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기억... 동두천 '성병관리소'를 아십니까
미군 기지촌 여성 강제 격리한 감금 시설... 철거 말고 보존해야 하는 이유
▲ 동두천외국인관광특구, 보산동 미군클럽거리 조형탑 ⓒ 임성용
동두천시 보산동에 가면 '외국인관광특구'로 지정된 거리가 있다. 이곳은 동두천에서 가장 큰 미군 주둔지인 '캠프 케이시'를 비롯해서 동두천 일대에 산재한 미군부대 병사들이 이용하는 클럽거리다. 이 거리를 '기지촌'이라고 불렀다. 보산 캠프 건너편, 보산역 인근 골목에는 곳곳에 '미군클럽'이 들어섰고 클럽과 함께 운영된 성매매 업소가 있었다. 미군기지 주변 마을에도 촌락 형태의 기지촌이 들어서기도 했다. 기지촌은 1970~80년대까지 한창 번성을 누리다가 9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부터 차츰 쇠락했다.
동두천은 본래 이담면이라고 하는 시골 마을(동두천리)이었는데, 한국전쟁이 끝나고 미군이 들어오면서 군사도시로 성장했다. 그러나 2010년 이후 미군 평택기지가 건설되면서 도시의 입지가 흔들렸다.
한국과 미국 정부는 국토의 균형발전과 '주한미군의 안정적인 주둔여건'을 보장하기 위해 전국의 미군기지를 재배치할 것에 합의했다. 미군의 평택 기지(캠프 험프리스)는 해외 주둔 미군기지 중에서 최대 규모이며 여의도 면적의 다섯 배에 달했다. '한국 속 작은 미국 도시' 수준으로 미군과 가족 등 4만 5천 명이 거주할 수 있는 규모였다. 평택기지가 들어서자 용산에 있는 미군 핵심 지휘부와 한강 이북의 미 제2사단 예하부대가 차례로 입주했다. 2021년 무렵에는 의정부 미2사단 본부와 동두천의 미군부대 역시 주력전투부대와 병력, 시설을 대부분 평택으로 이전했다.
미군에게 의존하여 살아온 동두천시는 미군이 떠나고 기지촌 상권이 몰락하면서 경제적 타격을 받게 되었다. 생산기반이 거의 없고 미군의 소비에만 매달린 주민들의 생계가 막막해졌다. 가게들은 문을 닫고 인구수는 날로 줄었다.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동두천시는 '소요산 확대 개발 계획'을 입안하고 추진해 왔다.
그동안 동두천은 대북 접경지와 가까운 경기북부지역의 특성상 모든 것이 안보에 저당 잡혀 있었다. 재산권 제약은 물론이고 개발 자체가 어려웠다. 지역 상인들에겐 위기론이 현실로 다가왔다. 낙후된 '지역경제살리기'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계획한 구상안이 바로 소요산 개발이었다.
하지만 동두천은 숙박시설 부족뿐만 아니라 내세울 만한 마땅한 볼거리도 없었다. 그나마 서울에서 전철이 닿는 소요산을 찾아오는 사람들도 동두천에 머물지 않고 잠시 들렀다 지나가는 등산객들이었다. 이같은 실정을 바꾸고 관광객을 모으고자 관광 인프라 구축이 필요했다. 소요산 확대 개발은 그 중심 과제로 떠올랐다. 소요산 개발 예정 부지는 60만㎥으로 약 20만 평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동두천시는 개발 연구 용역을 외주업체에 의뢰했고, 지난해 12월 용역 결과를 발표했다.
그런데 개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소요산 입구에는 '성병관리소'가 있다. 성병관리소는 미군 기지촌(주로 미군 전용클럽, 성매매업소)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성병 진료 및 관리를 위해 정부가 만든 시설인데, 보건 검사에서 통과하지 못한 여성들을 가두는 '낙검자 수용소'였다. 미군에게 성병 전염을 막고 '미군을 위해 여성들의 몸을 깨끗하고 건강하게 관리한다'는 명목이었다. 이것은 사실상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국가의 '강제 구금'이었다.
일명 '몽키 하우스'라고 불리던 성병관리소는 1996년 폐쇄되었다. 그리고 20년이 넘도록 오랜 세월 방치되었다. 동두천 주민들은 소요산 숲속에 음산하게 남은 성병관리소 건물을 지역 이미지를 해치는 대표적인 흉물로 여겼다. 그러던 차에 소요산 개발이 진행되면서 성병관리소를 철거해야 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주민들은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철거와 개발이 동두천 시민들 전체의 여론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단지 개발을 위해 성병관리소를 철거해야 한다는 것은 "저걸 보기 싫게 왜 놔두느냐?"고 고개를 돌리는 사람들의 역정일 뿐이었다. 또한 개발이라는 상업적 이득에 따른 요구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철거 위기에 놓인 성병관리소 문제를 고민하고 동두천의 역사와 미군의 역사를 상징하는 성병관리소를 보존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경기북부평회시민행동'을 중심으로 여성, 인권, 문화단체와 시민들은 '성병관리소 보존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출범시켰다. 2023년부터 시민토론회 개최(1~4차), 동두천 시의회 정담회, 경기도 의회 토론회, 기자회견 등을 열었다. 토론과 간담회를 통해 성병관리소 보존의 필요성과 역사문화 공간으로 활용하자는 방안을 내놓았다.
