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의 '두 국가론', 성급한 판단은 위험하다
[분석] '두 국가론'이 넘어야할 산... 일희일비 하기보다 냉정한 분석 선행돼야
▲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딸 주애와 함께 조선인민군 창건일인 지난 8일 건군절 오후에 국방성을 축하 방문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9일 보도했다. 2024.2.9 ⓒ 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적대적 두 국가관계' 발언이 논란이다. 작년 말부터 시작된 김 위원장의 해당 발언은 학계뿐만 아니라 정치권과 시민사회까지 뒤흔들고 있다. 아쉬운 점은 일부 전문가들이 한반도에서 두 국가체제를 돌이킬 수 없는 현실로 '성급하게' 규정하고 대안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김정은 위원장의 '적대적 두 국가' 주장이 기존에 북한이 보여준 담론 구성의 프로세스와 다르다는 점에서 성급한 판단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관련하여 이 글에서는 김정은의 두 국가론을 분석하고 그의 담론이 여전히 '미생(未生)'임을 주장하려 한다.
김정은 위원장은 2023년 12월 30일 개최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와 올해 1월 15일 최고인민회의에서 진행한 시정연설에서 남북관계와 통일정책에 대한 '새로운' 입장을 제시하고 '단호한' 정책 전환을 주장하였다. 김정은의 두 연설에서 공통적으로 나온 핵심 내용을 다소 길더라도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김 위원장은 역대 한국 정부가 추진한 대북정책과 통일정책이 북한에 대한 '정권붕괴'와 '흡수통일'을 추구했으며 정권교체와 상관없이 '자유민주주의체제 하의 통일' 기조에 변함이 없었다고 비난했다. "우리(북한)를 <주적>으로 선포하고 외세와 야합하여 <정권붕괴>와 <흡수통일>의 기회만을 노리는 족속들을 화해와 통일의 상대로 여기는 것은 더 이상 범하지 말아야 할 착오"라는 것이다. 사실 우리 언론은 이 부분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고 있다.
두 번째로, 김 위원장은 남북관계가 "더 이상 동족관계, 동질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관계, 전쟁 중에 있는 완전한 두 교전국 관계"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대한민국은 화해와 통일의 상대이며 동족이라는 현실 모순적인 기성 개념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철저한 타국으로, 가장 적대적인 국가로 규제한 이상 독립적인 사회주의국가로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권 행사 영역을 합법적으로 정확히 규정짓기 위한 법률적 대책"을 세울 것을 요구했다.
세 번째로, 김 위원장은 결론적으로 '적대적 두 국가관계'를 인정하고 '근본적인 투쟁원칙과 방향전환'을 모색할 것이라 강조했다. 관련하여 "조선 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에는 대한민국을 완전히 점령, 평정, 수복하고 공화국 영역에 편입시키는 문제를 반영"할 필요가 있으며, 이 밖에도 "헌법에 있는 '북반부,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이라는 표현들이 이제는 삭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당중앙위원회 통일전선부를 비롯한 대남사업 부문의 기구들을 정리"하고, "<동족, 동질관계로서의 북남조선>, <우리 민족끼리>, <평화통일> 등의 상징으로 비쳐질 수 있는 과거 시대의 잔여물들을 처리"할 대책을 요구하였다.
정리하자면, 김정은 위원장은 첫째, 한국 정부, 특히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강화되고 있는 대북·통일 정책을 북한 정권의 붕괴와 흡수통일 전략으로 인식하고 둘째, 남북을 더 이상 동족관계, 즉 같은 민족이 아닌 전쟁(교전) 중인 '적대적 두 국가관계'로 규정하였으며, 셋째, 이러한 규정에 따라 기존의 대남, 통일정책을 전환하는 조치를 추진하겠다고 주장한 것이다.
북한은 '적대적 두 국가관계'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나?
