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간 매달 앨범 디자인 작업, '전설'이 된 주역들
[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힙노시스: LP 커버의 전설>
음악에 죽고 살던 시절, 지금처럼 결제만 하면 바로 뚝딱 뭐든 찾아서 듣기란 불가능했다. 음악은 소리였지만 그 소리를 접하기 위해선 라디오 프로그램 DJ의 선구안을 쫓거나 물리적 재생 매체를 구해야만 했다. 테이프는 비교적 저렴했지만, 하루에도 같은 곡 수십 번씩 듣던 때라 얼마 못 가서 너덜너덜 늘어지기 시작했다(VHS 비디오도 비슷한 운명을 맞곤 했다). 워크맨이 보급되고 카세트 라디오는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게 되면서 테이프는 편리하긴 했지만, 결정적으로 '뽀대'가 부족했다. 반면에 작은 책상 가득 메울 만큼 얇지만 면적이 컸던 LP 레코드는 뭔가 그럴싸해 보였다. 턴테이블은 카세트 데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관리하는데 공을 들여야 했지만, 바늘이 레코드 표면을 읽어내려가는 순간 시작되는 자글자글한 음향은 마치 백색 소음이 주는 안도감처럼 작용하곤 했다.
이제는 온라인으로 음악을 듣는 시대이다 보니 음원 사이트건 유튜브 재생이건 텍스트로 기본정보 정도만 소개될 뿐이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조그마한 테이프조차 온갖 공을 들여 근사하게 꾸며지곤 했다. 테이프 앞면에는 온갖 폼을 잡고 있는 뮤지션들의 사진이 아니면 속에 담긴 음악과 닮은 꼴의 이미지가 가득했고, 뒷면에는 음원 정보가 빼곡했다. 게다가 케이스 여백에 알뜰하게 자리를 차지한 속지가 별도로 존재했다.
그렇게 정성들인 앨범 상당수는 이른바 '명반'이라 불리던 것들이다. 모르는 사람은 몰라도 아는 사람은 다 알던, '아티스트' 호칭이 어색하지 않게 붙던 록 음악 거장들의 앨범은 그 안에 담긴 명곡은 물론 앨범 디자인만으로도 '아우라'가 가득했다. 그래서 이제 그들의 음악을 정말 어쩌다 듣고 마는 현재에도 음향이 아니라 물질화된 디자인 이미지로 기억에 남아 있다. 핑크 플로이드, 비틀즈, 레드 제플린 같은 그룹들은 '전설'로 회자되며 그들의 앨범은 여전히 팔리고 대표곡은 오늘날에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그런 앨범의 커버 디자인은 과연 어떻게 누가 작업한 걸까? 그런 궁금증이 종종 들 때가 있었다. 한참 지나 정보의 바다가 전 세계를 잇게 되자 그 의문은 답을 찾았다. '힙노시스(Hipgnosis)'라는 영국의 디자이너 그룹이 바로 그 주역이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경까지 10여 년간 그들은 거의 매월 새로운 앨범 디자인을 작업했고, 그중 상당수가 '전설'이 되었다. 이들의 앨범 디자인은 해당 앨범의 음악과 이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차원에 이르렀다. 그쯤 되면 디자이너의 정체가 흥미로워질 수밖에 없다. 안톤 코르빈의 다큐멘터리 <힙노시스: LP 커버의 전설>은 바로 그 답을 제시하는 작업이 될 테다.
그 시절에만 가능했던, 질풍노도의 실험과 도전 기록들
영화가 시작된다. 고의적으로 조성된 모노 톤의 흑백 화면에 거친 질감이 가득하다. 한 초로의 남자가 마치 관짝을 짊어진 것처럼 무엇인가를 잔뜩 등 뒤에 매고 길을 걷는다. 어느 건물에 도착해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매듭을 풀어낸다. 유심히 보니 어릴 적 즐겨듣던 록 명반들의 앨범 표지의 액자 판형들이다. 그리고 인터뷰가 시작된다. 전설적인 디자인 집단 '힙노시스'의 일원이던 오브리 '포' 파월이다. 그는 친구 '스톰' 소거슨과 함께 갓 성년이 된 시절부터 함께 작업한다. 그들이 청소년기를 보냈던 영국의 캠브리지에는 그들과 비슷한 친구들이 제법 있었다. 질풍노도의 시절에 서로 쿵짝이 맞던 이들은 서로 사고도 치고 교류도 해가며 가까워진다. 그들 중 일부는 '핑크 플로이드'를 결성하고 친분이 있던 '포'와 '스톰'에게 자신들의 앨범 디자인을 의뢰한다. 그렇게 힙노시스의 '전설'은 시작된다('힙노시스'의 그룹명도 핑크 플로이드의 초기 리더였던 시드 바렛의 낙서에서 얻었다).
