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광장에 학살자 동상을 세우겠다고?
[수산봉수 제주살이] 광장의 주인은 이승만·박정희가 아니다
육지 사람들에게 제주는 버려진 땅이었고 죄수를 보내는 유배지였다. 지금은 이익을 노려 자본이 몰려들지만 진정으로 제주를 위하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나 또한 제주 사람 눈에는 그렇게 비칠 수 있으리라. 그런 제주인의 한과 정서를 이해하려다 제주학에 빠졌고 도민이 됐다. 키아오라리조트를 운영하면서 제주가 인문학을 결합한 미디어 교육의 중심이 되게 하겠다는 각오로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한미리스쿨)을 설립했다. 제주는 오름의 섬인데 키아오라 바로 뒷산이 대수산봉이고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었기에 '수산봉수'라는 팻말을 발견하고 반가웠다. '수산봉수 제주살이'는 제주학을 배경으로 제주인과 나의 일상에 사회적 발언을 실어 보내는 글이다.[기자말]
▲ 프랑코 만쿠조 등이 쓰고 <광장>이란 제목으로 번역·출간된 책 표지 일부. 체코 프라하 구시가 광장이다. ⓒ 이봉수
그리스 도시국가의 아고라(agora)는 '사다'(agorazo) 또는 '만나다'(ageirein)라는 동사와 어원이 같은데, 광장의 본래 의미를 잘 드러낸다. 물건을 사러 가거나 사람을 만나서 때로는 "물가가 왜 이리 올랐지" 같은 얘기를 하며 여론을 형성했다.
그에 반해 아테네의 언덕 위 아크로폴리스는 신전과 관공서가 들어선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였다. 서울대도 관악산 기슭으로 이전한 뒤 도서관 앞 언덕 광장을 아크로폴리스라 부르며 시국집회 장소가 됐다. 나는 서울대 아크로폴리스는 엘리트의식이 깃든 잘못된 작명이라고 생각한다. 지배계층의 의식에 물들지 말고 진정한 생활정치의 공간인 아고라의 정신을 배웠더라면 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그리스의 민회도 아고라에서 열렸다.
유럽연합의 광장 연구 프로젝트 <유럽의 광장, 유럽을 위한 광장>을 주도한 건축가 프랑코 만쿠조는 공저서에서 '광장은 군중을 응집하는 용광로의 기능을 해왔다'며 '좋은 광장은 충돌과 화해가 교차하는 곳'이라고 썼다.
시위문화의 발달과 권력의 광장공포증
한국의 광장은 어떤가? 우리는 사실 광장의 역사가 짧다. 1972년 처음 만들어 지금은 여의도공원으로 바뀐 5.16광장은 도시계획법상 광로(廣路)였다. 시위문화도 거리 시위에 익숙해 3.1만세운동도 4.19혁명도 모두 거리에서 이루어졌다.
6월민주항쟁도 정적 공간이 아니라 이동 공간인 거리에서 했기에 역동성을 살릴 수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당시 기자로서 지금 경찰청에 해당하는 치안본부에 나가 전국 상황을 체크하고 있었는데, 여러 시위대가 거리를 뛰어다니며 게릴라처럼 기습시위를 벌이자 경찰도 진압을 포기하는 분위기로 넘어갔다. 거리의 상점에서는 시위대를 숨겨주고 물을 떠 주는가 하면 '넥타이부대'가 사무실에서 나와 시위에 참여하기도 쉬웠다. 여의도 같은 데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더라면 여의도 다리를 차단해서 6월항쟁이 실패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광화문광장과 서울광장이 조성된 뒤에는 2002년 미군장갑차 여중생 압사 규탄 시위와 보수단체 친미 시위, 2004년 노무현 탄핵 거부 시위, 2008년 촛불 시위, 2016년 박근혜 탄핵 찬반 시위 등으로 광장은 충돌과 화해가 교차했다. 이런 광장의 역사를 두려워 한 수구정권은 광장을 차벽으로 둘러싸는 등 광장공포증(agoraphobia)을 드러냈다.
