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그 돈이 어디서 나온 것이냐..." 잡지 <개벽>이 첩 얻은 민영휘 비판한 이유

1924년, 49호에서 축첩 내용 상세히 소개

등록|2024.04.29 09:25 수정|2024.04.29 09:25

▲ 일제강점기 시절인 1924년 7월 1일 잡지 『개벽』은 민영휘를 포함한 민 씨 일가의 축첩(畜妾)과 관련된 뒷 얘기를 폭로한다. (사진=개벽 49호, 본문 기사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근현대사 데이터베이스) ⓒ 충북인뉴스


"아! 그 돈이 모두 어디에서 나온 것이냐! 인민의 피와 땀을 다 자낸 것이 아니냐!"(<개벽> 49호 / 제목 색색형형의 경성 첩 마굴, 가경 가증할 유산(계)급의 행태 / 1924년 7월 1일).

일제강점기 시절인 1924년 7월 1일 잡지 <개벽>은 민영휘를 포함한 민 씨 일가의 축첩(畜妾)과 관련된 뒷 얘기를 폭로한다.

기사 제목은 '色色形形(색색형형)의 京城(경성) 妾魔窟(첩마굴), 可驚可憎(가경가증 할 有産級(유산급)의 行態(행태)이다.

요즘 말로 풀어보면 '형형색색의 경성 첩 마굴(악마의 소굴), 끔직하고 역겨운 유산계급(부자, 자본가)의 행태'라고 이해하면 된다.

기사 제목에서부터 이들 민영휘 일가의 축첩을 바라보는 시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필자는 觀相者(관상자)로 '관상을 보는 사람'이란 뜻인데, 익명으로 쓴 것으로 보인다.

<개벽>은 천도교에서 발행한 잡지로 1920년 6월에 창간했다. 당시 <개벽>은 서두에서 "현재 사회에서 큰 재산을 가지고 사치, 호광으로 2~3명의 첩을 얻어 별별 발광의 짓을 하는 자에 대해 이야기 하려면, 자연히 귀족, 부호 밖에 말할 수 없다"며 시작한다.

그러면서 "민씨(=민영휘를 포함한 여흥민씨 일가) 집처럼 첩 많은 집은 없다"며 "집집마다 다니며 보기는 바쁘고 어려우니까, 집도 크고 중심이 되는 경운동 '민 자작'(=민영휘) 집에다가 '애첩 관상소'(愛妾 觀相所)라는 임시 간판을 붙이고 한꺼번에 살펴 보자"고 시작한다.

"민영휘, 해주마마 안유풍이 '해주오, 해주오' 하면 다 녹는 모양"

<개벽>은 민영휘가 얻은 첩 중에서 안유풍 이야기를 비중있게 다룬다. 기사에서 해주마마(안유풍)는 2~3명의 아들을 낳고, 지금 껏 큰 호광을 누릴 뿐 더러, 대감(민영휘)의 총애를 특히 많이 입었다고 언급한다.

이어 "(최근에도) 별 수단을 다 써서 閔濬植(민준식)의 집 寺洞(사동, 지금의 인사동) 竹洞宮(죽동궁)을 10만3000원에 헐가로 매수해 해주마마(안유풍)를 주려고 수리 중"이라고 소개한다.

그러면서 "아무리 구두쇠 민 대감이라도 해주집(안유풍)이 '해주오. 해주오' 하는 데에는 다 녹는 모양"이라고 비꼬았다. 민영휘가 안유풍이 기거할 새집으로 매입한 '죽동궁'은 조선왕조 중종 단경왕후와 순종의 장녀 명온공주가 살았던 집이다.

이전에 안유풍이 살았던 집은 유안당(遺安堂)이러 불렸다.
 

▲ 청주시 상당구 산성리 산 28-1번지 사적지 상당산성내에 조성됐던 안유풍의 무덤. ⓒ 충북인뉴스



"일선융화(日鮮融和)의 결정체, 민영휘 아들 일본인 애첩 거느려"

잡지 <개벽>은 민영휘의 첩 뿐만 아니라 안유풍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큰아들 민대식과 셋째, 민규식의 축첩도 다뤘다.

이 잡지는 먼저 "(민대식과 민규식은) 미국 유학을 해 눈이 높아진 까닭에 업을 얻어도 어지간한 '바느질 그릇' 퇴물이나 기생으로는 만족지 못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친일파 민영휘의 자식들은) 일선융화(日鮮融和=일본과 조선이 화합해 어울린다) 호기회(좋은 기회)를 만나고 보니, (한일)합병 후에 은혜를 입은 귀족부호로서 가정부터 근본적으로 일선융화를 할 필요를 절실히 느꼈다"고 밝힌다.
 

▲ 충북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 114번지 사적지 상당산성 내에 조성됐던 친일반민족행위자 민대식의 무덤. ⓒ 충북인뉴스


그러면서 "민대식(안유풍의 장남)은 남산 밑 일본요리 국수집 주인의 딸을 매수하여, (일선)융화의 결정체인 아이까지 낳았다"고 전했다.

또 민영휘와 안유풍 사이에 태어난 민규식은 진남포 모 여학교의 일본인 교사를 첩으로 얻어 딸까지 낳고, 요새 또 배가 남산만하게 불렀다며 일본인첩과 두 번째 자식을 가진 사실도 알렸다.

<개벽>은 이들 민영휘 일가 외에도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던 민병석(閔丙奭)과 민병승(民丙昇), 민영찬(閔泳瓚), 민용호(閔溶鎬) 등 민 씨 일가의 축첩과 관련한 이야기도 상세히 전했다.

이어 민영휘와 그의 아들 등 다른 민씨 까지 포함해 이들이 축첩하는 과정에서 들어간 막대한 금전의 출처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충북인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