이들은 물론 현재적인 관점으로 보면 비범한 천재들이지만, 영화는 그들의 청소년 시절 사회상과 대중문화 동향을 꼼꼼하게 해설한다. 1960년대가 어떤 시대인가? 68운동과 히피 무브먼트, 대중문화의 폭발과 다양한 문화적 실험, 기성세대와의 갈등과 청년들의 반항으로 끓어오르던 시대 배경은 영화의 주역인 힙노시스가 선보인 놀라운 문화적 실험에 자양분을 넘치도록 제공해준다. 뭔가에 홀린 것처럼 이 패기 넘치는 청년들은 음악산업의 관행을 초과하는 야심 넘치는 시도를 겁도 없이 이어나간다. 치기 넘치는 사고뭉치 행각이 지인들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유머러스한 폭로로 밝혀지지만 곧이어 그런 힙노시스 그룹이 수행한 일련의 작업 결과물이 화면 가득 소개될 때는 넋을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다. 위대한 예술품의 탄생과정을 목격한다면 누구라도 그럴 법하다.
이들은 당대에 대중음악은 물론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거물들의 단골 파트너가 된다. 사실상 슈퍼 밴드들과 한 몸처럼 동고동락하며 힙노시스는 그들의 앨범과 음악을 완성 혹은 확장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사업적 제휴를 넘어 이들의 디자인 작업은 그 자체로 음악인과 음반제작기업 사이에서 치열하게 펼쳐지던 밀고 당기기 투쟁의 일환으로 작동한다. 아티스트들과 의기투합해 실험과 도전을 거듭하는 절차는 곧바로 회사와의 갈등과 투쟁으로 연속된다. 예술적 도전을 갈망하던 음악인들은 힙노시스에 의해 그들의 음악 속에 감춰진 욕망을 투영할 수 있었고, 비용 부담과 난해한 설정에 고개를 저으면서도 위대한 결과물이 탄생한 덕분에 음반사와 매니지먼트는 자신들의 전속 소유물이던 아티스트들의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자신들 또한 의뢰자들 못지않게 '거물'로 등극한 힙노시스의 야심적 실험은 멈출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음악산업을 장악한 거대기업은 그냥 동네 해변이나 뒷산에 가서 사진을 촬영한 뒤 합성하면 될 것을 굳이 하와이나 사하라, 히말라야까지 가느냐며 황망해한다. 하지만 아직 컴퓨터 그래픽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 이들의 비전은 머릿속에 순간 떠오른 찰나의 이미지를 구현하는데 어떤 장벽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결의로 가득차 있었다. 그렇게 온갖 악재와 고초를 감수해 가면서 몸으로 때우고 시간과 비용을 감수한 덕분에 우리는 경이로운 예술적 결실을 목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작업이 그저 막대한 예산과 자원을 투입한 결과물로 그치는 건 아니다. 초창기부터 이들의 작업 아이디어와 제작방식은 특별한 것이 있었고, 비록 손익분기점은 맞춰야 하는 게 당연하지만 '예술적 비전'의 구현이 절대적인 가치로 항상 자리하고 있었다. 거대한 수익을 내기 시작한 음악산업의 전성기와 그 조건 아래에서만 가능했던 거대한 예술적 실험이 공존하던 시절이었다.
핑크 플로이드 대 힙노시스, 혹은 평행이론의 순간들
영화는 힙노시스가 작업한 대표작 관련 소개와 숨은 에피소드 및 작업과정들을 순차적으로 전개해 나간다. 단락을 구분해주려는 듯 애니메이션 효과를 활용해 해당 앨범 이미지가 등장했다 빠져나가곤 한다. 그렇게 호흡이 늘어지지 않도록 영화는 영민하게 지루할 틈 없는 속도감을 자랑하지만 그런 맺고 끊음을 초월하는 영역이 분명히 존재한다. 바로 힙노시스를 앨범 디자인으로 이끈 어릴 적 고향 친구들, 핑크 플로이드의 존재감이다. 핑크 플로이드의 초창기부터 거대한 성공과 예술적 성취, 그리고 갈등과 분열에 이르는 과정을 힙노시스는 단순한 지인이 아니라 내부자로서 조망한다. 이 대그룹의 흥망성쇠에 힙노시스 역시 일정한 지분을 갖는 셈이다. 레드 제플린이나 폴 매카트니 같은 동급의 거물 음악인들 비중도 상당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마치 핑크 플로이드의 기록영화 같은 착시가 들 정도다.
