람은 많지 않았다. 우리에게 익숙한 듯 낯선 나라 벨기에. 한국 사람들이 갖는 벨기에 이미지는 초콜릿, 맥주, 와플 같은 음식이나 축구, 스머프 정도가 아닐까?

아직 왕이 있는 입헌군주제 나라이고, 한국보다 훨씬 더 작지만 프랑스어, 독일어,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세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잔혹했던 제국주의 시절부터 쌓아온 부와 무역을 통해 여전히 부유한 나라이기도 하다. 이런 벨기에에서도 최근 한국 문화가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 하루하루 초록으로 바뀌어가는 풍경 속에서 루디빈과 농사일을 했다. ⓒ 조계환


"저는 어릴 때 당시 유행하던 일본 애니메이션과 드라마를 보았어요. 하지만 일본 문화에 큰 매력을 느끼지는 못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저의 첫 한국 드라마인 <겨울연가>를 만나게 되었지요. 감성적인 스토리에 정말 반했고, 음악은 순간의 감정과 완벽하게 들어맞았습니다. 한국인들이 만들어내는 복잡하고 드라마틱한 이야기에 금방 끌렸던 것 같아요."

<겨울연가>를 감동적으로 봤다는 이야기를 듣고 순간 웃음이 나왔다. 무려 20년도 훨씬 지난 옛날 드라마이고 해외에서는 주로 일본에서 인기 있던 드라마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당시 벨기에에 이미 한국 드라마를 번역하는 소규모 독립 팀이 있어서 한국 드라마를 접할 수 있었다고 한다.

15살 때 본 <겨울연가>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정말로 많은 한국 드라마와 영화를 감상해왔다. 기본적으로 영화를 좋아하는데, 분야도 사극, 범죄, 스릴러, 서스펜스, 공포, 로맨스 등 가리지 않았다. 가장 최근에 본 영화는 벨기에가 배경으로 나오는 <로기완>이다.

한국 드라마와 영화를 감상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루디빈은 자연스럽게 한국어 공부에도 관심을 가지게 됐다. 처음에는 혼자서 독학으로 공부하려 했지만 너무 어려워 포기하고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브뤼셀 한국문화원에서 한국어 수업을 들었다. 지금은 인터넷으로 강좌를 들으면서 배우고 있다.

"한국어 문법은 배우 복잡하기 때문에 배우기가 쉽지 않고, 'ㅎ와 ㅈ', 'ㅋ, ㄱ, ㄲ'의 차이는 제 모국어인 프랑스어에 없는 소리이기 때문에 발음하기가 어려워요. 하지만 한국어로 말할 때 만들어지는 소리는 정말 아름다워서 한국어 공부를 포기하고 싶지가 않아요. 한국 여행이 끝난 뒤에도 한국어 공부는 죽 이어나갈 생각이에요."
 

▲ 루디빈은 소주를 즐겨 마셨다. 쉬는 날이면 식당에서 느긋하게 혼술 하고 오기도 했다. ⓒ 조계환


"한국인들은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뛰어난 재능이 있어요"

루디빈은 한국드라마를 많이 봐서인지 모르는 한국 노래가 거의 없었다. 한번은 저녁 먹고 농장에서 편안하게 노래 부르는 시간을 가졌는데, 대부분의 드라마, 영화 음악을 알고 있어서 놀라웠다. 루디빈이 보기에 한국인은 음악을 통해 감정을 표현하는데 재능이 뛰어난 것 같다고.

처음 한국 영화를 보던 시절만 해도 일부 한국문화 팬들이 더디게 만들어내는 자막에 의존해야 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케이팝과 한국 드라마는 이제 더 이상 특별한 마니아 계층만 즐기는 문화가 아니라 일반적인 대중이 즐기는 문화가 되었고, 프랑스어 자막은 개봉과 거의 동시에 접할 수 있다.

