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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속 버려진 자동차, 소설 한 편 뚝딱 지어낸 아이

생활밀착형 예술이 일상에 넘쳐나길... 아이들 보며 고민하는 좋은 양육자의 모습

등록|2024.05.25 11:41 수정|2024.05.25 11:41
그룹 '육아삼쩜영'은 웹3.0에서 착안한 것으로, 아이들을 미래에도 지속가능한 가치로 길러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서울, 부산, 제주, 미국에서 아이를 키우는 보호자 다섯 명이 함께 육아 이야기를 씁니다.[편집자말]
며칠 전 짧은 봄방학을 맞이해, 동네 친구네와 함께 집에서 두 시간 떨어진 앰허스트(Amherst)라는 곳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내가 사는 도시 보스턴과는 달리 앰허스트에는 여러 대학이 모여 있어 젊은 사람들이 많았고, 덕분에 경쾌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마침 트래킹을 좋아하는 친구가 자주 찾았던 트래킹 코스를 걷기로 한 날이었다. 한참을 산속으로 걸어 들어와 좁은 샛강 하나까지 건너 더 깊은 곳을 향해 걷고 있을 때였다. 녹이 슬어 형태만 남아있는, 타이어조차 찾아볼 수가 없는 자동차 한 대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아주 오래전 이곳에 방치된 차량임이 분명해 보였다.

여긴 나무가 우거져 사람이나 동물이 아니면 들어올 수가 없는 곳인데, 심지어 샛강 하나를 건너야 하는 곳인데 여기서 자동차를 만나다니, 아이나 어른이나 다들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과 함께 자동차 주변을 둘러보고 차체도 만져봤다.

차 문에 숭숭 뚫려 있는 구멍 여러 개를 발견하기도 했다. 우린 차에 총알이 날아든 게 아니냐는 이야기를 하며 한참 동안 낡고 녹슨 자동차 곁에서 맴돌다가, 두 시간 가까이 더 걸어서 그날의 산행을 마쳤다.
 

▲ 산 속에 버려진 자동차,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장면이었다. ⓒ 김보민


짧은 방학은 눈 깜짝할 사이에 끝자락을 보여주고 있었다. 비가 오는 토요일, 새벽에 일찍 눈을 떠 공부방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눈 비비며 일어난 아이가 나를 보더니 공책을 건넨다. 여행하고 집에 올 때 기념품으로 샀던 그 공책이다. 공책 표지를 넘기자 첫 페이지는 여백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뭔가 빡빡하게 적혀있다.

"엄마, 지난번에 앰허스트에서 트래킹 하다 만난 자동차 있잖아. 그 자동차에 숨은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아서 내가 이야기를 지어 봤어." 

아이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이름은 이반과 브리엔. 모아둔 돈을 카지노에서 흥청망청 쓰는 이반에게 브리엔은 이혼을 요구하고, 화가 난 이반은 술을 마시고 운전하다 산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경찰에게 쫓기는 이반이 산속에 차를 버리고 도망을 가며 이야기는 전개된다. 카지노와 이혼, 술과 음주 운전이 뒤얽힌 상황이 아이의 정서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산속에 버려진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는 어른의 이야기를 상상하자면 이런 소재가 떠오를 수밖에 없겠다 싶었다.
 

▲ 아이가 써 내려간 버려진 자동차에 대한 이야기. 아이의 허락을 구하고 첫 페이지를 사진에 담았다. ⓒ 김보민


비 오는 토요일 오전 내내 우리는 산속에서 그저 생경하게만 보였던 자동차를 또다시 끄집어냈다. 아이는 집에 돌아오는 내내 자동차에 대한 생각을 줄곧 했다며, 이야기를 상상하고, 공책에 담으며 즐거운 마음뿐이었다고 했다.

자동차를 두고 상상의 나래를 펼친 아이의 이야기는 듣고 또 들어도 재미있었다. 아이의 이야기를 듣다 문득 우리는 태어날 때 모두 예술가로 태어난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눈 앞에 없는 세계를 상상하고 만들어내고 창의적으로 놀고... 아이였을 때 예술가였던 우리는, 각자 가진 것을 발현시키기 전에 이미 남이 하는 것을 따라 하려 애만 쓰다가 나름의 고유한 기질을 다 잊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다양한 경험 중요하다지만... 아이들에겐 부족한 '놀 시간'

고백건대, 나는 게으른 엄마 축에 속한다. 싱가포르에 살 때에는 직장을 다니느라 아이들을 학원과 같은 방과 후 활동에 데리고 다니지 못했다. 주말에도 어른들이 공원, 놀이터, 바다로 나가 노느라 아이들은 학원 근처에도 못 갔다. 미국에 와서는 차를 타고 이동해 어딘가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기가 귀찮아서 학원을 못 보냈다.

그리하여 아이들은 그 흔한 피아노 학원은 몇 개월 다니다 말았고 미술 학원, 수학 학원은 다녀본 적이 없다. 언젠가 아이들이 왜 학원에 보내주지 않았냐고 툴툴거리면 나를 탓해야 한다.

많은 이들이 아이가 어릴 때 다양한 경험에 노출을 해주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것저것 시켜보고, 잘하는 건 뭔지 찾아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꼭 뭔가 경험하기 위해, 자기가 잘하는 게 무엇인지 찾아보기 위해 기관에 등록하고, 남들이 하는 방법과 똑같이 배워야만 하는 것일까? 이 점에서 나는 약간의 의문을 가지고 있다.
 