힙노시스와 핑크 플로이드의 인연은 그룹이 결성되기 전 단계로부터 출발한다. 이들은 동년배 세대로서의 경험은 물론이거니와, '아버지의 부재'라는 경험도 공유했고, LSD 같은 동시대 유행하던 약물조차 함께 겪었다. 힙노시스 특유의 작업 스타일, 머리를 강제로 열고 주입하듯 디자인을 만들어야 할 앨범을 반복해서 듣고 소화하려던 기질은 곧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적 변천사와 조응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이들은 시드 바렛이 마지막으로 참여한 초창기 사이키델릭 사운드의 2집 < A Saucerful of Secrets, 1968 >과 그룹의 대표작이자 1970년대 록 음악의 상징 중 하나가 된 8집 < The Dark Side of the Moon, 1973 >, 9집 < Wish You Were Here, 1975 >, 10집 < Animals, 1977 > 앨범 표지 작업을 맡았으니 그야말로 4(5)+2 멤버라 해도 모자라지 않을 개입력을 가졌던 셈이다. 그러하기에 시드 바렛의 비극적 운명과 동료 멤버들의 옛 리더에 대한 애증을 온전하게 공유할 수 있었다.
슈퍼 그룹이 된 후 음악성의 차이와 수익분배 문제 등 온갖 영욕을 겪어나간 핑크 플로이드의 후반부는 힙노시스의 쇠락과 고스란히 겹쳐진다. 핑크 플로이드로 상징되는 스튜디오 대작 앨범과 전세계 공연을 통한 거대한 음악산업의 전성시대가 힙노시스의 상업성과 예술성 양자를 공히 달성한 디자인 작업의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시드 바렛의 광기와 폭주 대신에 보다 전형적인 밴드 활동으로 접어들며 비슷한 유형의 대그룹들이 겪어야 했던 분쟁을 핑크 플로이드 역시 극명하게 겪었던 셈이지만, 예술적 고집에 감정적 요소가 화학적으로 결합되면서 그들의 다툼은 몇 차례 화해 시도에도 불구하고 해소되지 못했다. 힙노시스 역시 궤는 다르지만 유사한 상황을 겪게 된다.
핑크 플로이드의 후반기 양대 축이던 로저 워터스와 데이빗 길모어가 그룹 이름을 놓고 벌인 수십 년간의 다툼으로 원수지간이 된 것처럼, 앨범 디자인을 넘어 사업 다변화를 시도하다 닥친 경영난 이후 결별한 '스톤'과 '포' 역시 함께 한 15년에 맞먹는 긴 시간 동안 다시는 만나지 않았고, '스톤'이 세상을 떠나면서 온전한 화해란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로저 워터스와 데이빗 길모어가 아직 생존해 있기에 2005년 '라이브 8' 공연에서의 극적 재결합 같은 순간도 목격 가능한 것과 대조되는 결말이다.
근본적으로 이들의 좋았던 옛 시절이 종말을 맞이한 것은 거대한 성공을 경험한 예술가들이 부딪히는 위기의 전형적 예시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대중음악 지형의 변화와 직결되는 사례가 된다. 예술적으로는 지나치게 거대화하면서 전형적으로 고착된 슈퍼밴드 스타일에 대한 반감으로 펑크 록을 비롯한 새로운 흐름이 등장하고, 1980년대 들어 음악을 '듣는 것'에서 '보는 것'으로 전환시킨 효시로 기록될 MTV가 등장하고 예술적 완성도 대신 '뿅뿅'거리는 전자음악과 화려한 이미지가 득세한 문화지형이 가미된 결과다.
