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보쌈의 원형은 '총각보쌈'이었다
[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MBN <세자가 사라졌다>
▲ MBN <세자가 사라졌다>의 한 장면. ⓒ MBN
보쌈 하면 과부보쌈을 많이 떠올린다. 조선시대 과부들이 한밤중에 포대기에 싸여 납치되는 장면을 주로 연상하게 된다. 과부 재가를 억압하는 풍습을 벗어나고자 과부 본인이 외간남자와 짜고 납치 자작극을 벌이는 광경을 떠올리기도 한다.
MBN 사극 <세자가 사라졌다>는 조만간 세자 이건(수호 분)의 장인이 될 어의 최상록(김주현 분)이 세자를 보쌈하는 어이없는 상황을 보여준다. 세자빈이 될 자기 딸 최명윤(홍예지 분)이 과부가 될 운명이라는 말을 듣고 딸의 운명을 고치고자 벌인 일이다.
기록에 남아있는 '총각보쌈' 이야기
▲ MBN <세자가 사라졌다>의 한 장면. ⓒ MBN
과부보쌈이 보쌈의 전형적 모습이었다고 생각하면, 이 드라마의 총각보쌈은 예외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실제는 달랐다. 과부보쌈보다 총각보쌈이 조선시대에 먼저 부각됐다. 총각보쌈이 예외적이었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당사자의 의사를 무시하고 강압적으로 이뤄지는 약탈혼은 고대 사회에서는 더 많았다. 그렇지만, 끈으로 결박해 와서 결혼한다는 의미에서 박취(縛娶) 등으로 표기된 과부 약탈혼이 사회현상으로 주목을 받은 것은 조선시대 후기다.
조선 후기의 왕명을 모은 <수교정례>에 따르면, 정조의 아들인 순조가 임금일 때인 1805년에 형조판서 이면긍이 보고한 내용 중에 "근래에 지방 촌락에서 수절하는 과부인 양인(良人) 여성을 강폭한 자가 무리를 거느리고 밤중에 포대기에 싸서 결박하는 것을 박취라고 부른다"는 대목이 나온다. 과부를 보쌈하는 일이 1805년 이전의 어느 시점에 사회 문제가 됐음을 보여주는 문장이다.
2019년에 <비교민속학> 제69집에 실린 이영수 인하대 강사의 논문 '보쌈 구전설화 연구'는 이웃 과부집에 놀러간 안동의 권 진사를 과부로 착각한 장정들이 보쌈해가는 <청구야담>의 설화를 소개한다. 조선 후기에 나온 <청구야담>에 소개된 권 진사는 부인과 사별한 가난한 남성이다. 그런 그가 과부 집에 놀러가 저녁을 먹은 뒤 보쌈을 당했던 것이다.
보쌈을 지시한 사람은 고을 이방이다. 과부를 보쌈한다고 벌인 일이 권 진사 보쌈이라는 엉뚱한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방은 끌려온 사람이 과부인 줄 알고 만족해 하며 '오늘 밤은 우리 딸과 함께 자라'고 일러둔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권 진사는 이방의 딸과 결혼하게 된다.
장정들이 권 진사를 여성으로 착각한 것은 그가 저녁밥을 얻어먹은 뒤 과부의 옷을 입었기 때문이다. 식사를 대접한 과부가 옷을 바꿔 입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권 진사가 이방의 딸과 혼인하자, 과부는 이 모든 게 자신의 계획이었다고 털어놓는다. 자신을 보쌈하려는 이방의 속셈을 알아챈 과부가 보쌈을 당하지 않으려고 권 진사와 옷을 바꿔 입었던 것이다.
과부는 이방에게 보쌈을 당하느니 양반인 권 진사의 후실이 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이로 인해 권 진사는 두 아내와 함께 살게 됐다. 과부보쌈이 전혀 엉뚱한 결과로 귀착됐던 것이다. 위 논문은 "이와 같은 이야기는 <청구야담> 이전의 설화집에서는 보이지 않으며"라고 설명한다. 19세기 중엽을 전후해 발행된 <청구야담> 이후에야 이런 이야기가 널리 퍼졌던 것이다.