▲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10일 최고위급 군지휘관을 양성하는 김정일군정대학을 현지 지도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1일 보도했다. 2024.4.11 [국내에서만 사용가능. 재배포 금지. For Use Only in the Republic of Korea. No Redistribution] ⓒ 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김정은의 '적대적 두 국가관계' 주장을 접한 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북한 주민들은 그의 주장을 어떻게 생각할까?'였다. 김정은 위원장이 제시한 '적대적 두 국가관계'는 단순히 북한의 대남, 통일정책을 수정하는 수준을 넘어 북한이 주장하는 '사회주의 혁명'을 재정의하는 수준의 문제라 할 수 있다. 북한이 주장하는 혁명의 중요한 부분이 소위 '미제국주의'에 의해 '착취' 당하고 있는 '남조선'을 '해방' 시킨다는 민족해방론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연 북한은, 북한의 이데올로그들은, 무엇보다도 북한 주민들은 이러한 변화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필자는 북한 사회가 '최소한' 현재의 시점에서 김정은의 '적대적 두 국가관계'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필자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위에서 언급한 김정은의 두 차례 연설 이후 북한의 방송이나, 신문, 문헌에서 '적대적 두 국가관계'에 대한 제대로 된 해설 자료를 찾아보기 힘들다. 일부 후속 조치를 보도하는 과정에서 김정은의 발언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북한에서 지도자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하지만 아무리 '왕(王)'이라 해도 뭐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는 없다. 북한도 마찬가지다. 김일성이 북한이라는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뇌수'로 우상화되던 때조차도 통치이데올로기와 그 하위 담론들은 체계적인 이론화 과정을 거쳐 대중에게 전달됐다. 어떤 사회건 최소한의 사회 동의구조가 존재하며 북한 또한 강력한 사회통제체제 속에 체계화된 동의구조를 운용해 왔다.
하지만 김정은 위원장의 '적대적 두 국가' 주장은 이전의 프로세스와 다른 이례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과거 북한이 담론화했던 '우리민족제일주의'나 '우리 민족끼리', '김일성애국주의', '우리국가제일주의', 그리고 최근에 강조되고 있는 '인민대중제일주의'가 북한의 전문가, 소위 이데올로그들에 의해 체계화되고 선전되며, 선동의 구호로 진화하는 과정과는 사뭇 다르다.
김정은은 '선대 수령의 유훈'을 부정할 수 있나?
김정은의 '적대적 두 국가관계'가 넘어야 할 산은 또 있다. 더 높은 산이 기다리고 있다. 바로 '선대 수령들의 유훈'을 넘어서야 한다. 김정은 위원장은 여전히 '선대 수령들의 유훈'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사실 김정은은 선대 수령들을 넘어서기 위해 유훈을 앞세우면서도 자신만의 정치를 추구해 왔다. 하지만 남북관계와 통일전략을 전면 수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김일성은 김정은이 삭제해야 한다고 지적한 통일의 원칙(자주·평화·민족대단결)이 담긴 7.4 남북공동성명과 남북기본합의서를 탄생시켰으며, 김정일은 6.15 남북공동선언과 10.4 남북정상선언에 스스로 사인했다. 남북의 화해와 협력, 평화적 통일에 대한 남북의 합의를 부정하는 것은 선대 수령들의 성과, 즉 '유훈'을 부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선대 수령들의 유훈'을 단지 남한의 대북, 통일정책을 이유로 부정하는 것은 북한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문제를 김정은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필자는 얼마 전 일본에서 만난 연구자로부터 조총련계 연구자들이 김정은 위원장의 '적대적 두 국가관계' 연설로 혼란스러워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북한의 지배층에서도 이와 관련한 혼란이 존재할 가능성 또한 적지 않다. 어쩌면 김정은은 북한의 통치엘리트들을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성급한 판단으로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말아야
남북관계가 단절된 지 5년이 지났다. 그 사이 북한은 중국, 러시아와 새로운 생존전략을 모색하고 있다. 강고했던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동맹은 중국과 러시아의 이탈로 그 기능을 상실해 가고 있다. 북핵 문제 해결도 난망하다. 엄중한 한반도 주변 정세 속에 우리는 남북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새로운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김정은 위원장은 분명 '적대적 두 국가관계'로 남북관계를 새롭게 규정하고 통일전략을 전면적으로 전환하려는 의지를 내보였다. 관련하여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를 해체하고 북남경제협력법과 금강산관광특구법을 폐지하는 등 몇몇 가시적인 조치를 취한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주장한 '적대적 두 국가관계'가 완성된 것은 아니다. 북한 사회에서 이 문제가 정치적 리스크로 작용할 수 있는 만큼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받아들이기엔 아직 이르다. 이 담론은 여전히 '미생(未生)'이다. 섣부른 판단으로 실기해선 안 된다.
필자는 김정은 위원장의 '적대적 두 국가관계'를 설명하면서 그 주어로 '북한'이란 단어를 쓰지 않았다. 북한은 더 이상 지도자의 이름만으로 단일하게 호명될 수 없다. 반대로 '북한'이란 단어로 북한 사회 전체를 일반화해서도 안 된다. 냉정한 판단으로 무겁게 행동해야 할 때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정일영씨는 서강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연구교수입니다. 관심분야는 북한 사회통제체제, 남북관계 제도화, 한반도 평화체제 등으로, <북한 사회통제체제의 기원>, <한반도 오디세이>, <한반도 스케치北> 등 집필에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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