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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재평가? 그는 정말 반공을 잘했던 걸까

[좌파의 우파책 읽기] 연설집 <이승만 스피치 1948>를 읽어도 풀리지 않는 의문들

등록|2024.05.28 17:32 수정|2024.05.28 17:34
'우파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를 자주 궁금해하던 좌파의 정체성을 살려, 직접 우파 서적을 비판적으로 읽어보고자 합니다.[기자말]
최근 몇 년간 보수 진영의 '추앙' 대상이 '경제의 박정희'에서 '건국의 이승만'으로 점점 옮겨가는 것 같다. 공무원, 언론사 직원 등을 동원했다는 논란은 있지만 100만 명 이상이 2월에 개봉한 〈건국전쟁〉을 관람했고, 이승만을 다룬 또 다른 영화 〈기적의 시작〉도 5월에 개봉했다.

윤석열 정부가 추진하는 독립유공자 공적 재평가를 두고는 '이승만을 위한 포석'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윤 대통령은 3.1절 기념식에서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무장독립운동을 벌인 투사들이 계셨고, 국제정치의 흐름을 꿰뚫어 보며 세계 각국에서 외교독립운동에 나선 선각자들도 있었다"고 했는데, 이는 이승만의 외교독립운동 재평가를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된다.

올해 1월에는 국가보훈부가 32년 만에 처음으로 이승만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기도 했다. 보수 진영을 중심으로 전방위적인 '이승만 재평가'가 시도되는 셈이다.
 

▲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일 제105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는 모습. ⓒ 연합뉴스


1948~1949년 이승만 연설을 모은 〈이승만 스피치 1948〉도 그런 흐름에 놓인 책이다. 올해 3월에 나온 이 책은, 서문이나 추천사 등에서 직접 이승만을 찬양하지는 않지만, "대한민국의 건국과 초기 발전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펼쳤던 비전과 지도력을 재조명하고 그의 정치‧사회‧경제적 공로를 이해하는 데 보탬이 될 것"이라는 인터넷 서점의 책 소개에서 이승만을 바라보는 시각이 드러난다.

최근의 '이승만 재평가'에 의구심을 품고 있었기에 정말 이승만이 그렇게 대단한지를 한번 확인해보고 싶었다. 다른 사람의 해석이 아닌 이승만 본인의 말을 직접 듣고 판단하자는 생각으로 이 책을 집었다.

민주주의와 자유 이야기했던 이승만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대목은 책의 초반, 그러니까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약 3달 동안 했던 연설들이다. 이 시기의 이승만은 극단적 반공주의(反共: 공산주의 반대)를 외치는 대신,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주장한다.

그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우리의 각오〉에서 "건국 기초에 요소가 될 만한" 6가지 조건을 이야기하는데 3가지가 ▲ 민주주의를 전적으로 믿어야 될 것 ▲ 민권과 개인자유를 보호할 것 ▲ 자유의 뜻을 바로 알고 존중하며 한도 내에서 행해야 할 것이다.
 

▲ <이승만 스피치 1948> 표지. ⓒ 투나미스


마지막 조건도 '진보적 사상을 가진 청년들을 과도히 책망하고 탄압하는 것은 남의 사상을 존중하는 원칙에 위반된다'며 '자유의 한도'보다는 '자유 보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민주주의, 민권, 개인 자유를 강조하는 내용이 절반을 차지하는 셈이다.

한 달 전인 7월 24일의 〈대통령 취임사〉에서는 '우리는 공산당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고 공산당의 매국주의를 반대하는 것'이라며 '이북의 공산주의자들은 절실히 깨닫고 일제히 회심개과(悔心改過)할 것'을 부탁한다.

이처럼 막 취임한 이승만은 최소한 공식적으로는 반공보다 민주주의, 자유를 강조했고, 반공주의자긴 해도 멸공까지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랬던 이승만이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1949년 5월 3일의 〈국회 제1회 정기회의 폐회식 치사〉에서는 "이 세상은 공산과 민주 양 진영이 공존할 수는 없는 것" "둘 중에 하나는 죽어야만 세계가 평화롭게 될 것"이라며 공산당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이런 변화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1948년 10월의 여수‧순천 사건을 빼놓을 수 없다. 국군 14연대가 제주 4·3 항쟁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거부하면서 일어난 이 사건을 두고, 이승만은 1948년 11월 5일의 〈불순배를 철저히 제거 반역사상 방지법령 준비〉처럼 강경한 제목의 연설을 연이어 쏟아낸다.

그 뒤로는 UN 총회의 한국 문제 토의 연기 등 다른 사안에서도 "공산적색 '테로' 자들이 도처에 살인, 방화로 우리를 공포시켜서 복종하게 만들려는 것을 그 분들은 모르는가" 같은 과격한 발언이 늘어난다. 그렇게 우리가 익히 아는 '반공주의자' 이승만이 등장한다.

이승만 정부의 실책, 셀 수 없는 민간인 사망자들 

이 책을 읽는 일은 당시 시대상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유익했다. 주로 후대 사람들의 평가로 접했던 사건, 막연하게만 알고 있던 사건을 당대에는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나는 여수‧순천 사건을 제주 4.3 항쟁의 연장선에 있는 사건, 훗날 국군 내의 공산주의자 숙청을 부른 사건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그 이상으로 한국 사회의 반공주의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임을 이 책 덕분에 알게 됐다. 반공주의가 어떤 식으로 정당화되고 강화됐는지도 조금이나마 더 깊이 이해하게 됐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는 내내 두 가지 의문이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첫째, 설령 이승만이 표방한 반공주의가 당시 상황에서 옳았다고 쳐도 이승만이 정말 반공을 잘했던가?