"총각보쌈이 과부보쌈보다 더 오래된 관행"
▲ MBN <세자가 사라졌다>의 한 장면. ⓒ MBN
광해군의 최측근인 어우당 유몽인(1559~1623)의 <어우야담>에도 총각보쌈 이야기가 나온다. 이 글에는 연산군이 쿠데타를 당한 1506년 이전에 과거시험을 보러 한양을 방문한 선비가 등장한다.
선비는 통행금지 시각인 인정(人定, 10시 12분) 뒤에 지금의 명동성당과 을지로입구역 근처인 구리개에서 납치를 당했다. 가죽 포대에 싸인 그는 부잣집 여성 앞에 가게 됐고, 새벽이 되자 다시 포대에 넣어져 원래 위치에 놓이게 됐다.
이 사건은 선비가 명동성당 근처에 미련을 갖게 만드는 원인이 됐다. "이듬해에도 다시 전처럼 과거에 응시하러 경사(京師)에 가게 되자 매일 밤 인정 때마다 구리개에 가서 일부러 어정어정 머뭇거려 봤지만 끝내 가죽 포대를 만나지 못했다"고 <어우야담>은 말한다.
총각보쌈 풍습을 반영하는 이런 이야기가 <어우야담>에 실린 것을 근거로 위 논문은 "시기적으로 <어우야담>이 <청구야담>보다 200년 이상 앞서 있다"라며 "총각보쌈이 과부보쌈보다 더 오래된 관행이라 할 수 있다"고 평한다. 이 논문에 인용된 김현룡의 <한국문헌설화 3>도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총각보쌈과 과부보쌈은 상호 긴밀히 연관돼 있었다. 두 사회문제의 맥락은 서로 닿아 있었다. 홀아비보쌈이나 처녀보쌈은 별로 부각되지 않은 데 반해, 총각보쌈과 과부보쌈은 사회문제가 됐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총각보쌈이 많아진 것은 과부에 관한 법적 제약과 관련이 있다. 이 보쌈의 목적은 총각을 진짜로 결혼시키는 데 있지 않았다. 낯선 총각을 이용해 자기 딸이 과부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성이 과부가 되면 사회적 불이익이 많았다. 본인 못지않게 자녀에게도 제약이 많았다. 1485년부터 시행된 <경국대전>의 예전(禮典) 편은 "재혼하거나 행실이 부도덕한 여인의 아들과 손자"를 거론한 뒤 이들은 "생원·진사시에 응시하지 못한다"고 규정했다. 1단계 과거시험인 소과(생원시+진사시)에도 응시하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이런 식의 제약들이 있었기 때문에 부모들은 자기 딸이 과부가 될 가능성을 우려했다. 그런 염려에서 딸의 사주팔자를 보는 부모들이 많았다. 장정들을 동원할 경제적 여력이 있는 부모들 중에는 총각보쌈을 해서라도 딸의 운명을 바꾸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었다.
과부보쌈은 공식 재혼을 꺼리는 여성들이 사실상 재혼하는 통로로 활용됐다. 이 역시 과부 재가에 대한 법적 제약과 관련된 제도였다.
이처럼 과부보쌈과 총각보쌈은 과부에 대한 법적 제약에 똑같이 기원을 뒀다. 이 중에서 총각보쌈이 먼저 사회문제가 되고, 과부보쌈이 그 뒤에 부각됐다. 과부 재가에 가해지는 법적 제재에 대한 두려움이 처음에는 딸의 운명을 바꾸고자 총각보쌈을 하는 풍습을 낳고, 그 뒤에는 과부가 된 여성의 실질적 재혼을 돕는 과부보쌈이라는 풍습을 낳게 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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