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꺼이 질 수 있는 마음이 '다정'이라 생각해요"
[인터뷰] 가수 진동욱
▲ 가수 진동욱[the orchard] ⓒ Authentic
"지극히 주관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한 밴드 데카당의 보컬로 데뷔한 가수 진동욱은 밴드의 해체 이후 솔로 가수로서 꾸준히 커리어를 쌓아왔다. 그가 'the orchard'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과수원의 주인이 된 지도 어느덧 5년. 매번 편지를 꾹꾹 눌러쓰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노래를 수확해 온 진동욱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알차게 익은 과실을 한아름 품에 안고 돌아왔다. 새 EP < Lovers Always Lose >를 발매한 그를 만나 노래 너머에는 어떤 진심 있었는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랑하는 우리는 결국 지지만 이내 괜찮고
▲ 지난 4월 8일에 발매 된 진동욱의 EP 앨범 < Lovers Always Lose > ⓒ Authentic
-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노래하는 진동욱이라고 합니다."
- 지난 4월에 새 앨범이 나왔어요. 앨범 발매 이후 단독 공연도 하시며 바쁜 일정을 소화하셨는데, 공연이 끝나고 어떻게 지내셨나요?
"공연이 끝나고 나서도 정신이 없었어요. 같은 레이블 소속 뮤지션인 한로로의 EP가 나오는데, 앨범 전체의 프로듀싱을 맡았습니다. 최종 작업이 지난주가 되어서야 다 끝났어요. 5월 28일에 발매를 앞두고 있습니다."
- 한로로 님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영상을 통해 어떻게 작업하는지 자세히 알 수 있어서 좋더라고요. 그 밖의 근황은요?
"이제 제 다음 앨범을 준비 중이에요. 이번에 낸 앨범 < Lovers Always Lose >의 제목을 도치해서 < Losers Always Love >라는 앨범을 올 하반기에 낼 계획이에요. 앨범에 들어갈 노래의 데모를 5곡 정도 썼고, 이번 달 말에 밴드와 함께 부산으로 편곡 송 캠프를 가서 녹음도 진행할 예정입니다."
- 앞서 나온 앨범의 이름을 도치하는 발상이 재밌네요. 이번 앨범 제목은 '사랑하는 사람들은 항상 패배한다'였는데, 다음 앨범은 '패배하는 사람들은 항상 사랑에 빠진다'라니 또 얼마나 처절한 내용일지 궁금해요.
"오히려 다음 앨범은 위트가 더 가미된 앨범이 될 거예요. 무언가를 표현할 때 가장 상위에 있는 건 위트라고 생각해요. 이번 앨범에서도 어느 정도 위트를 담으려 했는데 이다음 앨범에는 위트가 더 드러날 거예요. 루저에 관한 얘기니까요."
- 이번 앨범에도 위트가 담겨 있다는 말씀에 공감해요.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슬퍼하는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 안에서 위트를 부릴 수 있다는 건 보다 성숙한 단계에 접어든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사랑과 상실'을 다룬다는 점에서 이전에 발매한 앨범과 공통점이 있지만, 그것을 대하는 태도에는 차이가 생겼다고 느꼈습니다.
"변화가 분명히 있죠. 이전에는 대상이 극명한 노래를 많이 썼어요. 예를 들어 '부산'이나 '영화관에서' 같은 노래들은 실제로 부산과 영화관에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썼어요. 저는 진심이 중요한 사람이라서 가사를 쓸 때 웬만하면 제가 겪었던 일을 재료로 삼거든요. 하지만 어떤 시점 이후에는 그 마음을 담긴 담으나 특정한 누군가가 아닌 여러 대상을 하나의 개체로 만들어서 대하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되니까 오히려 표현의 해상도가 높아지더라고요.
또 이전에는 화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노래가 대부분이었다면, 이번 노래의 가사에서는 외부에서 보는 나의 모습을 표현했어요. 앨범을 여닫는 트랙인 'Wake Up!'과 'A Chant For Innocents'의 가사를 보면 주어가 'You'에요. 너에게 하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결국엔 내 이야기죠. 'Mirror Mirror'도 거울 속의 나를 보고 하는 이야기고요. 슬픔을 겪는 상황이더라도 나의 모습을 타자화해서 읽을 수 있다면 우리는 괜찮아진다고 생각해요."
