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가 9일 저녁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김대중 전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9주년 기념 특별 강연회에서 '국민의 정부'의 업적과 역사적 성격에 대해 특강하고 있다. ⓒ 남소연
강만길은 저명인사들과 대담도 여러 차례 나누었다.
대표적인 대담을 꼽으라면 1993년에 조광 교수와 '분단극복을 위한 실천적 역사학'이라는 주제로 나누었던 대담과, 1994년에 정치인 김대중과 나눈 대담 '우리 민족을 말한다'를 들 수 있다.
김대중과의 대담은 4시간 동안 이어졌다. 그때는 김대중이 1992년 제14대 대통령선거에서 패한 뒤 정계를 은퇴하고 영국으로 떠나 5개월간 케임브리지대학 객원교수를 지내고 귀국해,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하여 본격적인 통일운동을 시작할 무렵이었다.
두 사람의 대담은 김대중이 저서 <나의 길 나의 사상>(1994)을 준비하면서 마련한 자리였다. 이 책의 머리말에서 김대중은 "이 책을 만들기 위해서 특별히 강만길 교수와의 대담을 마련하여 권두에 실었다"라고 밝히며 강만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가 9일 저녁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김대중 전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9주년 기념 특별 강연회에서 '국민의 정부'의 업적과 역사적 성격에 대해 특강하고 있다. ⓒ 남소연
두 사람의 긴 대담 중 김대중의 생각을 알 수 있는 몇 대목을 옮겨 본다.
강만길 : 선생님, 제가 말머리를 열겠습니다. 1970년대 말인지 1980년대 초인지에 어느 외국인 기자가 선생님에 대해 쓴 글이 기억납니다. 그는 국회의원일 땐 정략가였고, 대통령 후보가 되면서 정치가가 되었고, 납치당하고 또 여러 가지 핍박을 받으면서는 사상가가 되었다는 글이었습니다. 1992년 대선을 치르신 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더 높은 차원에서 민족 문제를 생각하고 계시는 지금의 상황이야말로 그 기자의 말처럼 사상가로 나아가시는 시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당사자로서는 왜 낙선했다고 생각하는지, 그리고 지금의 시점에서 선생님이 생각하고 계신 여러 가지 계획과 앞으로 어떤 일에 힘을 기울이실 예정인지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김대중 : 저는 일생을 통해 대통령이 되어 보려는 욕망을 가지기도 했지만 대통령이 되면 이런 일은 이렇게 해 보고 저런 일은 저렇게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40년 동안 나름대로 노력해 왔습니다. 저의 국회 발언이나 연설을 검토해 보면 발견하실 수 있겠지만 그동안 대안이 없는 비판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
강만길 : 저는 둘로 나뉜 하나의 민족이 재결합하는 일은 역사적 혁명에 비길 만한 일이라 생각하고 현 시점에서 그 지도적인 역할을 담당할 인물은 정치가인 동시에 사상가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우리 주변 민족들의 경우도 단순히 정치가적 자질만으로는 그러한 큰일을 이루지 못했고 결국 정치가로서의 높은 자질과 사상가로서의 자기 철학을 가진 인물이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선생님은 정치활동을 오래 하시는 동안 늘 대중 앞에 계셨고 또 세 번씩이나 좌절도 맛보셨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우리 역사와 국민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김대중 : 우리 민족은 기마민족과 농경민족의 복합민족으로서 진보성과 보수성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대체로 기마민족은 진취적이고 농경민족은 보수적인데, 2천~3천 년이 흘러오는 동안 기마민족적인 진취성은 농경민족의 보수성에 동화되어 우리 민족은 보수성이 두드러지게 강해졌습니다. 보수성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이러한 보수성은 언제든지 있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자기의 본질을 지킬 수 있었고 언제든 장점을 발휘해 왔습니다.
우리 역사를 보면 조금이라도 개혁적인 일을 하려던 사람들이 온전히 목숨을 부지한 예가 없습니다. (…) 우리 민족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어서 자기를 지키는 데는 뛰어난 동시에 개혁을 매우 싫어합니다.
강만길 : 큰 눈으로 보면 역사의 발전이란 정치적 민주주의, 경제적 민주주의, 사회·문화적 민주주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그것이 잘 안 되었기 때문에 사회주의 이론과 체제가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사회주의도 특히 정치적 민주주의를 크게 제한했고, 그 때문에 경제·사회·문화적 민주주의도 제약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사회주의의 견제와 도전이 없는 자본주의가 자발적으로 정치·경제·사회적 민주주의를 잘해 나갈 수 있겠는가를 실험하는 시대가 바로 21세기가 아닌가 합니다.
21세기를 담당할 사람들은 바로 지금의 젊은 사람들입니다. 선생님이나 저나 통일을 갈망하고 있습니다마는 사실은 통일 문제를 담당할 사람들은 역시 21세기를 살아갈 젊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통일된 후의 그 뒤처리도 역시 그들이 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분단의 책임이 없는 그들에게 결국 민족 문제를 마무리 짓는 책임을 떠맡긴 셈입니다. 저도 포함됩니다마는 식민지시대·분단시대를 살아온 기성세대로서 그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을 해 주십시오.
김대중 : 우리가 신바람 나는 민주주의를 펼쳐 나가면서 젊은이들의 신명을 북돋워 주어야 합니다. 각자의 개성을 최대한도로 살려야 합니다. 옛날 우리 시대는 소품종 대량생산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양산체제에 버금갈 수 있는 평균화된, 약간 몰개성적인 노동자나 사무원의 대량생산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다양화 시대이고 다품종소량생산의 시대이고 개성 있는 제품의 생산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젊은이들도 이에 알맞은 인재가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신세대의 출현은 이러한 생산체제와 문화의 다양화에 따른 필연적인 현상일지도 모릅니다. (주석 1)
주석
1> 강만길, <우리 민족을 말한다>, <내 인생의 역사공부 / 되돌아보는 역사인식>, 창비, 2018, 143~222쪽, 발췌.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실천적 역사학자 강만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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