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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 빼라는 정부, 검열관까지 홀린 '작가의 묘수'

[안지훈의 3인칭 관객 시점] 9년 만에 돌아온 흥행작 <웃음의 대학>

등록|2024.05.18 11:02 수정|2024.05.18 11:02

▲ 연극 <웃음의 대학> 공연사진 ⓒ 연극열전


연극 <웃음의 대학>을 예매해놓고 설레는 마음으로 관람일을 기다렸다. 무려 9년 만에 돌아오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공연과 사랑에 빠지기 훨씬 전에 마지막으로 공연되고, <웃음의 대학>은 기약없는 기다림 속에 세월을 보내야 했다. 초연 당시 100%의 객석 점유율을 기록했고, 2015년 공연까지 관객 35만 명을 동원했는데, 왜 이렇게 오랜만에 돌아온 것인가. 궁금해하며 기다렸다.

'연극열전'이 창단 20주년을 맞아 <엠. 버터플라이>에 이어 두 번째로 선보이는 연극 <웃음의 대학>은 웃음을 불필요하다고 여기며 희극을 업애려 하는 '검열관'과 웃음의 가치를 믿고 희극을 쓰는 '작가'의 대립을 다룬 작품이다. 오랫동안 검열관을 연기해온 서현철이 다시 한 번 검열관을 연기하고, 60년의 연기 경력을 가진 배우 송승환도 함께 검열관을 맡는다. 작가 역에는 주민진과 신주협이 캐스팅되었으며, 간간히 무대에 등장해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사환'은 손원근이 연기한다. 연극 <웃음의 대학은> 6월 9일까지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공연된다.

제약을 뛰어넘어 예술로 거듭나다

독일의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Wiesengrund Adorno)는 문화는 오직 비판을 함의할 때만 참이라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비판을 함의하지 않는 문화는 거짓이다. 만약 국가나 권위주의가 문화를 검열하거나 자본 권력의 입김이 작용한다면, 문화는 결코 참일 수 없다.

작품의 배경은 1940년대 전쟁 중인 일본으로, 국가는 중대한 시기에 웃을 시간이 없다며 문화를 규제한다. 국가를 최우선에 두는 국가주의는 문화 검열을 관통하는 핵심 논리다. 이런 사회에서는 문화가 제 기능을 하기 어렵다. 작품 속 검열관은 그런 국가주의를 대변하는 인물이고, 반대로 작가는 자신이 원하는 연극을 만들기 위해 국가주의에 대항하는 인물이다.

초기에 검열관은 작가에게 웃음을 유발하는 장면을 모두 수정할 것을 요구한다. 여기에 국가에 대한 충성이나 권력을 향한 아부를 담은 장면을 추가할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천황 폐하 만세"라는 대사를 넣어야 한다던가, 지역 경찰청장의 이름을 딴 멋진 캐릭터를 등장시켜야 한다는 식이다.

작가는 그래도 공연을 올리긴 해야 겠으니 검열관의 요구를 받아들인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건, 검열을 거칠수록 연극이 더 웃겨진다는 것이다. "천황 폐하 만세"라는 대사를 곧이곧대로 사용하지 않고, 마차를 끄는 말들에게 각각 "천황", "폐하", "만세"라 이름을 붙이며 예상치 못한 곳에서 웃음을 유발한다. 검열관의 요구로 등장한 지역 경찰청장은 주인공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 맞춰 등장해 새로운 웃음 포인트가 된다.

검열과 제약이 되레 아이디어의 원천이 되어 창작에 도움을 준 셈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검열관의 태도도 조금씩 변화한다. 처음에는 희극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점점 더 재미있어지는 대본을 보며 웃음의 가치를 인정하기 시작한다. 처음엔 웃음을 다 없애려 했던 검열관이 나중에는 이야기가 웃기지 않다며 더 웃겨지도록 수정을 요구하기까지 한다. 여기에 외압으로 추가된 경찰청장의 이름도 작품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삭제할 것을 지시한다. 급기야 검열관이 공동 작업을 하는 작가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둘은 함께 작품을 만들어 사람들을 웃겼습니다'라는 시시한 결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작가는 군대에 징집된다. 그래서 본인이 쓴 희극을 공연할 수 없다고 실망한다. 그러면서 검열관을 향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감정을 애써 눌러가며 담담하게 말한다. 이때 검열관은 예상과 다른 반응을 보인다. 검열관은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치겠다는 소리 따위는 하지 말라며, 반드시 살아 돌아와 희극을 올려야 한다고 강하게 이야기한다. 국가주의를 대변했던 인물이 종국에 자기 존재의 기반이 된 국가주의를 거부하는 셈이다. 필자는 바로 여기서 <웃음의 대학>의 가치를 보았다. 국가주의가 팽배한 어둠의 시대에 웃음을 통해 이를 전복시키며 끝내 진정한 예술로 거듭나는 일련의 과정,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난 희망을 말이다.

어둠의 시대를 건너는 법
 

▲ 연극 <웃음의 대학> 공연사진 ⓒ 연극열전


연극 <웃음의 대학>이 그려내는 시대상은 암울하기 짝이 없다. 국가는 예술가들을 향해 강압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전쟁으로 인해 국제 정세는 어지럽다. 희극을 쓰는 작가는 탄압을 받고, 연극을 만드는 행위 자체가 쓸모없는 것으로 취급받는다. 그런데 왜 작가는 희극 쓰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극중 작가가 소개하는 하나의 일화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작가는 바다를 표류하던 사람 이야기를 전한다. 그 사람은 바다를 표류하며 절망스러워 하다가 예기치 않은 곳에서 웃음을 터뜨린다. 이때 그 사람은 변한다. 절망을 버리고 희망을 발견한다. 그는 다시 살고자 하는 의지를 다진다. 그렇다, 작가에게 웃음이란 어둠의 시대를 건너는 자신만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작가는 냉혹한 시기일수록 웃음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이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도 분명 유효하다. 물론 작품이 그리는 것과 같이 국가주의가 팽배한 시기는 아니다. 적어도 대놓고 예술을 검열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문화예술이 권력에 복무하길 원하는 이들은 여전히 존재하는 듯하다. 한때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을 보나, 윤석열 정부 들어 논란이 된 이른바 '방송장악 의혹'을 보나 말이다.

그리고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시기엔 없었던 사회 문제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지금을 그때와 같은 어둠의 시기라 칭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볼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이 마냥 밝고 희망적인 것도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웃음이 사라졌다.

<웃음의 대학>은 말한다. 이럴 때일수록 웃음이 필요하다고. 먹고 살기 바쁜데 웃을 시간이 어딨냐는 사람에게 더 웃음이 필요하다고. 우리가 둘러싼 사회가 어두워질수록 공동체의 웃음을 복원하는 게 중요하다고. 문득 미국의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가 남긴 말이 떠오른다. "행복하기 때문에 웃는 게 아니라, 웃기 때문에 행복하다". 인간이 이런 존재라면, 우리는 더 웃어야 한다.
 

▲ 연극 <웃음의 대학> 공연사진 ⓒ 연극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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