- 어린 시절을 호주에서 보내서 그런지 영어 가사로 된 곡도 종종 발매하셨죠. 이번 앨범은 전 곡이 다 영어 가사예요. 전 앨범을 영어 곡으로 채운 이유가 있나요?
"요새는 인디음악도 해외에서 크게 주목받는 시대라서 영어를 채택했어요. 영어로 가사를 쓰는 게 편하기도 하고요. 한글 가사를 쓰면 청자들이 어려워한다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있었어요. 저는 한글로 가사를 쓰면 우회하는 습관이 있거든요. 오히려 제가 쓴 영어가사를 보면 직선적인 표현 위주라서 이해하기가 쉬워요."
- 개인적으로는 동욱님의 한글 가사를 참 좋아해요. '부산'이나 '생색' 같은 곡에 담긴 문학적 표현들을 여러 번 곱씹으며 들었습니다.
"그런 표현들은 한글로 썼기에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한글 가사는 편지 같은 느낌이 들어요. 제게 영어는 '말'에 가까운 느낌이라면 한글은 '시'나 '소설'이 가장 기본이거든요. 한글 가사를 쓰는 걸 아예 놓은 건 아니에요. 이번 페이즈가 끝나면 한글 곡을 더 내고 싶습니다."
- 이번 앨범은 처음으로 스스로 프로듀싱한 앨범이라고 들었어요.
"이전에는 밴드 wave to earth의 김 다니엘이나 현재 제 밴드에서 건반을 치고 있는 Steven 같은 동료들이 프로듀싱을 맡아주곤 했는데, 이번 앨범은 제가 프로듀싱과 믹싱을 공부하고 나서 나온 첫 앨범이에요. 애초에 저는 컴퓨터도 잘 다루지도 못했고, 직접 프로듀싱과 믹싱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이번 앨범은 제 음악적 성장의 결과물이라서 의미가 남다릅니다."
- 이번 앨범에서 음악적으로 유독 신경 쓴 점이 무엇인가요?
"우선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어야 하고 연주적으로도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게 이번 앨범의 가장 큰 목적이었어요. 전체적인 트랙의 톤앤매너를 맞추는 데 신경을 많이 썼어요. 각 곡이 장르적으로는 조금 다르게 느껴질지언정 악기나 편곡적으로는 최대한 한 노래처럼 들리도록 하려고 노력했죠. 마지막 곡을 제외하고는 다 같은 키(key)로 썼고요, 제 밴드 일꾼들이 전부 다 편곡에 참여해서 녹음도 같이하는 식으로 진행했어요."
- 트랙의 순서에도 의도가 느껴져요. 어떤 방식으로 구성하신 건가요?
"이번 앨범의 노래를 들어보면 시간대를 정의하는 말이 자주 나와요. 'Wake Up!'이라는 곡은 말 그대로 잠에서 깨서 일어나는 시점을 담았고, 'Dizzy Dizzy Morning I Feel So Alone'에도 'Morning'이라는 단어가 나오죠. 'Mirror Mirror'에는 새벽(Dawn)까지 등장하거든요. 앨범을 순서대로 들었을 때 하루 동안 일어나는 일처럼 느껴지도록 트랙 순서를 짰어요."
- 듣고 보니 이별을 겪은 한 사람의 모습이 그려지네요.
"네. 밖에 나가지도 않고 집 안에만 박혀서 하루 종일 뒤척이다가, 괜히 옛 생각에 빠지기도 하고, 이제는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선언도 해보고, 그렇지만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는 그런 모습이죠. 이걸 표현하려고 지난 공연과 라이브 영상에서 모두 파자마를 맞춰 입고 나왔어요. 'Wake Up' 뮤직비디오에는 잠옷을 입고 집에만 있는 남자의 모습이 나오고요."
▲ < Lovers Always Lose > 라이브 클립 촬영현장 ⓒ Authentic
- 수록된 곡들이 결국엔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고, 매우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어요. 한 앨범에 담는 걸 미리 계획하고 쓴 곡들인가요?
"작업 순서로 보면 'Lovers always lose'라는 말이 가장 먼저 나왔어요. 오래전에 메모를 해놨던 문장인데 이를 앨범의 제목으로 정했고, 그 안에 들어가는 곡들은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썼어요. 그래서 각 곡의 연결성이 보다 긴밀해졌다고 생각합니다."
