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만에 인연이 닿기도 하는, 언제가도 좋을 이곳
차 한 잔의 여유, 숲속 오솔길로 열린 곳... 구례 화엄사 부속 암자 구층암
문화관광해설사입니다. 향토의 사회, 문화, 역사, 설화와 자연에서 사실을 확인하여 새롭게 인식하고 의미와 가치를 찾아서 스토리텔링으로 간략히 엮어갑니다.[기자말]
▲ 화엄사 구층암 찾아가는 조릿대 숲속 오솔길 ⓒ 이완우
오월 중순의 부처님 오신 날, 구례 화엄사에는 줄지은 오색 연등이 가람 마당을 장엄하였다. 화엄사 대웅전 뒤편 돌담 사이로 오솔길이 살며시 열려있다. 키가 훌쩍 큰 조릿대 숲속으로 오솔길이 5분 정도 이어지면 화엄사 구층암(九層庵))에 가볍게 이른다. 조릿대를 스치는 바람과 계곡을 흘러내리는 여울에서 청아한 음향이 피어난다.
화엄사 구층암을 수도자들은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하는 수행처로 삼아서, 선정을 추구하는 구층대(九層臺)나 구층난야(九層蘭若)로 불렀다. 구층대는 높은 절벽 위에 있는 듯 여기는 수행처였고, 난야(蘭若)는 인도어 '아란야(Aranya)'의 한자 음차로서 적정처(寂靜處, 고요한 곳)이니, 구층난야는 위없는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선원이었다.
유학자인 매천 황현은 물소리에 봄밤의 별빛이 부서지는 화엄사 계곡에서 산새처럼 자유롭고 꽃처럼 환하고 의연한 스님들에게 상당한 존경심을 가진 듯하다. 말을 잊어야 뜻을 얻을 수 있고, 마음을 잊어야 밝음을 얻을 수 있다는 선승들의 초월 앞에서 매천 황현은 산뜻한 깨우침을 체험했을 것이다.
'이러면 좀 어때?' 당당한 기둥
▲ 화엄사 구층암 요사채 모과나무 천연 기둥 ⓒ 이완우
구층암 요사채의 모과나무 천연 기둥을 보면 할 말을 잊게 된다. 모과나무 기둥은 기둥다워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건물 창방에 머리를 대고 마루턱에 발을 디디며, 수직으로 전달되는 지붕의 하중을 지탱하는 본질에만 충실하며 천연덕스럽다. 모과나무 기둥은 백척간두진일보 경지에 이른 선승들의 자유로운 생활 태도를 드러내는 것일까? 모과나무 기둥은 '이러면 좀 어때?'하며 당당하다.
지리산에는 모과나무가 자생했다. 구층암 도량에 옛날에는 봄이면 모과나무꽃이 아름다웠다고 한다. 구층암 모과나무 기둥은 숨 쉬는 푸른 생명력으로 2백 년을 살았고, 들숨과 날숨을 멈춘 목재로서 1백수십 년을 서 있었다.
매천 황현이 이곳 구층암에 머물 때 구층암 중수기를 썼다. 격식과 의례에 익숙한 유학자에게 거추장스러운 형식과 꾸밈을 다 버리고 소박하며 진솔한 모과나무 기둥은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 화엄사 구층암 천불보전 기둥의 공포 연꽃 장엄 ⓒ 이완우
구층암 천불보전(千佛寶殿)은 정면 3간, 측면 3간의 다포식 팔작지붕의 전각으로 아담한 규모에 장중하고 화려하다. 이 전각은 아미타불을 주불로 하여 천 좌(座)의 불상(千佛像)을 모셨다. 아담한 전각에 가득 모셔진 천 좌의 불상은 세상에 가득한 중생을 비유하여, 누구라도 한마음으로 정진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구원의 암시로 보였다.
