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서론'을 쓰다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실천적 역사학자 강만길 평전 42] 그에게 새천년을 앞둔 시점은 감회가 남달랐다
▲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강만길, 사진)가 3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린동 청계11빌딩에서 현판식을 갖고 정식출범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한 사람의 일생에서 서로 전혀 다른 두 세기를 직접 경험하는 일은 큰 행운이다. 사람이 강제로 어찌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강만길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고, 해방 이후 분단시대에 적잖은 고초를 겪었다. 이런 시기에 역사를 공부하고 가르치며 살아온 그에게 새천년을 앞둔 시점은 감회가 남달랐다.
새천년은 지구인이라면 누구나 가슴 설레게 했다. 단순히 한 해가 바뀌는 것이 아닌 천 년 단위의 해가 바뀌는 뜻깊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역사가인 그는 그 시점에 과거를 다시 돌아보고 미래를 깊이 고민했다.
새천년을 한 달여 앞둔 1999년 10월 25일, 예순여섯 번째 생일에 쓴 <21세기사의 서론을 어떻게 쓸 것인가>의 서문에서 강만길은 역사가로서 아쉬움을 토로했다.
"40년 넘게 명색이 역사학 연구자로 살아오면서 왜 역사학을 전공했는가 하는 질문을 꽤 많이 받아 왔다. 그때마다 만족스러운 대답을 할 수 없었고 그 일이 언제나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주석 1)
그는 1996년에 냈던 역사 에세이집 <역사를 위하여>에 미처 싣지 못했거나, 그 이후에 쓴 글을 모아 책으로 엮었다. "20세기가 저무는 시점에 서서 나름대로 감히 21세기 민족사와 세계사의 행방을 내다보며 쓴 글들을 모은 부분"이라 소개했는데, 역사가로서 새천년을 맞는 소회를 밝혔다.
역사학의 처지에서 보면 하나의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되려다가 좌절된 세기라 할 수 있을 20세기는 전체 인류 역사를 통해서도 참 이해하기 어려운 세기였다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21세기에 들어가서 역사학이 추구해야 할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가 국가사회주의가 실패한 원인을 찾는 일이라 생각해 보지만 어떻든 국가사회주의가 무너지고 이른바 신자유주의가 독주하는 20세기 말은 그야말로 역사적 혼돈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21세기 우리 민족사는 20세기보다 훨씬 더 세계사의 행방과 밀접히 연결될 것이다. 기어이 세기를 넘기고 만 우리의 통일문제도 분명 21세기 세계사의 흐름과 직결되어 있다. (주석 2)
그는 '제4부 20세기를 넘기면서 역사를 생각한다'에서 21세기에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가 새삼 중요하다고 밝혔다.
지정학적 위치 문제에 얽매이는 숙명론적 역사인식을 유발할까 두렵지만 다시 한번 냉엄하게 되돌아보자. 19세기와 20세기를 통해서 한반도 지역은 대륙세 청국이 강했을 때 그것에 종속되었다가, 미국과 영국을 배경으로 한 해양세 일본이 강해지자 그 식민지로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자 대륙세 소련과 해양세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대결 속의 세력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필요가 있을 때 분단되었다. 21세기에 들어가서 한반도는 동아시아에서 어떤 양상으로 존재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다. (주석 3)
역사학자로서 그 해답도 명쾌하게 제시한다.
다행히도 지금 젊은 세대의 민족관이나 역사관은 기성세대의 그것과는 차이가 크다. 지금의 기성세대의 그것과는 차이가 크다. 지금의 기성세대와 그 윗세대 사이에 있었던 차이보다 더 크다는 말이며, 바로 이 점이 민족사적 희망이다. 민족의 다른 한쪽을 적으로 보지 않고 동족으로 보는 이 민족관과 역사관이 바로 21세기의 한반도가 옳은 의미의 평화통일을 달성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통일된 한반도 지역은 중국과 러시아 중심의 대륙세와 미국이 배후에 있는 일본 중심의 해양세 사이에서 제3의 세력으로 확고히 위치하면서 양대 세력의 대립을 중화시킴으로써, 동아시아의 평화와 세계 평화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나아가서 동아시아 지역공동체 같은 것이 성립된다면 그 지정학적 위치를 유리하게 살려 제3의 위치가 그 공동체의 중심 국가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주석 4)
<민족통일을 모색하는 국학>에서 민족의 평화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역사학 연구가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민족분단시대 인문과학의 최고 과제이며 또 민족사 인식상의 최대과제는 통일지향 역사인식을 수립해 가는 일이다. 통일지향 역사인식은 또 현실적으로 각 시기마다의 통일방법론의 변화 과정과 연결되어 있다. 8·15 이후 3년간의 '해방 공간'에서는 일제 식민지 시대 민족해방운동전선에서 추진된 민족통일전선론 내지 그 운동의 영향으로 평화적 통일민족국가 수립 인식이 크게 확대되어 있었다. (…)
분단민족사회의 사회과학이 주로 평화통일을 위한 구체적·기술적·제도적 방법론을 연구하고 수립해야 한다면, 인문과학은 민족의 평화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분단시대를 통해 세워진 분단국가주의 역사인식을 청산하고 남북을 통한 민족사회 전체를 그 인식대상으로 하는, 그리고 남북 전체 민족사회의 발전을 추구하는 통일민족주의적 역사인식을 수립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주석 5)
송규진 교수는 평화통일이라는 '장기적인 낙관'에 이르는 구체적인 해법은 후학들의 몫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책의 '해제' <분단시대 역사인식에서 통일시대 역사인식으로>의 한 대목이다.
장기적인 역사발전에 낙관하면서도 단기적으로는 현실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에 대해서는 여러 질문을 던진다. 일본이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고, 중국이 패권을 지향하는 등 동아시아에서 민족국가 사이의 대립이 지속되는 경우 한반도의 통일문제는 어떻게 되겠는가. 지역공동체의 결속이 강하다는 방향으로 세계사가 더 나아가는 경우 한반도의 통일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21세기에도 초강대 국가로서 미국의 지위가 유지될 것인가. 그런 경우 한반도의 통일문제는 어떻게 될 것인가. 미국의 초강대국 지위가 언제쯤 무너질 것이며 그 경우 한반도의 통일문제는 또 어떻게 될 것인가를 궁금해 한다. 저자의 이야기대로 이런 물음을 기반으로 21세기 역사의 서론을 써야 할 것이며 이를 기반으로 본론과 결론을 집필해야 하는 것은 후학들의 몫일 것이다. (주석 6)
주석
1> <책머리에>, <21세기사의 서론을 어떻게 쓸 것인가>, 창비, 2018.
2> 위와 같음.
3> 위의 책, 313쪽.
4> 위의 책, 315~316쪽.
5> 위의 책, 283~284쪽.
6> 위의 책, 365~366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실천적 역사학자 강만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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