한국 드라마에 매료되었다고 해서 한국의 현실도 드라마 같을 거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을까? 물론 영화와 현실이 다르다는 것쯤은 한국 여행을 오기 전부터 루디빈도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루디빈은 브뤼셀 인근의 교도소에서 재소자들을 상담하는 심리학자로 6년간 일해 왔다. '냉혹한 현실의 이야기'는 루디빈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지 모른다. 휴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여행길에 나섰다. 심리학자로서 보는 한국의 첫 모습은 어땠을까?

"서울에 처음 도착하고 며칠 동안은 좀 슬펐어요. 버스나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누구도 서로 말을 하지 않았고, 심지어 서로 쳐다보지도 않더군요. 젊은이든 노인이든 모두가 스마트폰만 보고 있었고 외롭고 고립되어 있는 느낌이었어요. 거리 모습도 비슷했고요. 음식점에서도 모든 속도가 너무 빨라서 처음에는 적응하기가 어려웠어요."

루디빈은 한국의 자살률이 세계에서 아주 높은 수준에 속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사회적으로, 학문적으로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가장 큰 원인인 듯하다고. 특히 학생들에게 가해지는 압박이 엄청난 것으로 보인다. 벨기에도 한국처럼 교육 수준이 높은 나라이지만, 상대적으로 학생들에게 가해지는 압박은 낮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요즘 들어서는 전기나 배관 같은 분야의 인력 부족으로 육체노동 전문직의 가치가 점점 올라가고 있는 추세다.

또한 서울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대부분의 광고가 미용이나 체중 감량 다이어트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도 놀라웠다고 한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져야 한다는 압박감이 특히 여성에게 심하게 가해지는 사회 분위기를 느꼈다. 유럽에서도 아름다운 외모에 대한 사람들의 갈망이 분명 존재하지만 좀 더 은밀하게 숨겨져 있는 반면, 한국에서는 누구도 숨기지 않고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 다르게 느껴졌다고 한다.
 

▲ 루디빈과 함께 파종한 옥수수, 토마토, 고추 모종이 잘 자라고 있다. ⓒ 조계환


아름다운 자연풍경과 따뜻하고 친절한 사람들

거리에서 만난 한국 사람들은 무표정하고 불행해보였지만, 조금 친분이 쌓이면 따뜻하고 친절했다. 루디빈은 곧 한국 사람들과의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속초의 온천에서 우연히 만난 현대미술가와 함께 설악산을 오르기도 하고, 그녀에게 소개받은 스님의 암자에 찾아가서 공양을 대접받기도 했다.

남산타워에 올라간 날에는 한국 아저씨와 맥주를 주고받으며 한국의 역사에 대해 설명을 듣는가 하면, 젊은 여자 친구들에게 한국 전통시장 안내를 받은 적도 있다. 한국을 여행하며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한국 사람들이 낯선 사람을 만날 때 서로 보여주는 공손함도 매력적이라고 했다. 유럽에서는 일반적이지 않은 이런 예의바른 모습을 보면, 인간으로서 존중받는 느낌이 든다고.

자연 환경도 숨 막힐 듯 아름다웠다. 특히 아름다운 산과 바다 등이 만들어내는 풍경이 영화 속 보다 더 멋졌다. 차를 타고 갈 때면 오랫동안 한국 드라마와 영화에서 보던 익숙하게 봐 오던 풍경이라 그런지 마치 영화 속 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을 들게 했다.

한국 음식 중에선 김치전, 떡볶이를 좋아한다. 한국엔 다양한 음식들이 있어 재미가 있단다. 가장 좋아하는 한국 음식은 짜장면이다. 처음 한국에 와서 아직 날씨가 춥고 눈이 많이 오던 어느 날, 하염없이 걷다가 피곤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어느 식당에 들어가 짜장면을 주문했다. 그리고 짜장면을 먹는 동안 몸이 따뜻해지면서 마음까지 편안해지는 마법 같은 순간을 경험했다고.
  