이들의 도전과 실험을 티격태격하면서도 떠받치던 음악산업 토대의 변화가 상부구조인 힙노시스의 흥망에 결정적 요소가 된 셈이다. 일련의 시행착오를 거친 후 힙노시스 구성원들은 따로 또 같이 새로운 시대의 음악인들과 제휴하긴 했지만 1960-70년대의 성취에는 도달할 수 없었다. 그 시대에만 가능했던 방식과 경험이기 때문이다. '스톤'과 '폴'의 결별을 불러온 입장의 차이도 그 쇠락하는 과정에서 모색한 방향의 상이함 때문이었다. 관계의 종말은 거대한 구조적 격변 일부에 지나지 않던 셈이다.
그들의 후속세대가 힙노시스에 바치는 경의
영화는 힙노시스의 작업과 그들의 작업으로 '화룡점정' 완성된 시대의 명반들에 얽힌 일화들을 재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관람할 수 있는 수준이다. 온전히 그 시대의 음악과 아티스트들을 체득하지 못한 경우라도 대중문화 역사를 공부하는 셈 치고 흥미롭게 감상 가능하다. 그만큼 알차고 정보량도 어마어마하다. 이 영화 자체가 하나의 '아카이브' 기능을 해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테다.
영화의 감독과 제작자 명단이 무척 흥미롭다. 안톤 코르빈 감독은 뮤직비디오와 사진 작업으로 출발해 극영화에 안착한 대표적 감독 중 한 명이다. 그의 경력은 바로 힙노시스의 쇠퇴 이후 등장한 록 음악의 사조들, 1980년대 뉴웨이브와 포스트펑크, 모던 록의 (이제는 선배들 못지 않은 거물이 된) 신예들과 함께 출발했다. 조이 디비전과 U2, 디페시 모드, R.E.M과의 여러 작업은 포스트 힙노시스의 대표주자라 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다. 그런 감독이지만 자신의 청소년기 음악에 심취하며 기억 속에 간직된 힙노시스의 작업이 롤 모델이 되었음을 숨기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이 다큐멘터리는 위대한 선배들에게 바치는 안톤 코르빈의 헌정이라 해도 무방할 테다.
3명의 제작자 명단 또한 예사롭지 않다. 우리에겐 미중년의 대명사일 배우 콜린 퍼스 역시 힙노시스가 작업한 음악인들의 열혈팬으로서 기꺼이 제작자로서 책임을 짊어졌다. 다른 2명의 제작자 중 한 명은 힙노시스의 라이센스와 저작권을 물려받은 팀의 총수 출신이고 나머지 한 명도 음악산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체험했던, 혹은 선망했던 위대한 시대와 영웅들을 기록하고 소개하는데 모두 기꺼이 함께했을 테다.
수천 개의 아카이브 자료를 안톤 코르빈이 솜씨 좋게 조립한 결과물은 그 시절 음악과 20세기 대중문화 조류를 숙지할수록 그 진가를 깨닫게 되는 흥미로운 보물창고다. 그리고 근래 K-POP 전성시대의 명과 암이 토론되는 현실에서 '나무'를 넘어 '숲'을 조망하게 만드는 비판적 교재로서도 유용한 성취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후대 음악인 중 균형추이자 해설 역을 자임한 게 성질 고약한 밴드 '오아시스' 출신 노엘 겔러거라는 점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는 과거와 현재의 음악산업과 구조를 신랄한 논평과 함께 자신의 성장담을 섞어 솜씨 좋게 풀어낸다. 그야말로 세대와 세대를 잇는 메신저 역할이다. 기본적으로 힙노시스에 대한 경의를 가득 피력하지만 왜 당신은 그들에게 앨범 커버를 의뢰하지 않았냐는 인터뷰어의 질문에 단답으로 내뱉는 내용이 의미심장하다. '너무 비싸거든요'. 많은 의미가 함축된 장면이다.
아마 누군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자신의 과거 한구석을 차지하는 추억의 음악앨범을 발견하는 기분일 테지만, 다른 누군가는 모 아이돌 그룹을 둘러싼 분쟁에 과거 상황을 대입하며 비교할 수 있겠다. 그만큼 힙노시스와 그들이 구현한 1970년대 대중음악 황금기의 기억은 현재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결정적 요소로 자리매김한다. 이런 주장에 잘 수긍이 가지 않는다면 21세기 한국 대중문화와 문화산업의 알파이자 오메가 자체라 할 BTS(방탄소년단)의 대표곡 중 하나인 'FIRE(불타오르네)' 뮤직비디오를 재생해보기 바란다. 힙노시스의 대표작 중에도 손꼽히는 핑크 플로이드의 <Wish You Were Here> LP 커버 디자인이 그 안에서 오마주되어 펄떡거리고 있으니 말이다.