▲ 소요산 입구에 방치된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 건물 ⓒ 임성용
기지촌의 역사
사람들은 기지촌에서 매춘에 종사한 여성들을 가리켜 이른바 '양공주'라고 불렀다. 미군은 '엘로 몽키'(노란 원숭이)라고 비하했다. 기지촌은 미군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형성되었다. 기지촌 여성들은 업소에 갇혀 지냈다. 성병에 걸리면 성병관리소에 구금당했다. 기지촌은 전국 40여 곳에 달했고 동두천의 보산동과 광암동에만 최대 4000여 명에 이르는 여성들이 있었다. 과연 그 많은 여성들이, 그 어린 나이의 소녀들과 우리의 처녀들이 모두 다 스스로 미군에게 몸을 팔러 기지촌에 들어온 것일까? 그렇지 않았다. 인신매매나 다름없이 끌려온 경우도 많았다. 이들은 강요된 매춘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녀들은 벗어날 수 없는 성 착취에 병들고, 죽고, 이름마저 버려졌다.
기지촌 역사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 있다. 사회 체제로부터 소외되고 가난에 밀린 여성들을 기지촌에 모이게 한 배후가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군사정권 하에서 '매춘의 정책적 장려'가 작용한 측면이 컸다. 박정희 정권은 매춘을 외화 획득과 달러벌이 수단으로 삼았다. 군사적으로도 한국은 미군의 주둔하에서 철저히 미군에게 예속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미군을 상대로 한 기지촌 매춘은 자연발생적인 일이라기보다 당시 정부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군을 위한 적선기지'로 우리나라 여성들의 성을 도구로 삼은 정치사회적, 군사적 구조의 문제였다.
첫째 요인은 경제적 빈곤을 들 수 있다. 우리의 산업화는 저임금과 노동력 착취를 기반으로 전개되어 왔다. 그 과정에서 절대 빈곤층이 생겨났고 특히 빈민과 빈농의 여성들은 매춘의 길로 전락하였다. 이런 배경에는 우리 민족의 짓밟힌 상처가 자리 잡고 있다. 조선의 일제강점기에 강제로 끌려간 일본군 위안부가 있었고, 해방 이후에는 군사문화가 존속된 상황 속에 매춘과 결합한 미군 위안부를 만들어냈다. 다시 말해 국가의 방조를 넘어선 적극적인 매춘 사업으로 인해 우리의 여성들이 성착취, 성적 학대, 감금, 인권유린을 당했다. 국가가 지켜주지 않은 우리의 자국민 여성들은 한국인이 아닌, 속된 말로 '양갈보'라는 손가락질을 받고 우리 땅에서 버려진 존재였다. 한마디로 기지촌 매춘의 포주는 곧 한국 정부였다.
2000년 이전까지만 해도 동두천의 기지촌은 유지되었다. 성병관리소는 패쇄되었지만 성병관리소 패쇄를 전후하여 10년간(1992~2002년) 미군과 관련된 여러 사건들이 터졌다. 대표적인 사건이 1992년 미군에게 살해당한 윤금이 살해 사건이었다. 전 국민의 공분을 산 윤금이씨 사건을 계기로 그동안 금기시되었던 미군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한국의 시민사회는 미군을 규탄하고 불평등하게 체결된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 운동을 벌였다.
윤금이씨의 죽음은 워낙 끔찍한 일이라서 사회 문제가 되었을 뿐 미군에게 살해당한 기지촌 여성들은 윤금이씨 외에도 11명이 더 있었다. 윤금이씨의 비참한 죽음에 분노하고 각성한 시민들은 1996년 쇠목마을 미군 사격장 반대 투쟁과 미군기지 반환 운동을 벌였다. 2002년엔 효순·미선 미군장갑차 압사 사건이 터져 또 다시 미군규탄 투쟁이 이어졌다.
▲ 미군에게 살해당한 고 윤금이 31주기 기억의 날 추모제 ⓒ 임성용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났다. 현재 동두천의 기지촌은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보산동 클럽들은 절반도 영업하지 않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클럽들이 운영 중에 있다. 바뀐 것이 있다면 클럽의 여성들이 한국인 대신 필리핀, 러시아, 동유럽권에서 온 외국의 여성들로 채워졌다는 것이다(2023년 약 200~300명).
이상 간략히 정리해 본 바와 같이 동두천 기지촌의 역사는 곧 미군의 역사였다. 미군의 역사는 한반도 전쟁과 분단의 역사이기도 하다. 즉 기지촌의 역사성은 단순히 미군을 상대로 한 매춘 여성들의 고통에만 있지 않다. 아직도 극복하지 못한 분단 체제의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국내 유일 아니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동두천 성병관리소는 전쟁과 독재와 산업화의 그늘로 얼룩진 암울한 한국 현대사의 살아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성병관리소의 보존 가치
성병관리소는 이미 사람들에게 잊힌 기억이 되었다. 관련 기록들도 폐기되거나 분실돼 찾을 수 없다고 한다.