이승만기념관과 박정희동상의 반역사성
최근 이승만기념관을 열린송현광장에, 박정희동상을 동대구역광장에 세우려는 것은 전혀 새로운 국면 전개다. 붉은광장이나 천안문광장과 같은 이념의 광장을 핵심 공공장소에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경복궁 동쪽 노른자위 땅인 송현광장에 관해 오세훈 서울시장은 "(이승만기념관) 건립 장소로 가능성이 제일 높게 논의되는 곳"이라고 말했다. 이곳에는 이건희 미술관도 들어설 예정이어서 이승만기념관까지 건립되면 도심 녹지공간으로서 쓸모는 사라지고 독재권력과 경제권력의 두 상징 건물이 들어서는 셈이다. 4.19혁명 때 경무대로 향하던 청년학생들이 경찰의 일제사격으로 대거 숨진 곳이 경복궁 주변 길들인데 영령이 있다면 무어라 생각할까?
▲ 서울 종로구 열린송현광장은 녹지로 조성돼 있으나 이승만기념관 터로 검토되고 있다. ⓒ 권우성
국민 학살자의 기념관을 세우려는 세력
이승만은 공에 견주어 과가 압도적으로 많은데 다른 실정은 접어두고 너무 많은 국민을 죽였다는 사실만으로도 국부는커녕 대통령기념관을 세우거나 동상을 세워서는 안 될 사람이다. 제주4.3항쟁, 보도연맹사건, 한국전쟁 중 형무소 학살, 서울 수복 후 부역자 학살, 4.19혁명 학살 등으로 줄잡아 100만의 민간인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전쟁도 해방 직후 정치 지도자들이 권력욕을 좀 내려놓고 남북분단을 피했더라면 막을 수 있는 내전이었다. 이승만은 진보당수 조봉암, 친일경찰 청산을 외친 최능진 등 정적도 법이라는 이름을 빌려 사법살인을 자행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자신도 좋게 나오는 영화 <건국전쟁>을 본 뒤 이승만을 "대한민국이 여기까지 오게 된 중요한 결정을 적시에 제대로 하신 분"이라고 평가함으로써 스스로 무지와 무사유를 드러냈다.
사법살인 유가족이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홍준표 대구시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산업화 정신을 기리는 기념사업을 산업화의 상징도시 대구가 당당하게 추진하겠다"며 "동대구역광장에 박정희광장, 대구 대표도서관 앞에 박정희공원을 조성해 2개의 동상을 세우겠다"고 발표했고 추경 예산안이 시의회를 통과했다.
박정희 역시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점에서 이승만 다음 가는 인물이다. 대표적인 살인은 인혁당 사건 관련자 8명을 처형한 것이다. '8명 사법살인' 등 숫자로만 남은 기억을 되살리려고 <한라산>의 시인 이산하는 2021년 10월 6일 김정희가 국악곡을 붙여 연주된 <46년 만의 초혼(招魂), 여덟 송이 동백꽃> '서시'에서 한 생명이 꺼져 가는 순간을 하나하나 기록했다.
지금으로부터 46년 전인 1975년 4월 9일
서울 독립문 서대문구치소의 새벽
교도관이 사형수의 머리에 검은 복면을 씌우고
목에 올가미 밧줄을 감았다.
교도소장이 고개를 까딱하자 다른 교도관이 레버를 내렸다.
사형수가 딛고 있는 발판이 아래로 푹 꺼졌다.
밧줄이 팽팽하게 늘어지며 파르르 떨었다.
군의관이 사망을 확인하자마자 시체를 치웠다.
고개 한 번 까딱하자 사람이 시체로 바뀌었다.
4시 55분 서도원 사형 집행
5시 30분 김용원 사형 집행
6시 5분 이수병 사형 집행
6시 35분 우홍선 사형 집행
7시 5분 송상진 사형 집행
7시 35분 여정남 사형 집행
8시 5분 하재완 사형 집행
8시 30분 도예종 사형 집행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한 새벽에
30분마다 동백꽃이 하나씩 뚝, 뚝 떨어졌다.
8명의 생애가 3시간 30분 만에 모두 사라졌다.
대법원 사형선고 후 불과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80년 전 무악재에서 사형선고 후
불과 6시간 만에 교수형으로 처형된
동학농민혁명의 전봉준 이후 처음이었다.
(중략)
그로부터 32년 후 법정에서 8개의 동백꽃들이 호명되었다.
"피고 도예종, 서도원,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송상진, 우홍선, 여정남에 대해 판결한다. 원심을 모두 파기하고 피고들 전원 무죄를 선고한다."
