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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주는 효용, 덕분에 영혼이 다 맑아졌다

[서평] 신휘 시인의 시집 <꽃이라는 말이있다>

등록|2024.04.30 12:10 수정|2024.04.30 12:12
산에서 내려오다 크게 넘어져 발목을 삔 적이 있었다. 골절은 없었으나 늘어난 인대가 회복될 때까지 조심히 다녀야 했다. 신경에도 타격이 있었는지 저리는 증상도 오래갔다. 반 년 간 꾸준히 아팠고, 한 해를 넘겨서야 서서히 나았다. 완전히 예전처럼 돌아가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당시 나는 조심스레 걷느라 평소보다 더 굼떴다. 아픈 발목을 신경쓰면서 몸의 균형을 잡느라 뒤뚱거리고 절룩거렸다. 그래도 제시간을 잘 지키며 다녔다. 이동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서 불편할 뿐이었다. 지금은 자연스럽게 걷고 있지만, 내 발목이 더이상 예전같지 않다는 사실은 나만 느끼는 진실이다.

"하루치의 어둠을 탕진한 뒤 서둘러 퇴근하다 그만, 슬픔에 발목이 삐었다." (발목을 삐었다 중에서)

신휘 시인의 '발목을 삐었다'를 읽는데 욱신, 하고 다쳤던 발목이 다시 아파왔다. 누구에게나 나만 아는 슬픔이 있고, 자기 자신만의 전쟁터가 있는 법인데, 그 슬픔에 나도 같이 발목을 삐어 버린 느낌이었다.
 

꽃이라는 말이있다신휘 시집 ⓒ 모악시인선



시인은 발목을 삔 사람에 빗대어서, 슬픔을 지고 가다가 절룩거리는 마음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아픔을 참고 절룩거리며 걸어가면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러나 '무릇 갈 길이 먼 자는 눈이 아닌 무릎으로 서서 우는 것이다'라는 마지막 행에서 비장한 뜨거움을 느꼈다. 무릎으로 서 있는 물기어린 두 눈 앞에, 먼 길이 또렷하게 비치는 듯 해서였다.

그 후로 머나 먼 길을 얼마나 꿋꿋이 나아갔는지, 혹은 나아가지 못했는지 궁금하지 않다. 무릎으로 서서 울겠노라는 마음과 지금도 울고 있는 마음이 덩달아 나를 울게 했으니 그걸로도 충분했다. 문학은 대개 그렇게 무용하면서도 그 어떤 것보다도 깊고 의미있는 유희였으니까.
 

▲ 김천 까페 씨앗의 풍경. (사진출처: 신휘 시인 페이스북) ⓒ 신휘


경북 김천에서 신휘 시인이 운영하는 카페 씨앗의 창가에는 많은 시집들이 놓여있다. 오전에 포도밭 일을 마친 시인은 오후에 카페로 출근한단다.

시 강연을 하러 외부에 나가는 날만 아니면 대부분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는 듯하다. 책을 읽으며 창 너머의 정원과 그 정원에 놓인 낮달 조형물을 바라보는 듯하다.

"영혼이 맑은 것들은 몸이 아니라 슬픔으로 눈을 자주 씻은 것들이라고 한다. 눈을 씻는 일은 눈물을 흘리는 일. 걸핏하면 나는 새처럼 앉아 우는 날 많은데 눈물이 아주 마른 날은 억지로라도 내 안에 꼬깃 꼬깃 접어둔 타인의 아픔과 슬픔까지를 끄집어내 내 일마냥 한 타래로 엮어놓고 따라 줄줄이 우는 것이다."(슬픔을 엮었다 중에서) 

나는 이 시를 읽고, 허수경 시인의 "농담 한 송이"가 떠올랐다. 사람의 가장 서러운 곳으로 가서 따온 농담 한 송이와, 타인의 아픔도 내 일인 것 마냥 한 타래로 엮은 굴비 한 두름은 닮았다. 슬픔으로 눈을 자주 씻으며, 울다가 울다가 시인은, 울어야 맑아진다는 진실에 이르렀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를 울게 하는 시들이 좋다. 울게 함으로써, 비 온 후 개인 하늘처럼 나를 맑아지게 만드는 시들이 좋았다. 이 시집에는 그런 시가 여럿 있었다. "뻘밭", "낙타 둘 - 우물", "숫돌" 등. 그중에서도 읽고 또 읽을수록 잠잠히 눈물이 고이던 시는 "사랑은 괜시리 어룽대는 저 물빛 위에"였다.

"호영 형님이 아픈 다리를 끌고 평생 꽃밭을 일구는 / 일 같기도 하고 / 아버지가 경운기 하나로 저 큰 무논을 써레질하는 / 일 같기도 하고 / 어머니가 젖은 짚단에 불을 댕겨 생전 밥 짓던 / 일 같기도 하거니와, / 때론 성자들의 장난과도 같이 아주 서툰 듯 지긋이 / 아름다운 것이리 / 사랑은 잠시만 눈을 떼도 흔들리는 못줄처럼 / 저 물 위에, 괜시리 어룽대는 저 물빛위에"(사랑은 괜시리 어룽대는 저 물빛 위에 전문)

물빛이 무슨 색인지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물빛 위에 어룽거리는 것이 사랑이라면, 사랑은 물빛인가 아니면 그 물빛 위에 흩날리는 안개인가 아니면 그 순간 때마침 지나가던 바람의 그림자인가. "사랑"의 감정이 무엇인지,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면 정확히 깨달을 수 있을까.

시인들의 답은 사전적이지도 과학적이지도 않지만 영혼을 일깨운다. 모두가 알고 있으나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그 '무엇'에 대하여 노래하는 사람이 시인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어룽대는 물빛처럼 어렴풋이 흔적만을 남겼는데, 그 흔적 속에서 사랑의 단서를 찾아낸 그의 시가 내 마음을 물빛으로 물들였다.

오전에는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밭으로 출근하는 그는 포도밭 농부다. 밭일을 다 마치고 카페 씨앗으로 출근하는 그는 카페 씨앗의 사장님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어떤 이름보다도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이름은 따로 있다. 슬픔으로 눈을 씻어 사람들의 마음을 맑게 해주는, 꽃 같은 시를 짓는 사람. 그는 천상 시인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양윤미 시인의 개인 브런치 채널에도 업로드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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