▲ 어제는 날이 기막히게 좋았고, 학교를 다녀온 아이들과 곧장 동네 호수에 가서 실컷 놀다 왔다. 날이 좋은 날은 제대로 놀아야 한다. ⓒ 김보민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아주 어릴 때부터 악기를 배우고 악기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사람도 멋지지만, 음악을 듣다가 울고 웃는 흥이 넘치는 사람이 되는 것도 근사한 일이라고.

비례를 고려해 밑그림을 그리고 색을 잘 써서 완성도가 높은 그림을 그리는 것도 좋지만, 사시사철 변하는 나무와 하늘과 바람의 색과 느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이 또한 멋진 일이지 않을까?

학원에 등록하지 못하는, 혹은 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아이들에게 턱없이 부족한 '놀 시간'이다. 4시 하교, 8시 취침이 일과인 아이들인데 4시간 동안 학원 가고, 숙제하고, 저녁 먹고, 노는 것을 다 못할 것 같다는 판단에 학원과 같은 추가 수업은 일찌감치 일정에서 제외했다.

학교를 파하고 집에 돌아오면 아이들은 나보다 더 바쁘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장난감도 가지고 놀아야 하고, 좋아하는 책도 읽어야 하고, 좋아하는 엄마·아빠와 이야기도 나눠야 하고, 자전거를 타거나 산책도 해야 하고, 좋아하는 동생·누나와 놀아야 한다.

숙제가 많은 날, 큰아이는 자면서도 숙제 걱정에 아침 일찍 자신을 깨워달라고 내게 요청한다.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잘 버무려 채워야 하는 아이에게 4시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도 못다 하고 잠들 때도 있으니 이쯤 되면 내가 좀 게을러도 애들은 바쁘게 잘 산다 싶다.
 

▲ 긴긴 뉴잉글랜드의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아이와 땅을 갈고 모종을 심으며 텃밭을 가꿨다. 여름내내 깻잎을 따먹을 생각에 행복했다. ⓒ 김보민


온 세상이 배움터니까

양육자로서 배움을 바라보는 나의 생각을 더 풀어보면, 나는 아이들이 우리 곁에 펼쳐진 자연에서 세상을 배우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오감과 감각을 모두 열어두고 살면, 일상 곳곳에서 느끼고 배우고 채울 수 있는 것이 무궁무진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우리가 표현할 수도 없을 만큼 다양한 소리가 있고, 다채롭고 경이로운 자연의 색이 있다.  만나본 적 없는 곤충과 새와 동물들이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을 아이들이 느끼면서 살았으면 한다.

학원에 가서 피아노를 배우기 전에 음악을 하는 내 친구의 작업실을 구경하고,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을 온 식구가 손꼽아 기다린 뒤 공연에 가서 내내 감동하며 즐기고, 저녁마다 각자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음악을 틀어놓고 흥겹게 춤을 추고, 노래를 따라 부른다.

아이들은 마당 한가득 분필로 그림을 그리고, 비가 쏟아져 말끔히 지워진 마당을 보며 다음 그림을 상상한다. 밀가루 반죽으로 좋아하는 동물을 만들어 색을 칠하고, 신문지와 잡지를 오려 붙이며 의도하지 않은 색이 연출되는 작품을 만들어 본다.

정형화되지 않기에 끝없이 자유로울 수 있고, 예상하지 않은 결과에 더없이 즐거워하는 것, 이게 우리에게 필요한 예술이 아닐까.

이런 생활밀착형 예술이 아이들 일상에 넘쳐나길 기대했다. 아이들은 사랑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카드를 수시로 써서 나의 배게 옆에 몰래 숨겨 두기도 하고, 내 얼굴을 담은 작은 종이를 부엌에 붙여주기도 한다. 아이들의 크고 작은 작품이 모여 우리 집은 살아 숨 쉬는 예술가의 집이 되었다.
 

▲ 둘째가 그린 하트 가족, 커다란 하트가 아빠인데 하트 아빠의 겨드랑이 털을 극적으로 묘사한 점이 가장 인상적이다. ⓒ 김보민


산에 버려진 자동차는 아이 상상력을 자극하는 작은 씨앗이었다. 자기 머릿속 앙증맞은 씨앗 하나를 요리조리 들여다보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이, 아이는 창작의 즐거움을 더 크게 누렸을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보고, 상상하고, 손에 잡히는 모습으로 만들어내는 작업을 자신의 의지대로 하는 아이를 보며 다시금 양육자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 돌아보게 된다.

나는 내가 아이보다 조금 더 살았다고 더 많이 아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는 어른인 내게도 낯설고 어려운 미지의 영역이고, 예측 또한 불가능한 영역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가고 있는 아이의 감각을 믿는 것, 믿어주는 것이 양육자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은 아닐까?

그리하여 나는 내가 조금 더 게을러도 되겠다고 생각한다. 아이를 200% 믿는 나의 마음과 아이를 향한 격려를 커다란 풍선에 담아, 그것이 아이 어깨 조금 높은 곳에서 둥둥 떠다니며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도록 밀어 보내면서 말이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브런치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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