대구에서 자란 소설가 김원일은 인혁당 사건 희생자와 유족의 고통스러운 삶을 다룬 연작소설집 <푸른 혼>을 냈다. 하재완 열사의 부인을 서술자로 하는 '임을 위한 진혼곡'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어느 날, 서울에서 대구 집으로 돌아와 있는데 이웃 할머니가 바깥에 나가 보라고 해서 무슨 일인가 싶어 놀라 뛰어나갔더니, 동네 꼬마들이 이제 걸음마 정도나 제대로 떼던 네 살 난 막내아들 목에 새끼줄을 매어 끌고 다니며 때리다 못해 나무에 묶어놓고, 빨갱이 자식이니 총살시킨다며 끔찍한 놀이를 하고 있지 뭐예요.
▲ 단란하던 시절 하재완 열사의 가족. ⓒ 4.9통일평화재단
공과를 함께 논하려면 과오도 동상에 새겨야
홍 시장은 "역사적 인물을 평가할 때는 공과를 함께 논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 말이 진심이라면 박정희의 과오들도 동상에 새겨 넣어야 한다. 실제로 미국은 '닉슨 대통령 도서관 겸 박물관'을 세웠지만 기록관 성격이어서 워터게이트 사건 등 그의 과오를 낱낱이 드러내 놓았다. 홍 시장은 광주의 김대중 대통령과 비교하며 박정희동상 건립을 주장하고 있는데 그의 공과론을 따르더라도 김대중이 사람 죽인 과오가 있는가? 그때부터 사형도 사실상 없어졌는데…
대구를 비롯한 보수성향이 강한 지역에서는 박정희 동상에 찬성하는 여론이 높다니 홍 시장은 박정희를 이용해 보수 세력의 환심을 사서 대통령이 되겠다는 것인가?
나는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나왔는데 가끔 대구에 강연하러 가면 쇠락해가는 도시의 모습에 눈물이 날 지경이다. 지하철 안에 붙어있는 허접한 광고들만 봐도 대구 경제가 죽어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말은 '산업화의 상징도시' 운운하면서 경제를 살리거나 주민복지에 힘쓰기보다는 부동산 투기를 부추기는 개발사업이나 동상을 세우는 일 따위에 몰두하니 빈집이 늘어가고 지역내총생산(GRDP)은 하위 수준을 맴돈다.
시장을 비롯한 지역 정치인들이 생색내는 일에 치중하는 것도 한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홍 시장은 동상 건립에 반대하는 대구 시민단체들을 향해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고 말했다. 자신에게 반대한다고 해서 유권자에게 저런 말을 하는 심리의 근저에는 시민을 개돼지로 아는 오만이 깔려 있다. 공천만 받으면 당선되니까.
▲ 홍준표 대구시장이 박정희동상을 세우고 박정희광장으로 개조하려는 대구의 관문 동대구역광장. ⓒ 김용락
대구시민과 박정희에게 욕 먹이는 일
박정희광장과 박정희공원에서 어린이들은 어떤 가치관을 배우게 될까?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독재를 해도 된다? 출세를 위해서는 기회주의로 살아도 된다? 동대구역광장은 대구시민만 오가는 곳이 아니다. 타지역 사람들은 대구의 관문을 드나들면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마침 동대구역과 시내를 연결하는 도로에는 박정희가 좋아해서 심었다는 히말라야시다가 줄지어 서있다. 박정희가 그 나무를 좋아한 이유는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서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홍준표 시장의 동상 건립은 대구시민은 물론 박정희에게도 욕 먹이는 일이 될 수 있다. 논란이 많은 인물의 동상을 세우는 일은 그의 과오를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페인트 등으로 낙서를 하거나 시절이 바뀌면 철거될 가능성도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재임 시절 돈에 제 얼굴을 새기고 서울 남산과 탑골공원에 동상을 세웠으나, 동상은 4.19혁명 때 부서졌다. 스탈린과 레닌 동상도 격하 운동이 일어나 끌어내려졌다.
노동·인권 탄압 상징탑 세워라
박정희의 동상에 과오를 함께 새겨 넣을 수 없다면, 대구의 시민단체들이 모금해서 박정희 시대 노동·인권 탄압의 상징탑을 박정희 동상 맞은 편에 세울 것을 제안한다. 전태일 열사는 노동탄압의 상징적인 인물인데 그의 대구 옛 주거지 복원도 시청이 외면해 사단법인 전태일의친구들이 시민 모금으로 추진하고 있다.
