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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 숙일 때마다 그어지는 선... "이렇게 사니까 재밌잖아"

남원시 산내면 지리산 아래 주상용씨 논에 손 모내기 하러 모인 사람들

등록|2024.05.19 19:49 수정|2024.05.19 19:49
봄과 여름이 맞물려 어우러지는 계절, 모내기를 앞두고 물이 찰랑거리는 논은 그대로 한 장의 도화지가 된다.

낮에는 지리산과 그 위를 떠다니던 구름을, 밤에는 달과 달빛에 비친 세상을 그려 놓았던 논에 이제부터는 초록색을 칠해야 한다.

남원시 산내면 지리산 아래에 자리한 주상용씨네 논에 아침 일찍부터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손 모내기를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 물을 대고 써레질까지 마친 논에 지리산이 그려져 있다. ⓒ 장진영

   

▲ 한 장의 도화지에 초록색 색칠을 하는 사람들. ⓒ 임현택


"넘기자."
"어이~"


마을 형님의 구령 소리에 맞춰 못줄이 한 번 넘어간다. 우리의 허리는 숙여지고, 논에는 한 줄의 초록색 선이 그어진다.

"어이~"

우리가 숙여진 허리를 다시 세우기가 무섭게 못줄이 또 한 번 넘어간다. 처음엔 산과 하늘과 세상을 담고 있던 논이 조금씩 조금씩 초록빛으로 변하고 있다. 마치 산과 하늘과 세상의 색을 모두 더하면 초록색이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요즘과 같은 시대에 어떤 이유로 손 모내기를 하는지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그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는 것 같다. 굳이 그 이유를 깊이 궁리하지 않아도, 길게는 20년 전부터 작년에 처음 나온 사람까지 이미 같은 생각으로 지금 이곳에 다시 모인 게 분명해 보인다.

"이렇게 사니까 재밌잖아."

막걸리 한 잔 들이켜고 투박한 목소리로 툭 내뱉는 누군가의 한 마디 말이면 충분하다.
 

▲ 오늘 같은 날은 물에 빠져도 즐겁다. ⓒ 임현택

 
쌀 한 톨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무게를 잰다
바람과 천둥과 비와 햇살과
외로운 별빛도 그 안에 스몄네
농부의 새벽도 그 안에 숨었네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들었네

- 홍순관의 '쌀 한 톨의 무게' 중에서.

바람과 천둥, 비와 햇살과 외로운 별빛, 그리고 농부의 새벽. 쌀 한 톨이 밥이 되어 나의 밥상에 오르려면 이러한 모든 개별적 존재가 하나로 모아질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래서 모 하나를 심는다는 것, 한 톨의 쌀로 지은 밥 한 공기를 먹는다는 것은 나 또한 세상의 모든 존재들과 연결되고 하나로 모아진다는 의미가 된다.

못줄이 한 번 넘어갈 때마다 한 줄이 되어 움직이는 지금 상용 씨네 논에는 특별히 더 빠른 사람도 느린 사람도 없고,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없다.

"넘기자."
"어이~" 

 

▲ "모가 자라는 만큼 나도 자라겠지?" ⓒ 임현택

   

▲ 모내기를 마치니 더 기분이 좋다. "함께 해서 행복했어요." ⓒ 임현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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