- '사랑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진다'라는 말은 마지막 트랙인 'Chant For Innocents' 가사의 한 구절이기도 하죠. 사랑 앞에 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사랑하는 이들이 이길 마음을 접어두는 것을 다정이라 치환하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사랑에 패배하면 분함을 느끼고, 복수를 다짐하고, 혼자서 찌질하게 망상을 늘어놓기도 하지만, 그냥 기꺼이 질 수 있다는 그 마음가짐이 곧 다정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너는 이제 내 목으로 노래하네
"두 가지 의미가 있어요. <나는 비행기> 발매 직전에 낸 앨범 <우연을 가장한 시사회>는 제가 정말 정말 사랑했던 소중한 친구 진원이를 떠나 보내는 마지막 앨범이었어요. 이 앨범에 수록된 '듣고 있어'라는 노래는 그 친구한테 보내는 편지였죠. <나는 비행기>는 '이젠 내가 너의 이야기를 조금은 뒤에다가 쓸게'라고 말하는 일종의 선언이었어요.
다른 하나는 음악을 다시 시작한다는 뜻이에요. 사실 음악을 그만두려던 적이 여러 번 있었어요. 친구를 떠나보내고 데카당을 해체했을 때도 그랬고, 솔로 활동을 하면서도 뮤지션을 계속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어요. 더 날아가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이게 제 뜻대로 되는 게 아니었고, 성실함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운도 필요하다는 걸 느꼈죠. 솔로로 낸 음악에 대한 반응은 더뎠고, 밴드를 할 때 초심자의 행운을 다 소진한 것 같은 생각이 계속 있었어요. 이 곡의 가사에서 뮤지션으로서 날고 싶은 제 자신을 비행기에 비유했습니다. 비록 나는 여전히 작은 뮤지션이지만 공항에 더 머물고 싶다는 마음을 담았어요."
- 데카당의 해체 소식을 듣고 많은 분들이 아쉬워했습니다. 밴드 활동을 마무리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과수원'이라는 뜻의 현재 활동명 'the orchard'를 쓰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을 거라 짐작했어요. 활동명에 담긴 의미는 무엇인가요?
"네, 맞아요. 'the orchard'라는 이름은 데미안 라이스가 'Juniper'라는 밴드를 하던 시절에 썼던 곡에서 따온 이름이에요. 진원이와 저는 학창시절부터 데미안 라이스를 무척 좋아했고, 나중에 둘이 듀엣을 결성하면 꼭 이 이름으로 활동하자고 약속했습니다."
- 삶은 결국 '그럼에도 불구하고'잖아요. 음악을 그만두려 했던 적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항에 머물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건가요?
"원래는 진원이가 남긴 노래를 앨범으로 내고 음악을 그만두려고 했어요.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그 친구 때문에 음악을 더 하고 있어요. 루시드폴의 노래 중에 '노래할게'라는 곡이 있어요. 그분도 저와 비슷하게 친구를 먼저 떠나보내셨는데, 그 곡 가사에 '너는 이제 내 목으로 노래하네'라는 구절이 있어요. 저는 이 문장을 가슴 속에 품고 살아요. 그 친구가 살 수 있었던 내일들을 모아서 사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 친구분이 음악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들게 했으면서도 동시에 음악을 계속 하게 만든 거네요.
"맞아요. 또 계속할 수 있는 힘을 주고 있는 거죠. 설령 노숙을 하더라도 공항에 더 머물고 싶다는 그런 용기를 얻어요."
- 마지막으로 2022년 봄에 나왔던 '우리는 차가운 까닭에'라는 곡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슬픔을 딛고 일어나 봄을 맞이하려는 굳은 의지가 느껴지는 곡이었어요. 우리가 봄을 맞이하기 위해 필요한 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엄청 깊은 수렁의 우울이나 불안에서 벗어난 뒤로 그 쪽으로는 최대한 안 가려고 노력해요. 그리고 작은 단위의 행복을 최대한 많이 챙기고 있어요. 예를 들면 아침에 커피를 한 잔 사들고 운동을 갈 때나 길을 걷다가 귀여운 강아지를 마주쳤을 때 느끼는 기분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술자리를 최대한 만끽하려고 노력해요.
저는 작은 관계망 안에서의 행복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사랑하는 사람들의 건강과 행복이 마치 인드라망처럼 이어져 있는데, 한 명이 무너지면 그 생태계 전체가 죽는다고 느꼈거든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스스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해요. 이 작은 마을의 행복과 건강을 유지하는 게 제 앞으로의 목표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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