<작품정보>
힙노시스: LP 커버의 전설
Squaring the Circle(The Story of Hipgnosis)
2024│영국│뮤직 다큐멘터리
2024.05.01. 개봉│101분│15세 관람가
감독 안톤 코르빈
제작 콜린 퍼스, 게드 도허티, 머크 머큐리어디스
출연 오브리 파월, 스톰 소거슨('힙노시스'), 폴 매카트니('비틀즈'),
데이비드 길모어 & 로저 워터스 & 닉 메이슨('핑크 플로이드'),
지미 페이지 & 로버트 플랜트('레드 제플린'), 피터 가브리엘,
노엘 갤러거('오아시스'), 그레이엄 굴드먼('10cc'),
글렌 매틀록('섹스 피스톨즈'), 그 외 다수
수입 / 배급 ㈜티캐스트
이제는 온라인으로 음악을 듣는 시대이다 보니 음원 사이트건 유튜브 재생이건 텍스트로 기본정보 정도만 소개될 뿐이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조그마한 테이프조차 온갖 공을 들여 근사하게 꾸며지곤 했다. 테이프 앞면에는 온갖 폼을 잡고 있는 뮤지션들의 사진이 아니면 속에 담긴 음악과 닮은 꼴의 이미지가 가득했고, 뒷면에는 음원 정보가 빼곡했다. 게다가 케이스 여백에 알뜰하게 자리를 차지한 속지가 별도로 존재했다.
그런 앨범의 커버 디자인은 과연 어떻게 누가 작업한 걸까? 그런 궁금증이 종종 들 때가 있었다. 한참 지나 정보의 바다가 전 세계를 잇게 되자 그 의문은 답을 찾았다. '힙노시스(Hipgnosis)'라는 영국의 디자이너 그룹이 바로 그 주역이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경까지 10여 년간 그들은 거의 매월 새로운 앨범 디자인을 작업했고, 그중 상당수가 '전설'이 되었다. 이들의 앨범 디자인은 해당 앨범의 음악과 이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차원에 이르렀다. 그쯤 되면 디자이너의 정체가 흥미로워질 수밖에 없다. 안톤 코르빈의 다큐멘터리 <힙노시스: LP 커버의 전설>은 바로 그 답을 제시하는 작업이 될 테다.
그 시절에만 가능했던, 질풍노도의 실험과 도전 기록들
▲ "힙노시스"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 ㈜티캐스트
영화가 시작된다. 고의적으로 조성된 모노 톤의 흑백 화면에 거친 질감이 가득하다. 한 초로의 남자가 마치 관짝을 짊어진 것처럼 무엇인가를 잔뜩 등 뒤에 매고 길을 걷는다. 어느 건물에 도착해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매듭을 풀어낸다. 유심히 보니 어릴 적 즐겨듣던 록 명반들의 앨범 표지의 액자 판형들이다. 그리고 인터뷰가 시작된다. 전설적인 디자인 집단 '힙노시스'의 일원이던 오브리 '포' 파월이다. 그는 친구 '스톰' 소거슨과 함께 갓 성년이 된 시절부터 함께 작업한다. 그들이 청소년기를 보냈던 영국의 캠브리지에는 그들과 비슷한 친구들이 제법 있었다. 질풍노도의 시절에 서로 쿵짝이 맞던 이들은 서로 사고도 치고 교류도 해가며 가까워진다. 그들 중 일부는 '핑크 플로이드'를 결성하고 친분이 있던 '포'와 '스톰'에게 자신들의 앨범 디자인을 의뢰한다. 그렇게 힙노시스의 '전설'은 시작된다('힙노시스'의 그룹명도 핑크 플로이드의 초기 리더였던 시드 바렛의 낙서에서 얻었다).
이들은 물론 현재적인 관점으로 보면 비범한 천재들이지만, 영화는 그들의 청소년 시절 사회상과 대중문화 동향을 꼼꼼하게 해설한다. 1960년대가 어떤 시대인가? 68운동과 히피 무브먼트, 대중문화의 폭발과 다양한 문화적 실험, 기성세대와의 갈등과 청년들의 반항으로 끓어오르던 시대 배경은 영화의 주역인 힙노시스가 선보인 놀라운 문화적 실험에 자양분을 넘치도록 제공해준다. 뭔가에 홀린 것처럼 이 패기 넘치는 청년들은 음악산업의 관행을 초과하는 야심 넘치는 시도를 겁도 없이 이어나간다. 치기 넘치는 사고뭉치 행각이 지인들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유머러스한 폭로로 밝혀지지만 곧이어 그런 힙노시스 그룹이 수행한 일련의 작업 결과물이 화면 가득 소개될 때는 넋을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다. 위대한 예술품의 탄생과정을 목격한다면 누구라도 그럴 법하다.
