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구름'의 6인 약전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실천적 역사학자 강만길 평전 41] 별도의 인물 평전이나 전기는 쓰지 않았다
▲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강만길, 사진)가 3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린동 청계11빌딩에서 현판식을 갖고 정식출범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그는 역사와 관련해 많은 글을 쓰면서도 별도의 인물 평전이나 전기는 쓰지 않았다.
<조선민족혁명당과 통일전선>에서 좌우·중도 인물의 역할, <통일운동시대의 역사인식>에서 김구·김규식의 남북협상 과정, 신간회 주도 인물, 조선독립동맹을 이끈 인물, 그리고 조선 말기 한반도 중립론을 제시한 유길준에 대한 <유길준 중립론의 배경> 등이 그나마 인물에 대해 이야기한 내용이다.
여기서는 <외로운 구름>에서 그가 다룬 여섯 명에 관한 이야기를 뽑아 들려준다.
<월영대에 서린 최치원의 비극>
10대에 당나라에 유학해서 그곳 과거에 급제하고 20대에 이미 선진 외국에서 문명(文名)을 날린 최치원이지만 본래 성골이나 진골 출신 귀족이 아니었던 그는 귀국 후 여전히 육두품의 제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선진국에서 쌓은 경륜을 펼 자리를 얻지 못한 그가 외로운 구름이 되어 경치 좋은 바닷가나 조용한 절간을 찾아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을 만큼 이 시기 신라의 지배체제는 폭이 좁고 굳어져 있었다.
변하는 세상을 외면하고 낡아빠진 귀족정치에 안주한 채 새 생각을 가진 사람을 기피하여 경직된 골품제도 속에서 맴돌기만 했던 신라의 지배체제가, 선진국 지식과 하나의 시대를 떠맡을 만한 국량을 지닌 인재라 해도 성골이나 진골이 아닌 이상 한낱 외로운 구름이 될 수밖에 없게 한 점에 바로 최치원의 비극이 있었다.
<신채호와 이광수의 갈림길>
불행했던 우리 근대사에서 중요한 사상가로서 민족사회가 가진 봉건적 인습과 문화체제를 비판하며 근대 민족문화의 수립을 위해 날카로운 필봉을 휘둘렀고, 조국이 식민지로 전락한 뒤에는 민족해방운동에 투신했던 이들 두 사람이었다. 왜 한 사람은 목숨을 바쳐 민족운동전선을 지킴으로서 8·15 후 민족해방운동가로 추앙받게 되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전선을 이탈했다가 결국 민족반역자로 심판받게 되었는가. 오늘에 사는 우리에게 그야말로 '타산지석'이 아닐 수 없다. (…)
신채호의 건설적·희망적 비판의식과 이광수의 투항적 '개조'론적 패배주의적 비판의식, 그리고 '개조'하지 않은 민중 그 자체를 역사주체로 본 신채호의 민족관과 '개조'할 수밖에 없는 민족이라 생각한 이광수의 민족관이 두 사상가의 역사적 위치를 가늠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어느 시대나 역사의식에 투철한 사상가라면 제 민족사나 민족문화에 대한 비판의식 또한 날카롭기 마련이다. 다만 그 비판이 건설적이냐 패배적이냐에 따라 그 가치가 좌우되고, 그것은 또 본질적으로는 각자의 민족관의 차이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 근대사에서 그 위치가 뚜렷한 신채호와 이광수의 차이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시대를 앞서간 지도자 몽양 여운형>
몽양 선생, 이제 선생에 대한 추도사는 만인을 감싸는 선생의 인간적 도량이나 투철한 애국심, 난마와 같은 정치 현실 속에서 더욱 돋보이던 그 식견과 역량, 그리고 그것을 펼치지 못하고 비명에 가신 안타까움 등을 말하는 그런 단계는 넘어서야 할 것 같다. 반세기에 걸친 선생의 투쟁 전체를 역사적으로 조명하고 그것을 다시 우리 민족사 위에 자리매김하는, 그런 추도사가 요청되는 단계가 된 것이라 생각한다. (…)
몽양은 정치적으로는 불우했으면서도 역사적으로는 성공한, 다시 말하면 그만큼 시대를 앞서간 지도자였다. 이제 선생이 염원하던 통일민족국가의 수립이 머지않아 실현될 것 같은 조짐들이 보이고 있다. 통일이 왔을 때 선생의 역사적 성공은 한층 더 확실하게 되겠지만, 그 때문에 분단국가체제 아래서는 그 흔한 동상 하나도 세워질 수 없고, 또 당연히 누려야 할 독립유공자란 위치도 거부되었다(노무현 정부에서 서훈되었다 - 필자).
그러나 우리는 지금 역사에서 떳떳한 것만이 영원히 떳떳하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어둡지만은 않은 마음으로 선생을 추도할 수 있는 것이다. 고이 잠드소서.
<김규식의 큰 선택>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식민지화는,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일본의 통치를 감수하여 그대로 살 것인가, 아니면 그 통치 아래 살기를 거부하고 국외로 망명할 것인가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일이기도 했다. 김구·여운형 등 많은 지사들이 망명의 길을 선택했고 김규식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김규식의 망명 선택은 조금 남다른 점이 있다. 그는 고아가 된 어린 시절 중병을 앓아서 주변 사람들이 살리기를 포기하다시피 한 일이 있었고, 이후에도 평생 병약한 몸으로 살았다. 그는 또 흔히 말하는 '정치적 기질'의 사람이라기보다 "식민지 백성으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대학의 영문학 교수로나 살았을 것이다" 할 만큼 '비정치적 기질'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망명의 길을 선택하는 데는 남다른 결심이 필요했을 것이다. 또 비록 망명생활일지라도 조금 살기 쉬운 곳을 택하려 했다면 유학했던 미국을 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 민족해방운동의 최일선이라 할 수 있는 낯선 중국을 망명지로 택했고, 독립자금 모집을 위해 몇 차례 미국을 다녀온 이외에는 32년간 망명생활을 중국에서 보냈다.
<외국인이 아닌 외국인 서재필의 비극>
갑신정변에 참가했고 정변이 성공하자 20세의 약관으로 병조참판에 발탁되었으나 '3일천하'로 끝남으로써 전혀 기약 없는 미국 망명의 길에 올랐다. 미국 땅에서 품팔이로 전전한 끝에 의사가 되어 일단 생활의 안전을 얻었으나 청일전쟁 후 국내정세가 바뀌자 그는 천신만고 끝에 개업한 병원의 문을 닫고 다시 조국에 돌아왔다.
귀국한 그에게 몇 가지 벼슬자리가 권해졌으나 모두 거절하고 약 2년간 조국의 낙후된 민주주의의 기초를 닦고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민간인 자격으로 최초의 민간신문이라 할 수 있는 <독립신문>을 발행하고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독립문을 세웠다. (…)
제헌국회에서 초대 대통령을 선출할 때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서재필에게 투표한 의원이 있었고, 그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이 표가 무효로 처리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그는 "대한민국 국회가 나를 외국인으로 규정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조금도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평생을 두고 조국의 개혁과 민주주의 발전과 독립을 위해 헌신한 그의 속마음이 어떠했을까 짐작할 만하다. (주석 1)
주석
1> 강만길, <역사를 위하여>, 창비, 2018, 53~68쪽, 발췌.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실천적 역사학자 강만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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