이승만의 반공에서 결정적 순간을 딱 하나만 꼽는다면 한국전쟁일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한국전쟁 당시 국민방위군 사건(한국전쟁 당시 강제징병된 국군 병사들이 간부들의 보급품 부정 착복, 횡령 등으로 사망한 사건-기자 주), 보도연맹을 비롯한 민간인 학살, 서울시민의 피난을 막는 한강 인도교 폭파 등의 실책을 저질렀다.

전쟁 과정에서 발생한 불가피한 일이라고 치부하기에는 피해자가 너무 많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인 양영조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홈페이지에서 국민방위군 사건에 대해 "수많은 장정들이 식량과 피복을 지급받지 못해 곧바로 병력 1천여 명의 아사 및 동사자가 발생하였고 수만 명이 영양실조에 걸려 이후 사망에 이르렀던 것"이라며 "사망자 수는 9만여 명 이상으로 추산"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6월 25일 전체 국군 수가 10만 4000여 명이었으니(국방부 홈페이지 참조), 거의 국군 전체와 맞먹는 병력이 몰살당한 셈이다.

민간인 학살 규모 또한 1954년 공보처 통계국이 작성한 〈종합피해조사표〉만 봐도 12만 9천여 명에 달했다. 학살 피해자 가운데 '행방불명' '납북'으로 신고된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실제 민간인 학살자는 훨씬 많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상임위원으로 한국전쟁기의 민간인 학살을 조사한 사회학자 김동춘은 민간인 학살 규모를 20~30만 명으로 추정하는데, 특히 "국군, 경찰, 우익 세력에 의한 학살 규모가 인민군 혹은 지방 좌익에 의한 학살 규모보다 훨씬 컸다"며 "대한민국 군경은 매우 잔혹했고 실제로 인민군보다 죄 없는 민간인을 더 많이 죽였다"고 지적한다(〈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 334쪽). 어떤 기준으로 봐도 국군의 학살이 사소한 문제로 치부될 수는 없다.

요컨대 전혀 진보적이지 않은, 반공이라는 관점으로 봐도 국민방위군 사건은 국군 전력에 막대한 손실을 끼쳤으며, 민간인 학살과 한강 인도교 폭파 역시 훗날 국군이 될 수도 있는 잠재적 전력을 스스로 깎아 먹은 셈이다. 설령 희생자 가운데 국군이 될 사람이 없었다고 해도 이 사건들은 국민들의 정부에 대한 충성심이나 전쟁에 대한 지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승만이 반공을 잘했다'는 건 한국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결과만 놓고 본 사후적 평가가 아닌가? '방구석 여포'처럼 국내에서만 반공을 잘하고 정말 공산주의 세력에 맞서야 할 중요한 순간에 반공을 제대로 못 했다면, 이승만의 반공은 국내 반대 세력을 억누르는 내부적인 통치 이데올로기에 불과했던 것 아닌가? 이런 의구심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2024년 한국 사회에서 '반공'의 의미 

두 번째는 '이승만 식의 반공이 2024년의 한국 사회에 얼마나 유효한가'란 의문이다. 이승만이 내세운 반공은 옳고 그름을 떠나 1948년 시점에서는 국민들의 공감을 얻을 만한 부분이 있었다. 냉전이라는 세계적인 흐름 속에서 한국은 북한과 체제 경쟁을 벌여야 했고, 당시 북한은 한국보다 훨씬 경제력 면에서 앞서 있었다.

〈반일 종족주의〉 대표 저자이자 이승만학당 교장인 이영훈은 "사회주의 생산력 덕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북한이 일제로부터 받은 물적 유산이 풍부했기 때문"(〈대한민국 이야기〉 171~172쪽)이라고 지적하지만, 이유가 뭐든 1970년대 초반까지는 북한이 한국보다 경제력 면에서 앞섰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평가다.

냉전의 시대는 끝났고, 북한과 남한의 격차는 이미 엄청나게 벌어졌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2년 북한의 명목 GDP(국내총생산)는 36조 2천억 원으로 한국의 60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1인당 GNI(국민총소득)는 143만 원으로 역시 한국과 비교하면 30분의 1 수준이다(통계청, 〈2023 북한의 주요 통계지표〉).

물론 국력을 경제력만으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이승만 때의 북한과 지금의 북한은 너무나 다르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의 위협'을 아무리 강조해도 많은 국민에겐 철 지난 '돌림노래'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이를 두고 '안보의식이 약해졌다'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지만, 아무리 그런 주장을 해봤자 보수 진영 바깥의 국민들에게는 설득력을 갖기 힘들다.

그래서 보수 진영이 주장하는 '이승만 재평가'가 대체 왜 필요한지, 이 책을 읽은 뒤에도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이영훈은 이승만학당 홈페이지에서 '국민들의 이승만에 대한 평가가 인색하다'며 "그래서는 자유인의 공화국으로서 대한민국의 장래도 밝지 않다"고 주장하지만, 이승만이 저지른 독재나 인권 유린은 보수 진영이 외치는 '자유'에서 일탈한 행위로, 당시를 감안해도 필요악에 불과하다. 나는 재평가라는 이름으로 이승만을 찬양, 미화하는 일야말로 '자유인의 공화국'을 위협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북한의 위협이 약해진 2024년의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반공을 명분 삼아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억눌렀던 이승만에게 무엇을 배워야 할까? 정말 '이승만 재평가'가 필요하다면, 이승만이 반공을 잘했었는지를 다시 평가하는 게 훨씬 더 의미 있지 않을까? 내게는 좀처럼 해소되지 않을 물음표만 여럿 남기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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