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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세, 평생 일만 한 그가 퇴직 후 곧바로 가입한 곳

[신나는 인생 2막 여섯번째 이야기] 이음나눔유니온 조합원 김강순 님

등록|2024.04.17 17:49 수정|2024.04.17 17:52

▲ 2022년 1월 16일 강북구청 앞에서 파업투쟁하고 있는 강북구도시관리공단 지지방문에 나선 김강순(오른쪽) ⓒ 김강순


"퇴직하면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퇴직하고 비빌 언덕이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김강순(61) 조합원은 2023년 8월 31일 배화여자대학교 총무과에서 퇴직한 뒤 곧바로 이음나눔유니온 조합원이 되었다. 조합에 가입한 이유는 퇴직했어도 기댈 수 있는 조직이 있었으면 해서다. 조합원이 된 지 6개월 만에 제1기 대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5년, 배화 여자대학교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2012년에 총장이 새로 부임하면서 학교가 어수선했다. 감리교 재단인 학교는 일주일에 한 번 예배를 보았다. 모든 직원이 다 예배에 참석하기를 강요했다. 종교의 자유가 있음에도 무조건 예배에 참석하라는 총장의 지시가 부당하다고 느꼈다. 국가인권위에 제소했다. 인권위는 타당성을 인정했다.

김강순은 그일을 겪으면서 노동조합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총장과 싸울 수밖에 없었다. 2017년 3월부터 직원 7명이 모여 노동조합을 만들기 시작했다. 전국대학노조서울본부에서 강의도 듣고, 도움을 받았다. 2017년 11월 27일, 드디어 노동조합을 창립했다.

"노조가 없었을 때는 총장이 모든 걸 좌지우지했어요. 직원들을 사람 취급도 안 했어요. 순환 배치해야 하는 직원들을 자기 마음대로 한 곳에 두고, 학교를 개판으로 만들었어요.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서 노조를 만들기로 마음먹었죠."

노조가 생긴 후부터 조합원들이 권리를 찾기 시작했다. 2018년 2월에는 단체협약을 위해 43일 동안 파업을 하기도 했다. 노조가 주체가 돼서 학교를 끌고 나갔다. 학교에서 뭔가를 하려면 노조와 상의를 했다. 총장도 노조를 무시하지 못했고 인사발령도 순환 배치로 바꿨다. 근무 환경도 좋아졌다며 노조 만든 일을 뿌듯해했다.

생선장사, 구두닦이, 택시운전... 
 

▲ 서대문노동자종합지원센터에서 인터뷰하고 있는 김강순 조합원 ⓒ 문세경


김강순은 경기도 포천에서 나고 자랐다. 농사를 지어 네 명의 자식을 먹이고 가르치던 부모님 덕분에 틈틈이 농사일을 배웠다. 상업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른 취업해서 돈을 벌고 싶었다. 당시에는 괜찮은 상업고등학교만 나와도 취업이 잘 되었으니까. 공부도 곧잘 했다.

학교 운동부에서 럭비를 했다. 운동을 하면서 친구들과 티격태격 싸우기도 하고 또래의 남자 고등학생들처럼 호기심 많은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다녀와서 뒷골목(?) 선배들하고 어울렸다. 그의 말대로 "화려한 20대"를 보냈다.

"아는 형님이 생선 장사를 해보자고 해서 1년 정도 했어요. 쌍문동에서 구두닦이도 해봤고요(웃음). 생선 장사 할 때는 노량진에서 새벽에 물건을 떼서 장이 서는 아파트 단지에  가서 팔고, 저녁 5시까지 떨이 장사를 했어요. 잠을 서너 시간밖에 못 잤어요. 몸이 견디질 못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만뒀어요. 구두닦이도 마찬가지로 선배들이 해보라고 해서…(웃음)"

화려한 20대를 보냈다면서 껄껄 웃는 모습에 덩달아 웃음이 났다. 생선을 팔고, 구두를 닦으면서 나쁜 길로 빠지지는 않았을까, 하며 조마조마했다. 재미있는 무용담을 기다렸는데 다행히 들려줄만한 이야기는 없단다.

그 후, 2년 동안 택시를 몰았다. 1990년, 우이동에서 택시 완전 월급제 쟁취 집회에 참여할 때다. 너무 열심히 싸웠는지 연행되었다. 닭장차라는 걸 처음으로 타보았다. 그때 택시 노조가 있다는 걸 알았다. 노조 지부장으로 나가라는 걸 거절했다. 젊은 나이에 택시만 몰 수는 없었다. 출판사에 책을 배송하는 일도 했다. 그 다음으로 한 일이 교회 행정실 직원이었다. 10년을 일했다.