이들은 당대에 대중음악은 물론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거물들의 단골 파트너가 된다. 사실상 슈퍼 밴드들과 한 몸처럼 동고동락하며 힙노시스는 그들의 앨범과 음악을 완성 혹은 확장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사업적 제휴를 넘어 이들의 디자인 작업은 그 자체로 음악인과 음반제작기업 사이에서 치열하게 펼쳐지던 밀고 당기기 투쟁의 일환으로 작동한다. 아티스트들과 의기투합해 실험과 도전을 거듭하는 절차는 곧바로 회사와의 갈등과 투쟁으로 연속된다. 예술적 도전을 갈망하던 음악인들은 힙노시스에 의해 그들의 음악 속에 감춰진 욕망을 투영할 수 있었고, 비용 부담과 난해한 설정에 고개를 저으면서도 위대한 결과물이 탄생한 덕분에 음반사와 매니지먼트는 자신들의 전속 소유물이던 아티스트들의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자신들 또한 의뢰자들 못지않게 '거물'로 등극한 힙노시스의 야심적 실험은 멈출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음악산업을 장악한 거대기업은 그냥 동네 해변이나 뒷산에 가서 사진을 촬영한 뒤 합성하면 될 것을 굳이 하와이나 사하라, 히말라야까지 가느냐며 황망해한다. 하지만 아직 컴퓨터 그래픽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 이들의 비전은 머릿속에 순간 떠오른 찰나의 이미지를 구현하는데 어떤 장벽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결의로 가득차 있었다. 그렇게 온갖 악재와 고초를 감수해 가면서 몸으로 때우고 시간과 비용을 감수한 덕분에 우리는 경이로운 예술적 결실을 목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작업이 그저 막대한 예산과 자원을 투입한 결과물로 그치는 건 아니다. 초창기부터 이들의 작업 아이디어와 제작방식은 특별한 것이 있었고, 비록 손익분기점은 맞춰야 하는 게 당연하지만 '예술적 비전'의 구현이 절대적인 가치로 항상 자리하고 있었다. 거대한 수익을 내기 시작한 음악산업의 전성기와 그 조건 아래에서만 가능했던 거대한 예술적 실험이 공존하던 시절이었다.
핑크 플로이드 대 힙노시스, 혹은 평행이론의 순간들
▲ "힙노시스"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 ㈜티캐스트
영화는 힙노시스가 작업한 대표작 관련 소개와 숨은 에피소드 및 작업과정들을 순차적으로 전개해 나간다. 단락을 구분해주려는 듯 애니메이션 효과를 활용해 해당 앨범 이미지가 등장했다 빠져나가곤 한다. 그렇게 호흡이 늘어지지 않도록 영화는 영민하게 지루할 틈 없는 속도감을 자랑하지만 그런 맺고 끊음을 초월하는 영역이 분명히 존재한다. 바로 힙노시스를 앨범 디자인으로 이끈 어릴 적 고향 친구들, 핑크 플로이드의 존재감이다. 핑크 플로이드의 초창기부터 거대한 성공과 예술적 성취, 그리고 갈등과 분열에 이르는 과정을 힙노시스는 단순한 지인이 아니라 내부자로서 조망한다. 이 대그룹의 흥망성쇠에 힙노시스 역시 일정한 지분을 갖는 셈이다. 레드 제플린이나 폴 매카트니 같은 동급의 거물 음악인들 비중도 상당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마치 핑크 플로이드의 기록영화 같은 착시가 들 정도다.
