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 졸지 않으려면" 배우가 관객에게 한 당부
[안지훈의 뮤지컬 읽기] 팬데믹 이후 다시 돌아온 이머시브 뮤지컬 <그레이트 코멧>
▲ 뮤지컬 <그레이트 코멧> 공연사진 ⓒ (주)쇼노트
2021년 뮤지컬 <그레이트 코멧>이 한국에서 처음 공연되었을 당시, '하필 지금?'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의 일부분을 똑 떼어 만든 뮤지컬 <그레이트 코멧>은 무대와 객석의 구분을 허물어 관객의 몰입감을 높이는, 이른바 이머시브(immersive) 뮤지컬이다.
이전에 미국에서 공연되었을 때부터 객석 사이사이를 배우들이 뛰어다니며 극장 전체를 무대로 사용하다시피 하고, 배우가 관객에게 말을 걸거나 스킨십을 하는 등 직접 대면하는 장면이 많기로 유명했다. 그런데 하필 한국에 처음 소개된 시기가 팬데믹, 즉 관객과 함께 하는 퍼포먼스가 제한적인 상황이었던 것이다.
방황하는 부유한 귀족 '피에르' 역에 초연 때 같은 역할을 맡은 케이윌을 비롯해 하도권과 김주택이 캐스팅되었고, 순수한 여주인공 '나타샤'에는 이지수와 우주소녀의 유연정, 박수빈이 분한다. 매력적인 젊은 군인 '아나톨'에는 초연에 이어 고은성이 다시 돌아왔고, 정택운(VIXX)과 셔누(몬스타엑스)가 함께 캐스팅되었다. 여기에 효은, 김수연, 전수미, 류수화, 주아 등 실력파 배우들이 출연진에 이름을 올렸으며, 음악감독 김문정이 무대 한복판에서 직접 지휘와 피아노 연주를 펼친다. <그레이트 코멧>은 6월 16일까지 광진구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공연된다.
시작부터 사로잡는다
이 공연은 유독 다른 공연들에 비해 극장 직원의 시작 전 객석 입장 요청이 많다고 느꼈다. 공연 시작 10분 전에는 직원들이 극장 로비 곳곳을 돌아다니며 관객에게 빨리 입장할 것을 요청했다. 왜 그런가 했는데, 객석에 입장하고 나니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좌석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배우들이 무대와 객석으로 걸어나왔다. 무대에서 객석의 관객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객석 사이를 걸어다니며 관객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관객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다니는 배우가 있는가 하면, 아예 비어있는 객석에 앉아 관객과 대화를 나누는 배우도 있었다.
그렇게 배우와 관객이 함께 놀다가, 곳곳에서 연주가 시작된다. 여기서 <그레이트 코멧>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는데, 배우가 연주를 겸하거나 연주자가 연기를 겸한다는 것이다. 연주하고 박수받기를 반복하다 '발라가' 역을 맡은 배우의 주도 하에 안내 멘트가 노래로 울려퍼진다. 이어 '피에르'의 구호에 맞춰 첫 번째 넘버 'Prologue'가 시작된다.
여기서 또 하나의 특징을 발견했다. 공연 전과 시작을 나누는 명확한 경계가 없다는 것이다. 극장 전체가 일시에 암전되거나, 지휘자가 인사를 하는 등 여타 공연들에서 공연의 시작을 알리기 위해 사용하는 의례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보는 이에 따라 공연의 시작점을 어디로 보는지 달라질 수 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건, 관객이 공연이 시작한 지도 모르고 즐기다 자연스레 공연에 빠져들 수 있다는 점이다.
▲ 뮤지컬 <그레이트 코멧> 공연사진 ⓒ (주)쇼노트
제4의 벽을 과감히 무너뜨린다
넘버 'Prologue'가 시작되고 배우들은 관객에게 프로그램북은 좀 봤냐고 묻는다. 그러곤 다음과 같이 웃으면서 경고하고, 또 당부한다.
"등장인물 이름 정돈 외워둬 / 이따 졸지 않으려면
원작은 악명 높은 러시아 소설 / 이름 외우다 집에 갈 걸
자, 함께 예습해주시면 / 매우 감사하겠습니다"
넘버의 시작부터 유쾌하다. 원작은 톨스토이의 장편 <전쟁과 평화>인데, 러시아 소설의 특성상 등장인물이 정말 많다. 그런데 <전쟁과 평화>의 내용을 다 가져온 게 아니라 극히 일부만(책으로 약 70페이지 정도다) 뮤지컬의 스토리로 사용했다. 스토리는 딱히 없고 짧은데, 등장인물은 많은 형국이다. 그러니 'Prologue'의 경고는 새겨들을 만하다. 이어 배우들이 친절하게 등장인물을 설명해준다. "나타샤는 어려", "아나톨은 핫해", 이런 식으로.
1200페이지에 달하는 소설에서 70페이지 정도의 이야기만 똑 떼어 사용했고, 이따 졸 수도 있다는 내용의 가사를 쓴 걸 보면, <그레이트 코멧>은 서사에 대한 관객의 몰입엔 애초부터 큰 기대를 걸지 않았던 것 같다. 대신 다른 몰입에 기대를 건다. 배우가 객석을 뛰어다니고, 관객을 무대 위에 세우며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이 즐기고 있는 순간 자체에 몰입하도록 한다.
'무대 중앙'이라는 개념도 <그레이트 코멧>에선 그다지 유효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물리적인 무대 한가운데에서 배우의 연기와 주된 이야기의 전개가 이루어지는데, <그레이트 코멧>은 무대 구조도 독특할 뿐더러 이야기도 딱히 임팩트가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관객은 자신의 좌석에 따라,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응시해야 할 곳이 달라진다. 저쪽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더라도 바로 자신 앞에서 누군가 하이파이브를 요청한다면, 그 관객은 하이파이브에 응하며 자기 앞에 놓인 배우를 응시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때 그 관객에게 있어 무대 중앙은 자신이 응시하고 있는 바로 그곳, 눈앞이 무대 중앙이다.
<그레이트 코멧>을 통해 공연이 현장성의 예술임을 다시 한 번 체감했다. 관객과 배우가 같은 감정과 열정을 일시에 공유하는 경험이 주는 짜릿함을 느꼈다. 연극과 뮤지컬 같이 배우가 등장하는 공연에는 오래된 불문율이 있다. 18세기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극작가였던 드니 디드로(Denis Diderot)가 고안한 '제4의 벽'이라는 개념이다. 제4의 벽은 관객과 배우 사이에 존재하는 가상의 벽으로, 이 벽에 따라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배우와 관객은 서로의 영역에 간섭해선 안 된다. 이 오래된 불문율을 <그레이트 코멧>은 과감히 깬다. 그렇게 공연은 오늘도 변화를 시도한다.
▲ 뮤지컬 <그레이트 코멧> 공연사진 ⓒ (주)쇼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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