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가 패배자다
[오길영의 뾰족한 시각] 전쟁의 이면... 상을 받은 작가가 밝힌 두려움
▲ 2010년 5월 31일 프랑스 파리의 제니스에서 열린 크랜베리스 콘서트 ⓒ 위키미디어 공용
1990년대에 주로 활동했던 아일랜드 출신 밴드 '크랜베리스'의 노래를 지금도 종종 듣는다. 내 전공이 아일랜드 문학이기에 친밀감을 느꼈다. 이 밴드의 곡 중에 '전쟁의 아이'가 있다.
전쟁을 감행하는 권력자들이나 정치인들은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운다. 하지만 전쟁의 뿌리를 살펴보면 이 노래의 가사가 요약하듯 "정치적 야심"과 "영토를 탐하는 탐욕"뿐이다. 야심과 탐욕은 추하지만 그런 욕망이 전쟁의 동력이다. 진행 중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도 마찬가지다.
계간 <문학인> 2024년 봄호 특집은 '탈식민주의의의 역사와 문학'이다. 특집을 읽으면서 잘 모르던 팔레스타인의 현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오랜 갈등과 억압의 역사, 그에 대응하는 문학 예술인의 활동을 알게 되었다. 특히 팔레스타인 분쟁의 역사를 조명한 글(정의길), 팔레스타인 출신의 탈식민주의 이론가이자 활동가였던 에드워드 사이드를 다룬 글(이경원), 그리고 팔레스타인 출신 작가로 소설 <사소한 일>이 국내에도 소개된 아다니아 쉬블리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국제정세도 아는 만큼 보게 되는 법이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조차 모르는 이들이 적지 않은 한국 사회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의 뿌리를 돌아보는 건 필요하다. 이경원에 따르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증오와 보복의 악순환을 거듭해 온 원인은 땅은 하나인데 주인이 둘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진행되는 가자지구는 구약성서에서 언급되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의 일부이다. 양측 다 영토권을 주장할 명분이 있다.
종족(ethnicity)의 측면에서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뿌리가 같다. 구약성서에 따르면, 가나안에 정착한 아브라함에게는 첩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과 아내 사라가 낳은 이삭이 있었다. 다툼이 일어나자 아브라함은 이스마엘과 하갈을 광야로 내쫓았다. 이스마엘과 이삭은 각각 아랍인과 유대인의 조상이 되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공통 조상 격인 아브라함의 후예다. 양측은 이복형제의 싸움을 하고 있다. 무지가 낳은 결과다.
전쟁, 혹은 압도적 힘의 차이에 따른 학살이 벌어지고 있는 팔레스타인의 현실은 무엇인가? <문학인> 특집에 기대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의 독립 국가 설립을 보장한다는 영국의 모순적인 1917년 밸푸어 선언 당시에 팔레스타인 거주민은 약 70만 명이었다. 유대인 숫자는 6만 명도 안 됐다.
1922년에 실시한 인구조사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인구의 78%는 이슬람교도였다. 기독교인과 유대인은 9.6%와 11%에 불과했다. 자연증가율이 연 1.5%였던 팔레스타인에서 1922년부터 1946년까지의 기간 동안 유대인 인구증가율이 연평균 9%에 달했다. 시온주의자들이 팔레스타인 영토를 점유하려고 유대인 유입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한 결과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당시 이스라엘이 합법적으로 소유한 영토는 팔레스타인 전체 영토의 6%였다. 유대인 인구 비율도 수적으로 소수집단에 속했다. 현재의 정치공학적 설명만으로 팔레스타인 문제를 봐서는 안 되는 이유다.
전쟁은 두려움을 낳는다
▲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들이 1일(현지시간) 뉴욕 컬럼비아대 캠퍼스 밖에서 경찰에 체포된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날 경찰은 컬럼비아대 캠퍼스에서 친팔레스타인 시위를 벌이던 이 학교 학생 수백명을 체포했다. ⓒ 연합뉴스
한국에서는 대체로 무심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에 대해 이스라엘의 최대 지원국인 미국이나 시오니즘의 오랜 역사가 있는 유럽에서는 심상치 않은 반응이 나오고 있다. 정치공학적 분석보다는 나는 이런 반응이 보여주는 징후에 주목한다.
미국의 주요 대학 캠퍼스에서 친팔레스타인 반전 시위가 확산하는 중에 대학의 편향적 태도와 경찰의 강경 진압이 속출한다는 보도가 나온다. 여전히 유대주의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 사회에서 친팔레스타인 집회는 이스라엘과 유대인의 생존권을 부인하는 반유대주의라는 반발을 일으킨다.
유대주의는 건드려서는 안 되는 성역처럼 되었다. 그 결과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미국 사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인권 억압적인 일이 일어난다. 팔레스타인 연대 집회를 열었던 학생들을 블랙리스트에 올려 취업을 금지하겠다는 어이없는 발상이 아무렇지도 않게 나온다.
대학도 예외는 아니다. 의회 청문회에서 이스라엘과 유대인의 생존권을 강하게 옹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펜실베이니아대학과 하버드대학 총장은 사임해야 했다. 역시 어이없는 일이다. 에모리 대학에서는 시위 참가 학생 체포에 항의하던 캐럴라인 폴린 경제학과 교수가 경찰에 의해 폭압적으로 연행되었다. 이런 억압적 조치에 맞서 수많은 대학에서 천막을 치고 농성하는 항의운동이 벌어진다. 미국 내에서 체포된 학생이 2000명을 넘었다.