힙노시스와 핑크 플로이드의 인연은 그룹이 결성되기 전 단계로부터 출발한다. 이들은 동년배 세대로서의 경험은 물론이거니와, '아버지의 부재'라는 경험도 공유했고, LSD 같은 동시대 유행하던 약물조차 함께 겪었다. 힙노시스 특유의 작업 스타일, 머리를 강제로 열고 주입하듯 디자인을 만들어야 할 앨범을 반복해서 듣고 소화하려던 기질은 곧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적 변천사와 조응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이들은 시드 바렛이 마지막으로 참여한 초창기 사이키델릭 사운드의 2집 < A Saucerful of Secrets, 1968 >과 그룹의 대표작이자 1970년대 록 음악의 상징 중 하나가 된 8집 < The Dark Side of the Moon, 1973 >, 9집 < Wish You Were Here, 1975 >, 10집 < Animals, 1977 > 앨범 표지 작업을 맡았으니 그야말로 4(5)+2 멤버라 해도 모자라지 않을 개입력을 가졌던 셈이다. 그러하기에 시드 바렛의 비극적 운명과 동료 멤버들의 옛 리더에 대한 애증을 온전하게 공유할 수 있었다.
슈퍼 그룹이 된 후 음악성의 차이와 수익분배 문제 등 온갖 영욕을 겪어나간 핑크 플로이드의 후반부는 힙노시스의 쇠락과 고스란히 겹쳐진다. 핑크 플로이드로 상징되는 스튜디오 대작 앨범과 전세계 공연을 통한 거대한 음악산업의 전성시대가 힙노시스의 상업성과 예술성 양자를 공히 달성한 디자인 작업의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시드 바렛의 광기와 폭주 대신에 보다 전형적인 밴드 활동으로 접어들며 비슷한 유형의 대그룹들이 겪어야 했던 분쟁을 핑크 플로이드 역시 극명하게 겪었던 셈이지만, 예술적 고집에 감정적 요소가 화학적으로 결합되면서 그들의 다툼은 몇 차례 화해 시도에도 불구하고 해소되지 못했다. 힙노시스 역시 궤는 다르지만 유사한 상황을 겪게 된다.
핑크 플로이드의 후반기 양대 축이던 로저 워터스와 데이빗 길모어가 그룹 이름을 놓고 벌인 수십 년간의 다툼으로 원수지간이 된 것처럼, 앨범 디자인을 넘어 사업 다변화를 시도하다 닥친 경영난 이후 결별한 '스톤'과 '포' 역시 함께 한 15년에 맞먹는 긴 시간 동안 다시는 만나지 않았고, '스톤'이 세상을 떠나면서 온전한 화해란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로저 워터스와 데이빗 길모어가 아직 생존해 있기에 2005년 '라이브 8' 공연에서의 극적 재결합 같은 순간도 목격 가능한 것과 대조되는 결말이다.
근본적으로 이들의 좋았던 옛 시절이 종말을 맞이한 것은 거대한 성공을 경험한 예술가들이 부딪히는 위기의 전형적 예시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대중음악 지형의 변화와 직결되는 사례가 된다. 예술적으로는 지나치게 거대화하면서 전형적으로 고착된 슈퍼밴드 스타일에 대한 반감으로 펑크 록을 비롯한 새로운 흐름이 등장하고, 1980년대 들어 음악을 '듣는 것'에서 '보는 것'으로 전환시킨 효시로 기록될 MTV가 등장하고 예술적 완성도 대신 '뿅뿅'거리는 전자음악과 화려한 이미지가 득세한 문화지형이 가미된 결과다.
이들의 도전과 실험을 티격태격하면서도 떠받치던 음악산업 토대의 변화가 상부구조인 힙노시스의 흥망에 결정적 요소가 된 셈이다. 일련의 시행착오를 거친 후 힙노시스 구성원들은 따로 또 같이 새로운 시대의 음악인들과 제휴하긴 했지만 1960-70년대의 성취에는 도달할 수 없었다. 그 시대에만 가능했던 방식과 경험이기 때문이다. '스톤'과 '폴'의 결별을 불러온 입장의 차이도 그 쇠락하는 과정에서 모색한 방향의 상이함 때문이었다. 관계의 종말은 거대한 구조적 격변 일부에 지나지 않던 셈이다.
그들의 후속세대가 힙노시스에 바치는 경의
▲ "힙노시스"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 ㈜티캐스트
영화는 힙노시스의 작업과 그들의 작업으로 '화룡점정' 완성된 시대의 명반들에 얽힌 일화들을 재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관람할 수 있는 수준이다. 온전히 그 시대의 음악과 아티스트들을 체득하지 못한 경우라도 대중문화 역사를 공부하는 셈 치고 흥미롭게 감상 가능하다. 그만큼 알차고 정보량도 어마어마하다. 이 영화 자체가 하나의 '아카이브' 기능을 해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테다.