▲ 백화골에서 함께 농사일을 한 친구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 조계환


지금은 한국 시골의 우리 농장에 거의 한 달 간 유기농 농사 봉사활동 중이다. 함께 감자, 당근, 대파, 브로콜리, 양배추, 상추, 땅콩, 옥수수를 심었다. 농사일도 잘하고 힘도 좋아서 우리는 평안하게 봄 농사를 즐기고 있다.

"아버지가 작은 정원을 가꾸고 계시기 때문에 가끔씩 정원 일을 도와드린 적은 있지만 본격적인 농사일은 이번이 처음이에요. 물론 몸이 힘들긴 하지만 며칠 지나니까 몸이 그 리듬에 금세 적응을 하더라고요. 저는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명상을 하는데요, 농사일은 '지금 현재'에 집중할 수 있는 좋은 명상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유기농 농사는 환경에도 도움이 되고요."

벨기에에도 유기농 채소와 식품을 파는 가게들이 많이 있고, 농부들이 만든 협동조합들이 곳곳에서 운영되고 있긴 하지만, 유기농 채소의 가격이 비싼 편이라 사람들이 부담 없이 구입하기는 힘들다고 했다. 하지만 한국처럼 환경과 건강을 위해 유기농 채소를 찾는 사람들은 점점 더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한국 문화의 인기는 오랜 역사가 바탕이 되는 것 같아요"

"제가 한국에서 가장 관심 있는 부분은 역사예요. 특히 탄압에도 불구하고 저항을 멈추지 않았던 일제강점기 역사는 정말 관심이 갑니다. 일제시대 때 다른 제국주의 나라들처럼 식민지 지배를 위해서 한국인들을 강하게 폄하하는 교육을 했기 때문에, 한국인의 자존감이 낮아졌고, 안타깝게도 이런 역사가 아직도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한국 문화가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면서 트렌드가 완전히 바뀌고 있어요. 지금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인 나라 중에 하나예요."

루디빈은 한국 역사 드라마나 다큐멘터리를 많이 보았고, 또 역사를 공부하면서 일본 제국주의 시절부터 교육되어온 사대주의, 자학사관까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 문화가 세계적인 인기를 끌면서 자연스럽게 한국 사람들이 이를 극복해나가고 있는 모습도 알고 있었다. 한국 사람들은 나라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을 거의 의무처럼 생각하고 있으며, 이런 모습은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것 같다고 했다.
 

▲ 비 오는 날엔 함께 비닐하우스에서 열무와 시금치 풀을 매주었다. ⓒ 조계환


루디빈에게 물어봤다 "그동안 봤던 수많은 해피엔딩 K-드라마들처럼 한국 사회도 행복하게 될까요?"

"사실 전 세계에서 해피엔딩 드라마 같은 나라는 거의 없다고 봐야지요. 행복이란 어려운 개념이에요. 우리가 만약 행복하지 않다면 삶을 성찰하고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 지 바꿔나가야 해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에요.

변화는 자신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국 사회가 해피엔딩이 되길 원한다면, 자신부터 시작해서 나만의 해피엔딩을 먼저 만들어나가면 되지 않을까요? 한국은 수많은 어려운 순간을 이기고 멋진 역사를 만들어낸 나라인 만큼 충분히 해피엔딩 드라마처럼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니 어쩌면 지금 충분히 행복한 나라일지도 모르겠어요. 제가 좋아하는 한국이 더 행복한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루디빈은 자신만의 해피엔딩, 아니 지속적인 행복한 삶을 찾아 1년 동안 아시아 여행길에 올랐고, 한국은 그 첫 나라이다. 남은 여행 기간 동안 진짜 한국의 모습을 더 많이 보려한다. 여행을 통하여 새로운 문화를 접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내가 누구인지 발견하고 싶다. 우리 농장을 떠난 후에는 여수, 제주, 전주, 부산 등을 둘러본 후 대만과 말레이시아로 여행할 계획이라고 한다. 남은 여행 기간 동안 앞으로도 짜장면처럼 작지만 따뜻한 행복의 순간들을 자주 만나게 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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