나도 소액이나마 송금한 적은 있지만, 제주에 살고 면식도 없어 모금 행사에는 가본 적이 없다. 그런데 마침 31일 오후 4시부터 대구 중구 종로 몬스터즈크래프트비어에서 후원의 날 행사를 연다고 하기에 참석할까 한다. 의롭고 억울한 죽음이 사람들의 기억 속으로 부활하는 데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 싶기 때문이다.
▲ 전태일 열사가 어릴 때 셋방살이하던 대구 중구 남산동 폐가는 시민들이 5억 원을 모금해 2020 11월 열사 50주기에 사들였다. 모금 참여자 명단이 지금도 펼침막으로 걸려있다. ⓒ 이종원
송필경 전태일의친구들 이사장은 전화 인터뷰에서 "박정희 시대 경제 성장이 노동자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졌다는 평가도 있다"며 "박정희 동상을 세우려는 의도는 권위주의 독재의 향수를 뿌리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홍준표 시장이 대권욕에서 박정희를 천박하게 이용하는 짓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억울한 죽음을 초래한 자들의 동상은 끝내 훼손되는 운명을 맞는 사례가 너무나 흔하다. 인권의식이 높아지고 2020년부터는 인종차별 저항운동이 확산되면서 세계 곳곳에서 동상들이 수모를 겪고 있다. 미국 보스턴에서는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는 콜롬버스 동상의 목이 잘렸고,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에서는 식민지를 개척한 제임스 쿡 선장의 동상이 발목부터 잘려 내팽개쳐졌다.
무명용사나 촛불혁명 상징탑을 광화문에
사실 광화문광장에도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동상만 세워 둔 것은 아쉽다. 백성이 있어야 임금이 있고, 병졸이 있어야 장군이 있을 텐데, 한국을 대표하는 광장에 세계인이 부러워하던 촛불혁명의 상징탑이나 무명용사동상마저 없는 것은 유감이다. 4.19혁명 기념탑도 광화문 현장이 아니라 당시로는 산골이던 수유리에 세워놓았다.
우리 도시들은 대개 변두리에 현충탑이 있지만, 세계의 도시를 여행하다 보면 가장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무명용사탑이 있다.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는 왕이나 영국이 낳은 위대한 인물들이 묻혀 있지만 가장 눈에 띄는 한복판에 있는 것은 '무명용사묘'이다. 케임브리지에도 기차역 앞에 무명용사동상이 서있다. 파리 개선문 아래 무명용사묘에는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그들을 추모한다. 영웅주의 사관에서 벗어나 민중이 역사의 주체임을 기억하고 추모한다. 그래야 진정한 애국심이 발현된다.
무지도 무사유도 용서할 수 없다
시장이 시민의 휴식과 여론 수렴의 공간인 광장을 더 많이 확보하지는 못할망정 있는 공간마저 문제의 인물을 기리려 드는 건 역사에 무지하고 생각이 모자란 탓이다.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안에도 거대한 신상이 있었다. 그런 신전이나 신상 같은 것을 21세기 현대도시에 세우려 드는 건 시대착오다. 북한이 금수산태양궁전을 짓고 거대한 김일성·김정일 동상을 세웠는데, 그것마저 따라가겠다는 건가?
▲ E. H. 카의 증손녀 헬렌 카 등이 집필한 <지금, 역사란 무엇인가>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표지. ⓒ 까치, 한길사
<역사란 무엇인가>를 쓴 E. H. 카의 증손녀이자 같은 역사학자인 헬렌 카는 <지금, 역사란 무엇인가>란 책에서 역사를 잘못 이해하고 심지어 악용하는 자들에게 경고한다.
'우리가 얼룩진 과거를 무비판적으로 고집할 때, 우리는 계속해서 현재를 더럽힌다.'
이 책의 공저자인 샬럿 리디아 라일리는 노예무역상들의 동상 철거를 옹호했다. 또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 학살은 명령을 따른 것일 뿐"이라는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본 뒤 이렇게 썼다.
'무지는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무사유는 용서할 수 없다.'
시민의 광장이 정치인의 권력욕을 충족시키는 도구로 악용돼서는 안 된다. 그들은 모두 대통령을 꿈꾸는 거물 정치인이기에 역사에 관한 무지는 물론 무사유도 용서받을 수 없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시민언론 <민들레>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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