영화의 감독과 제작자 명단이 무척 흥미롭다. 안톤 코르빈 감독은 뮤직비디오와 사진 작업으로 출발해 극영화에 안착한 대표적 감독 중 한 명이다. 그의 경력은 바로 힙노시스의 쇠퇴 이후 등장한 록 음악의 사조들, 1980년대 뉴웨이브와 포스트펑크, 모던 록의 (이제는 선배들 못지 않은 거물이 된) 신예들과 함께 출발했다. 조이 디비전과 U2, 디페시 모드, R.E.M과의 여러 작업은 포스트 힙노시스의 대표주자라 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다. 그런 감독이지만 자신의 청소년기 음악에 심취하며 기억 속에 간직된 힙노시스의 작업이 롤 모델이 되었음을 숨기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이 다큐멘터리는 위대한 선배들에게 바치는 안톤 코르빈의 헌정이라 해도 무방할 테다.
3명의 제작자 명단 또한 예사롭지 않다. 우리에겐 미중년의 대명사일 배우 콜린 퍼스 역시 힙노시스가 작업한 음악인들의 열혈팬으로서 기꺼이 제작자로서 책임을 짊어졌다. 다른 2명의 제작자 중 한 명은 힙노시스의 라이센스와 저작권을 물려받은 팀의 총수 출신이고 나머지 한 명도 음악산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체험했던, 혹은 선망했던 위대한 시대와 영웅들을 기록하고 소개하는데 모두 기꺼이 함께했을 테다.
수천 개의 아카이브 자료를 안톤 코르빈이 솜씨 좋게 조립한 결과물은 그 시절 음악과 20세기 대중문화 조류를 숙지할수록 그 진가를 깨닫게 되는 흥미로운 보물창고다. 그리고 근래 K-POP 전성시대의 명과 암이 토론되는 현실에서 '나무'를 넘어 '숲'을 조망하게 만드는 비판적 교재로서도 유용한 성취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후대 음악인 중 균형추이자 해설 역을 자임한 게 성질 고약한 밴드 '오아시스' 출신 노엘 겔러거라는 점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는 과거와 현재의 음악산업과 구조를 신랄한 논평과 함께 자신의 성장담을 섞어 솜씨 좋게 풀어낸다. 그야말로 세대와 세대를 잇는 메신저 역할이다. 기본적으로 힙노시스에 대한 경의를 가득 피력하지만 왜 당신은 그들에게 앨범 커버를 의뢰하지 않았냐는 인터뷰어의 질문에 단답으로 내뱉는 내용이 의미심장하다. '너무 비싸거든요'. 많은 의미가 함축된 장면이다.
아마 누군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자신의 과거 한구석을 차지하는 추억의 음악앨범을 발견하는 기분일 테지만, 다른 누군가는 모 아이돌 그룹을 둘러싼 분쟁에 과거 상황을 대입하며 비교할 수 있겠다. 그만큼 힙노시스와 그들이 구현한 1970년대 대중음악 황금기의 기억은 현재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결정적 요소로 자리매김한다. 이런 주장에 잘 수긍이 가지 않는다면 21세기 한국 대중문화와 문화산업의 알파이자 오메가 자체라 할 BTS(방탄소년단)의 대표곡 중 하나인 'FIRE(불타오르네)' 뮤직비디오를 재생해보기 바란다. 힙노시스의 대표작 중에도 손꼽히는 핑크 플로이드의 <Wish You Were Here> LP 커버 디자인이 그 안에서 오마주되어 펄떡거리고 있으니 말이다.
<작품정보>
힙노시스: LP 커버의 전설
Squaring the Circle(The Story of Hipgnosis)
2024│영국│뮤직 다큐멘터리
2024.05.01. 개봉│101분│15세 관람가
감독 안톤 코르빈
제작 콜린 퍼스, 게드 도허티, 머크 머큐리어디스
출연 오브리 파월, 스톰 소거슨('힙노시스'), 폴 매카트니('비틀즈'),
데이비드 길모어 & 로저 워터스 & 닉 메이슨('핑크 플로이드'),
지미 페이지 & 로버트 플랜트('레드 제플린'), 피터 가브리엘,
노엘 갤러거('오아시스'), 그레이엄 굴드먼('10cc'),
글렌 매틀록('섹스 피스톨즈'), 그 외 다수
수입 / 배급 ㈜티캐스트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