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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전히 세월호와 함께 자라고 있다

[현장] <4.16을 기억하다> 프로젝트 중 '우리는 안녕한 사회를 원한다' 참가기

등록|2024.04.15 17:22 수정|2024.04.15 20:49

▲ 현장에서 세월호 유가족이 제작한 키링을 나눠주었다 ⓒ 마수빈


우리는 재난과 함께 자랐다. 할머니가 한국 전쟁의 뿌리에서 태어나셨고, 대학생이던 어머니가 삼풍 백화점을 목격했던 것처럼 나의 학창 시절에는 세월호 참사가 있었다. 아직도 생생하다. 분명 학교에서 '전원 구조' 소식을 들었는데, 학원을 마치고 다시 뉴스를 틀었을 때 세상은 내가 알던 곳이 아니었다. 어두운 아나운서의 표정, 화면을 가득 채운 검은 바다, 차마 들을 수 없던 유가족의 절규까지.

시간이 흘러도 세월호 참사만 떠올리면 나는 다시 2014년으로 돌아갔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린 학생이 된 것만 같았다. 나만의 감각은 아니었다. 학창시절 때 세월호 참사를 겪었다면, 갑자기 취소된 수학여행에 투정 부리지 못했다면 당신도 느꼈을 무력감이다. 공동의 무력감을 다른 감정으로 바꿀 수는 없을까? 어른이 된 우리가 세월호 참사를 위해 행동할 수 있지 않을까. 그 답을 찾기 위해 프로젝트 < 4.16을 기억하다 >를 찾아갔다.

세월호 10주기, 달라진 건 없었다
 

▲ 안전한 사회를 꿈꾸는 청년들의 답변은 다양했다 ⓒ 신희정


< 4.16을 기억하다 >는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맞이해 안산청년네트워크, 안산YMCA, 평등평화세상 '온다' 등에서 진행한 프로젝트로 3월 21일부터 4월 15일까지 11개의 공간에서 진행되었다.

해당 프로젝트는 시민들과 함께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세월호를 기억했다. 플로깅을 하거나 한 권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눴고, 요가를 통해 명상하기도 하였다. 그중 지난 12일 진행한 <우리는 안녕한 사회를 원한다>에선 청년들이 모여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이후의 사회를 되돌아봤다.

"당신은 세월호 참사 때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

4~5명씩 한 조에 묶인 청년들은 질문을 통해 세월호 참사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각자의 기억은 달랐다. 누군가는 당시 초등학생이었다며 뉴스를 보고 놀랐던 기억을 고백했고, 누군가는 사회 초년생이라서 피곤한 퇴근길에 스치듯 라디오로 들었다고 털어놨다. 세월호 참사를 목격했던 나이도, 장소도 달랐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모두의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는 순간이었다.

"세월호 이후의 사회는 안전해졌나요?"

다음 질문에 청년들은 회의감을 드러냈다. "세월호 다음이 이태원이잖아요. 압사라는 걸 말로만 들어봤지, 실제로 도시 한가운데에서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죽을 거라 상상도 못 했어요." 한 청년의 말에 다른 청년들도 하나씩 대답했다. 모두 세월호에 대한 진상 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점, 여전히 사회의 안전망을 구축할 수 있는 제도가 없다는 점을 비판했다.

"당신은 어떤 사회를 원하나요?"

마지막 질문에 청년들의 고민이 길어졌다. 한 청년은 "사회적 재난에 피해자를 탓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운을 떼며 "세월호 때는 유가족에 대한 정치적인 프레임이 있었고, 이태원 때는 놀러 나간 개인이 잘못이라고 하지 않았는가"라고 목소리를 냈다. '안전을 위한 법적 제도와 교육을 마련한 사회', '재난을 책임지는 정치인이 있는 사회', '차별금지법이 제정된 사회' 등 청년이 원하는 사회는 촘촘한 그물망이 사람을 지키는 안전한 사회였다.

안전한 사회를 위한 청년들의 선언
 

▲ <우리는 안녕한 사회를 원한다> 현장 사진 ⓒ 신희정


"여러분의 생각을 모아서 하나의 선언문을 만들려고 해요."

<우리는 안녕한 사회를 원한다>에선 청년들이 각자 생각한 안전한 사회의 기준을 합쳐 '4.16생명안전 선언'을 세웠다. 현장에서 청년들은 열띤 토론을 펼쳤다. 서로의 의견이 반영된 약속을 꼼꼼히 살펴보며 단어의 뜻을 되묻고, 전반적인 순서를 고민했다.

똑같은 문장이라도 각자의 생각이 달랐다.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고 이해하겠다'는 문장을 두고도 각자가 생각한 '공감'의 기준이 달랐다. 누군가는 상대방의 아픔을 알고 잊지 않는 것이 '공감'이라고 했고, 또 다른 이는 상대방의 아픔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 '공감'이라고 생각했다. 생각은 달랐지만, 갈등은 건강했다. 안전한 사회를 위해 선언문을 뜯어고치는 청년들 덕분에 현장은 분주해졌다.
 

▲ 안산청년들이 함께 만든 '4.16생명안전 선언' ⓒ 안산청년네트워크


그렇게 5가지의 '나의 약속'과 7가지의 '사회를 위한 요구'를 완성했다. 함께 큰 소리로 선언문을 읽으니, 무언가를 해냈다는 마음이 들었다. 함께 나눴던 이야기가 일시적인 담론에 그치지 않고 미래를 위한 당부와 약속이 되었다는 점에서 청년들은 뿌듯함을 느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잊지 않고 함께한다는 점에서 기뻤다."

한 청년의 소감처럼 우리들은 <4.16을 기억하다>를 통해 서로의 기억을 확인했고, 잊히지 않았기에 안심했다.

프로그램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어김없이 현실 감각이 돌아왔다. 여전히 세월호, 그리고 이태원 참사는 해결되지 않았다. 책임자는 제대로 처벌받지 못했고, 유가족들의 슬픔은 존중받지 못하며, 이름만 다른 또 다른 참사가 우리를 기다릴지 모른다. 그럴 때마다 이날의 기억을 떠올리고 싶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바뀌었다. 나는 여전히 세월호와 함께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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