구층암 천불보전은 첨차와 살미로 쌓아 올린 공포 양식에서 살미들이 연잎과 연 줄기처럼 생명력이 충실한데, 사이사이에 무수한 연꽃 봉오리와 활짝 핀 연꽃이 조각되었다. 창방뺄목의 끝에도 연꽃이 조각되어 있어 천불보전을 연꽃으로 장엄하였다. 구층암 천불보전에는 연꽃 나무 조각이 한없이 피어 있으니, 사시사철 연꽃 향기 가득한 암자였다.
▲ 화엄사 구층암 천불보전 측면 기둥 위 자라와 토끼 목조상 ⓒ 이완우
천불보전 측면의 주심포 아래에는 거북과 토끼의 목조각이 우화를 들려준다. 거북(부처)이 바다(고해)에서 토끼(중생)를 등에 태우고 목적지(깨달음)를 향해 헤엄치는 목조각으로 대승불교의 중생제도를 형상화한 것이다.
그런데 토끼가 거북이와 크기가 비슷하니, 중생과 부처는 다름이 없다는 의미일까? 토끼가 거북 등을 타고도 천연스럽다. 부처가 중심이 되어 중생을 제도하기보다, 중생이 주체가 되어 부처를 타고 가는 듯하다.
▲ 화엄사 구층암 삼층석탑 상부 ⓒ 이완우
구층암 요사채 옆에는 2층 기단 위에 3층 석탑 한 기(基)가 서 있다. 3층 석탑이라 이름하지만, 60여 년 전 화엄사 건물 보수 작업에 참여한 편수들이 구층암 일대에 흩어진 석탑 부재를 모아서 그럴듯하게 세워놓은 탑이다.
탑신의 1층 앞면에 여래좌상이 새겨졌는데, 탑의 앞뒷면 배려가 조화롭지 않고 탑의 위치도 있어야 할 곳이 아니다. 부서진 석탑 부재를 다시 쌓아 놓은 탑이지만 역시 천연덕스럽다. 영원히 푸른 하늘, 부서진 모양대로 당당하게 세워진 석탑과 요사채의 기와지붕이 어울려 나름대로 조화롭다.
도연명이나 이백은 복숭아꽃이 핀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의 이상향을 노래하였다. 화엄사 구층암은 고사목 모과나무 천연 기둥, 흩어진 석탑 부재로 다시 쌓은 탑, 중생이 주인 같은 거북과 토끼의 목조각 등이 선불교의 파격과 자유로움을 천연덕스럽게 드러내어 별유천지비인간(이백의 시 '산중문답' 중)의 세상으로 향한 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구층암 요사채는 선방이며 다실이다. 화엄사 주변의 지리산 산록에는 야생차가 자생하여, 이곳 암자는 야생 죽로차(竹露茶)의 향기 가득한 선원이었다. 계곡 물소리 들리는 작은 정자의 탁자에서 암자를 찾은 나그네들은 거리 없이 어울려 차를 마시며 도반(道伴, 함께 수행하는 동료)이 된다.
이날 차 한 잔의 여유에 어느 청년이 가벼운 이야기를 풀어내었다. 예전 어린 시절에 노고단에서 천왕봉을 향하는 며칠간의 지리산 종주를 출발하며 화엄사를 옆에 두고 지나쳐 갔었는데, 그때 마음에 두었던 화엄사와 구층암을 이십 년이 흘러서야 우연히 찾아오게 되었단다. 인연이 없으면 바로 옆에 있어도 천리만큼 멀기 마련인데, 이제야 인연이 닿아 이곳에 머무르며 함께 차를 마시는 여유를 누리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화엄사 구층암은 조릿대 숲이 구층암 가는 열린 문이다. 조릿대 숲속의 오솔길을 걷는 가벼운 마음이 구층암으로 들어서는 일주문이다. 화엄사 구층암에는 오랜 세월을 기다린 인연처럼 차 한 잔의 여유가 있다. 지리산 노고단을 넘어오는 구름처럼, 깊은 계곡의 시원한 물소리처럼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한참 머물렀다 떠나면 된다.
인연이 닿으면 또 어느 세월엔가 이곳에 발길이 닿을 것이다.
▲ 화엄사 구층암 차 한 잔의 여유 ⓒ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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