동두천시가 1998년 4월 30일 펴낸 자료를 보면 "성병관리소는 '전염병 예방법' 29조에 의거 성병 보균자를 격리·수용 치료함으로써 성병 전염을 근절시키려는 목적으로 운영된다"고 적혀 있다(2008, 한겨레21, 제695호, 쇠창살 아래 웅크린 성병관리소).
동두천 성병관리소는 1974년 8월 12일 동두천시에 산재하였던 민영진료소 4개소를 통합하여 개소하였다. 1980년 이전의 3년간 자료를 보면, 성병관리소 진료 실적은 1977년 성병검진 14만 6055명, 1978년 성병검진 11만 2621명, 1979년 성병검진 12만 40명이었다.
성병관리소의 주된 업무는 이른바 '낙검자' 수용이었다. 성병에 걸린 낙검자를 분리하고 치료한다는 것인데, 성병관리소는 쇠창살과 철문으로 가로막힌 감옥과 다름없었다. 많은 여성들을 좁은 방에 가두어놓고 독한 페니실린 주사를 놓는 게 전부였다. 서양의 여성들에게나 주입할 주사제 양을 체격이 작은 한국 여성들에게 과다 투여하여 페니실린 쇼크사로 죽어간 여성들이 많았다. 길을 가다 보건소 직원과 경찰에게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오기도 하고 미군이 지목한 업소에서 일한다는 이유만으로 끌려온 여성들도 있었다. 이러한 사례만 봐도 성병관리소는 여성 인권 유린시설이었다. 그렇게 운영된 성병관리소는 운영 중단 후 지금까지 소요산 숲속에 방치된 채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힌 장소로 묻혀버렸다.
현재 남은 성병관리소는 동두천의 옛 성병관리소가 유일하다. 평택, 파주, 고양, 의정부 등의 성병관리소, 성병진료소는 도시 개발로 모두 사라지고 없다. 이젠 누구도 성병관리소의 역사를 입에 담지 않고 기지촌의 시간을 기록하려 하지 않는다. 동두천의 성병관리소가 철거되고 사라지는 것은 역사를 숨기고 영원히 지우는 행위다. 그러나 역사는 숨기고 지운다고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성병관리소를 철거하고 관광객 유치와 시민 휴식을 위해 유원지를 만든다는 것은 동두천의 '기지촌 이미지 지우기'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냉전의 잔존 지역 한반도에서 동두천은 전체 면적의 40%를 미군이 점유하고 있는 실정이다.
성병관리소 부지는 학교법인 신흥학원의 소유로 되어 있는 사유지였다. 이 때문에 누구도 손을 댈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지난 2023년 2월 동두천시가 신흥학원으로부터 성병관리소 부지를 29억 원에 매입하였다. 부지를 매입한 동두천시는 성병관리소 건물과 부지가 포함된 소요산을 본격적으로 개발하겠다고 했다. 소요산 개발 계획이 실행되면 성병관리소는 지은 지 50년이나 된 '안전위험' 건물로 건축법상 철거한대도 막을 도리가 없다. 하지만 성병관리소를 단지 낡은 건축물로만 봐서는 안 된다. 더구나 성병관리소 철거를 동두천의 부끄러운 역사 지우기로 인식해서는 더욱 안 된다.
동두천시는 개발사업비 확보를 위해 정부의 시혜를 바라기에 앞서 주권의식으로 무장하고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먼저 내걸어야 한다. 동두천이 기지촌의 이미지를 벗어야 한다면 오히려 평화의 도시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해야 한다. 성병관리소는 동두천이 보여줄 수 있는 역사 회복의 상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동두천의 역사는 결코 부끄러운 치욕이 아니며 기지촌 여성과 성병관리소는 지나온 시대를 악착같이 살아온 증거이고 생존의 눈물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우리가 우리에게 가하는 죄악이다. 오히려 성병관리소를 역사 교육의 장소로 보존하고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배우는 문화공간으로 활용해야 한다.
그럼에도 이름 없는 기지촌 여성들의 무덤인 동두천 '상패동 공동묘지'는 공원화사업으로 무덤이 모두 파묘되고 없다. 나무 막대기에 숫자만 적힌 무덤, 성도 없이 간혹 '춘자'라고만 써진 무덤, 동료들이 구덩이를 깊이 파지 못하고 두세 명을 세워서 한꺼번에 묻었다는 무덤... 그런 무덤들은 전부 무연고자 묘로 처리되고 말았다. 동두천 시는 기지촌 여성들의 공동묘지에 추모비를 세워달라는 시민단체의 요구에 비용이 없다는 이유로 아무 답이 없다.
- <2~3명 세워 같이 묻은 무덤... 잊지말아야 할 이유>로 이어집니다.
▲ 접근 금지된 폐쇄된 성병관리소 ⓒ 임성용
덧붙이는 글
필자 임성용 시인은 (사)한국작가회의 양주지부장이며 성병관리소 보존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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