비유대인들만 나서는 게 아니다. 미국 유대인 사회 내에서도 적극적인 반이스라엘 및 반시오니즘 행동주의가 나타난다.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유대인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대담하게 비판하라"는 게 항의의 요지다. 미국 민주주의가 시험대에 올랐다.
미국 언론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뉴욕타임스>에서는 분쟁을 다룰 때 특정 용어를 쓰지 않도록 하는 내부 보도 지침을 만들었다고 한다. 미국의 비영리 탐사보도 전문매체 <더 인터셉트>에 따르면 <뉴욕타임스>가 가자 지구 전쟁을 보도할 때 대량 학살, 인종 청소 등, 그리고 아예 팔레스타인이라는 단어를 쓰지 말라고 기자들에게 지시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 축소해서 표현하라는 식이다.
문학예술계도 예외는 아니다. <문학인> 특집에 기고한 팔레스타인 작가 아다니아 쉬블리는 이렇게 밝힌다.
"그러던 중 갑자기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시상식에서 제 최근 소설 <사소한 일>이 리트프롬 상을 받았다는 것에 대해 당혹감을 드러내는 <타즈> 기사를 접했습니다. 그 기사는 진짜 고통, 즉 우리가 직접 경험하거나 애초에 접근할 수 없는 타인의 고통으로부터 주의를 돌리려는 것처럼 냉소적으로 느껴졌어요."
작가는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하나는 세상과 관련된 두려움이고 다른 하나는 글쓰기에 관련된 두려움입니다. 저는 우리가 주위를 둘러보며 어제보다 오늘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있는 시점에 이르지 못할까 봐 두렵습니다. 두 번째 두려움은 언어를 잃어버리는 것인데, 언젠가 깨어났을 때 언어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입니다."
전쟁은 두려움을 낳는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쟁의 폐해가 아니다.
전쟁은 끝내야 한다
▲ 6일(현지시간) 가자지구 남부 라파에서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이날 이스라엘군은 라파 검문소의 팔레스타인쪽 구역을 장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 연합뉴스
나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혹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전쟁의 승패가 어찌 될지, 전쟁이 향후 국제정제 혹은 한반도 정세에 미칠 영향이 어떤지는 언급할 생각도, 능력도 없다. 다만, 그 전쟁에서 희생되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말하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폴란드 시인 쉼보르스카의 시 '증오'가 떠오른다.
보라, 시대에 증오가/ 어떻게 효율적으로/ 스스로를 가꾸고 관리하는지,/ 높은 장애물을 얼마나 사뿐히 뛰어넘는지,/ 도약하며, 덮치는 것이 그에게는 얼마나 수월한지./(중략) 민족 때문이건, 그 밖의 다른 이유 탓이건 그럴듯한 핑계를 대면서, 뛰쳐나가기 위해 일어섰을 때 정의의 손을 뿌리치고 결국 앞서 나가는 것은 증오 혼자뿐./ 증오, 증오./사랑의 황홀경으로 그 얼굴은,/ 일그러지고 만다./ (중략)/ 오직 스스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증오만이/ 사람들을 동원할 수 있다./ 영리하며, 재기가 넘치는 데다가 부지런하기까지 하구나./ 증오가 얼마나 많은 노래를 만들었는지 꼭 헤아려 보아야 할까?/ 두꺼운 역사책 속에서 얼마나 많은 장이 할애되었는지, 셈을 해 보자./ (중략) 증오는 대비의 명수,/ 소란과 정적./ 새하얀 눈 위에 붉게 물든 발자국./ 구겨진 희생자 위에 단정한 살인자의 무표정한 안면은,/ 증오가 결코 싫증 내지 않는 중요한 모티브이다./ 증오는 새로운 임무에 적응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 필요하다면 끝까지 끈질기게 기다린다./ 사람들은 증오가 눈이 멀었다고 수군대지만,/ 증오가 장님이라고? 천만의 말씀./ 저격수의 날카로운 눈으로/ 용감하게 미래를 응시하는 건/ 오로지/ 증오뿐이다.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집, 최성은 옮김, <끝과 시작>
증오는 힘이 세다. 증오가 없으면 전쟁은 불가능하다. 전쟁의 동력이 "정치적 야심"과 "영토를 탐하는 탐욕"이라면 그것의 연료는 증오다. 증오는 선의 편인 '우리'와 악의 편인 '저들'을 구분하는 "대비의 명수"이고 "증오만이 사람들을 동원할 수 있다." 증오의 친구는 전쟁이다. 시가 표현하듯이, "박애"와 "연민"과 "의심"은 힘이 약하다.
시인은 묻는다. 힘센 증오, 전쟁을 잉태하는 증오를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 어떤 고상한 명분을 앞세운들 모든 전쟁은 애꿎은 사람들, 어린이들을 희생시킨다. 2024년 4월 현재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의 팔레스타인 민간인 사망자가 3만 명 이상, 부상자가 7만 명 이상이다. 가자지구 군사작전 과정에서 이스라엘 군인 200명 이상이 사망했고 1400명 이상이 다쳤다고 한다.
크랜베리스의 노래는 이렇게 끝난다. 전쟁에서는 "우리 모두가 패배자"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다. 짐짓 초연한 척 냉철함을 가장한 정치공학적 계산이나 할 때가 아니다. 전쟁은 끝내야 한다. 그 뒤에 말과 글로 시시비비를 가려도 된다. 더는 어리석은 권력의 탐욕 때문에 애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게 놔둘 수는 없다. 언제나 최악의 평화가 최선의 전쟁보다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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