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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 이전 완도바다엔 무슨 일이 있었길래

완도에서 발견된 고인돌이 말해주는 것들... 선사시대부터 꽃 피운 해양문명

등록|2024.04.26 09:47 수정|2024.04.26 09:48

▲ ⓒ 완도신문


고인돌. 한자 표기로는 지석(支石)이다. 일반적으로 선사시대 그 지역을 관할하는 유력자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을 지석묘(支石墓)라고 부른다. 그러나 지석묘는 일본학자들에 의해 표기가 확산된 것이라는 견해가 강하다.

일제강점기 일본학자들이 우리나라의 고분과 고인돌을 도굴해서 유물을 본국으로 유출했다. 고대사에 취약한 일본은 한반도 전역에 분포한 고인돌문화가 고조선의 단군시조에서 유래한 우리고유의 민족정신의 기반이라는 것을 인지했다.

그래서 더 많은 유적을 조사하고 발굴하여 우리의 민족정신을 파괴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의 중심에는 단재 신채호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뤼순감옥에서 죽음을 앞두고 고조선의 역사인 조선상고사를 집필했다.

그가 죽은 후, 미완의 글이 책으로 발간되어 고조선의 역사가 희미하게 전해지는 부분을 두고 학계에서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독립운동을 이끈 민족의 지도자들이 지키려고 했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의 민족정신이다. 고인돌이 우리민족의 뿌리인 고조선의 역사라는 것을 독립투사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우리의 정신문화가 오롯이 전해지는 찬란한 역사를 후손에게 꼭 남기고 싶었던 것.

고인돌은 이제 우리식 표현이다. 그것은 '돌을 괴었다'는 '굄돌'이라는 의미다. 일반적으로 고인돌은 청동기를 사용한 선사인류의 무덤으로 알려졌지만,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고인돌이 형성된 지역을 모두 고인돌문화권으로 본다. 큰 바윗돌을 다듬어서 무덤을 사용한 것도 있지만, 제단으로 사용한 것과 마을의 경계를 표시하는 입석(선돌)으로 사용한 것도 있다. 이 모든 것이 거석문화에 포함된다.

고인돌이라는 표현을 논문에 처음으로 기록한 이는 한흥수라는 학자다. 그는 일제강점기 때 유럽으로 건너가 고고학을 전공한 국내의 1세대 고고학자다. 그는 동료 고고학자인 도유호(1905∼1982), 민속학자 손진태(1900~?)와 함께 우리의 고인돌을 연구했다. 조국광복을 맞이하고 한흥수와 도유호는 월북해서 북한지역의 고고학계를 이끈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1935년 한흥수는 그의 고고학 연구논문인 조선의 거석문화 연구에서 우리나라 거석문화를 선돌, 고인돌, 칠성바위, 독무덤의 4분류로 나누어 분석했다. 돌무덤을 왜 고인돌이라 명명했는지는 그의 논문에 밝히지 않았지만, 이후 우리나라 학회에서 고인돌이란 이름을 자주 쓰기 시작했다. 조선의 민족정신을 이어가자는 의미에서 모든 표현을 우리식 말뜻으로 바꾸는 것에서 유래를 찾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여전히 일본에서 사용하는 지석묘라는 표현을 더 자주 사용한다. 발굴현장을 책임지고 있는 행정부서조차도 그대로 따르기 때문에 고인돌과 지석묘를 혼용하는 이들이 많다.

지난 1984년 한국고고학연구소가 발간한 한국고고학개정용어집에서 지석묘를 고인돌로 사용하자고 의견을 냈다. 그래서 지석묘가 일본식 명칭이라는 인식과 고인돌이 무덤의 기능만을 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역사학계의 연구발표로 인해 현재는 고인돌이라는 명칭을 두루 사용하게 됐다.

고인돌문화는 계급사회가 시작된 청동기시대에 주로 형성됐다. 처음에는 경제력과 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만 추정했다. 돌화살촉이나 간검돌, 민무늬토기, 청동제품 등이 고인돌의 주요 부장품이다. 부장품이 아예 발견되지 않은 것도 많다. 또, 고인돌은 이차장(二次葬)이나 세골장(洗骨葬, 1차로 가매장하여 살을 썩혀 없애고 뼈만 추려 묻는 장례)용의 무덤일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완도군의 청산면에서도 고인돌 세력에 의해 세골장의 초분이 발달한 것으로 유추한다.

이 시기 사람들은 거대한 바위를 먼 곳까지 운반했다. 그래서 고인돌이 분포한 지역은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공동체사회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이 시기 지배층의 일부는 청동무기를, 농기구로는 신석기시대보다 발달한 반달돌칼 등의 도구를 사용했다. 고금면 고인돌군락에서 수습한 유물도 그와 비슷하다.

고인돌 세력이 형성되었다는 것은 농경사회의 시작을 알린다. 그들은 농기구를 이용하여 벼, 보리, 조, 콩 등 다양한 곡물을 경작했다. 완도읍, 고금면, 청산면의 고인돌 세력도 경작을 했고, 그때부터 완도지역은 반농반어의 생활이 진행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본격적으로 정착생활을 하면서 그들은 사냥보다는 가축을 길러서 식량을 얻는 비율이 높아졌다.

정주 인구가 늘어나면서 주거지의 규모도 커졌다. 그들은 농경지를 앞에 둔 산과 구릉의 바로 아래쪽에 주로 마을을 형성했다. 바닷가 인근을 선택한 세력들은 그나마 자연의 특혜를 톡톡히 누렸다. 유물을 통해 고인돌이 축조되던 시기 그들의 생활상을 유추할 수 있는데, 고인돌에는 죽은 자에 대한 애도와 사후 세계를 대비한 부장품이 그가 살아 있을 때의 권력에 걸맞게 놓여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유물로는 특수 계층에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비파형동검, 청동도끼, 곱은옥, 대롱옥, 청동거울 등이 있다. 붉은간토기, 가지무늬토기, 나무열매나 곡물의 껍질을 벗긴 갈돌과 갈판, 곡식의 이삭을 자르는 반달돌칼, 나무를 자르거나 가공할 때 쓰는 돌도끼, 돌자귀, 돌끌 등이 발굴되기도 한다. 이 외에도 옷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가락바퀴, 고기잡이에 이용한 그물추, 신분의 상징물로 이용되었던 간돌검, 그 중에서 돌화살촉은 간돌검과 같은 곳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고 여러 점이 한꺼번에 나오는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완도의 해양문화의 시작을 대다수 사람은 청해진 장보고시대로만 인식한다. 장보고가 해양문화의 꽃을 피웠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어찌 생각하면 틀린 말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답도 아니다.

물론, 장보고는 청해진을 설치하여 찬란한 해양문화의 꽃을 피운 건 사실이다. 대양을 지배하며 교역을 통해 각국의 바다를 지배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장보고 이전의 시대를 깡그리 무시하면서까지 장보고가 위대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완도바다에서는 무수한 해양세력이 선사시대부터 해양문명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곳곳에 발견되는 유적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선사유적의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건 지역문화 발전에 있 큰 낭패다. 연계성을 갖는 지역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지역 관광을 고민하고 논한다는 것 또한 의미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올바른 역사인식, 문화의 흐름을 읽는 감각, 시대적 흐름을 파악하는 인식전환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선사시대를 거쳐 청동기, 마한의 시대를 거치고 나서도 완도바다는 끝까지 세력을 형성하고자 하는 막강한 해상세력의 영향이 있었다. 장보고 이전의 시대가 빠져버린 완도의 해양문화는 모든 게 어불성설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글쓴이는 정지승 문화예술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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