"교회일은 힘들었어요. 육체적으로 힘들다기 보다 근무 환경이 열악했어요. 급여가 많지도 않고요. 무엇보다 힘든 건, 토요일과 일요일에 출근하는 거였어요. 지금은 주 5일 근무지만 그때만 해도 다 주 6일씩 일했잖아요. 거기다 하루에 10시간, 12시간 일하는 곳도 많았죠. 주 40시간 일 하는 건 상상도 못 했어요."

교회 행정실에서 10년 동안 근무한 후, 배화 여대 총무과로 옮겨서 18년 동안 일했다. 그리고 작년 8월에 퇴직했다. 쉬지 않고 일을 한 셈이다. 그럼에도 김강순은 여전히 일이 하고 싶다고 한다. 퇴직한 지 1년도 안 됐는데 벌써 계약직 일자리를 구했다. 대학교 스쿨버스 운전기사로 일하고 있다. 풀타임으로 하는 일은 아니라서 시간적 여유가 있다. 하지만 오후에 시작해 밤늦게 끝나기 때문에 이음나눔유니온 대의원 활동을 제대로 못하는 것을 아쉬워한다.

더 일하고 싶다는 김강순의 꿈
 

▲ 2022년 12월 7일, 노조법 2,3조 개정을 위해 용산역 앞에서 피케팅 하고 있는 김강순. ⓒ 김강순


그의 꿈은 더 나이 들기 전에 개인택시를 모는 것이다. 얼마간의 연금이 나오니까 쉬엄쉬엄 택시 운전을 하면서 남은 생을 살고 싶단다. 그렇게 한 푼 두 푼 모아서 더 늙기 전에 서울에 내 집 한 채를 마련하겠단다.

김강순이 본인 소유의 집이 없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아내가 양가 부모님을 보살피느라 따로 직업을 갖지 않아서다. 외벌이로 아내와 자녀 둘을 책임지느라 집을 마련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김강순은 집 있는 사람들이 하나도 부럽지 않다고 한다.

"만약에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아내도 일했으면 저나 아내 둘 중에 누군가 몸이 아파서 병원 신세를 졌을지 몰라요. 그런데 아직은 우리 부부가 아파서 병원에 다니는 일은 없었어요. 아내가 부모님 모시면서 희생을 많이 했어요. 저희는 초등학교 친구였어요. 한 동네에 살았고, 부모님들도 다 잘 알고요.

남들은 아파트가 있고, 부동산 투기가 어떻고 하는데 저희는 집 없고, 투기 안 하고, 남한테 손 안 벌리고 살았어요. 이렇게 사는 게 행복해요. 대한민국에서 빚 없이 사는 사람만큼 부자가 어디 있어요? 저는 빚이 없으니 부자예요(웃음)."


김강순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밝고 긍정적인 마인드가 어디서 오나 했는데, 욕심 없이 성실하게 살아온 삶 덕분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음나눔유니온을 만나다
 

▲ 2023년 2월 17일 중부지역지부 운영위원회 끝난 후 기념촬영(왼쪽에서 세 번째가 김강순). ⓒ 김강순


매일 출근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출근할 곳이 없으니 상실감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퇴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렇다. 하지만 이음나눔유니온을 만났다. 이곳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인생 2막을 시작하는 때에 만난 사람들이니 관계가 돈독해 지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역을 기초로 뭉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람을 위한 조직이니 만큼 사람과의 관계가 으뜸이다.

김강순은 70세까지 일하고 싶다고 한다. 사람은 모름지기 일을 해야만 노화도 더디게 온다. 반드시 돈을 버는 일이 아니어도 괜찮다. 살면서 쌓은 소소한 경험과 재능을 나누기만 해도 인생 2막은 저절로 온다.

"퇴직할 즈음 회사에서 유급 휴가를 2개월 줬어요. 작년에 날씨도 엄청 더웠잖아요. 출근을 안 하니까 마땅히 갈 데가 없는 거예요. 출근하고 싶었어요. 저는 아직 젊다고 생각해요. 노동조합이 없는 사업장이 있으면 저의 경험을 나누어주고 싶어요. 이음나눔유니온에서는 막내지만요(웃음)."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음나눔유니온 홈페이지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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