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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 진료' 너머, 삶에 밀착된 지역의료를 꿈꿉니다

[서평] <이야기는 진료실에서 끝나지 않는다>... 환자와 의사 모두에게 최선은 뭘까

등록|2024.05.27 11:51 수정|2024.05.27 15:13
"이 시골의사가 이상주의자는 아니다. 불평등과 슬픔으로 가득한 세상에 거창한 만병통치약이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도 의사는 지역 사회를 이해하고 환자를 이해했을 때, 그리고 힘닿는 한 이 둘을 이어주었을 때 찬란한 빛의 순간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35p) 

'지역의료'가 이보다 눈길을 받은 적이 있었던가. 지난 2월부터 시작된 의료정책 갈등으로 사회의 관심이 모인 덕에 여러 토의와 제언이 정부로부터, 시민사회로부터, 전문가인 의사들로부터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전공의들 사이에서는 정부의 '2000명 의대증원'의 그림자에 가려 '지역의료'에 대한 논의가 부진했다. 대한전공의협회가 2월 20일 사직의 포문을 열며 내건 7대 요구 조건에서도 필수의료는 담겼지만, 지역의료에 관한 내용은 놓친 바 있다.
 

▲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 회의록 등 의대 증원의 근거자료를 두고 정부와 의료계가 연일 공방을 이어가는 가운데 지난 13일 서울 시내 한 대형병원 로비에서 한 환자가 대기하고 있다. ⓒ 연합뉴스


여기에는 '지역의료'를 접한 경험이 드문 환경도 한몫을 한다. 한국 의사의 수련 과정에서 1차의료 실습과 참관은 흔하지 않다. 보건소와 보건지소에 배치되는 37개월 근무의 '공중보건의' 과정을 제외하면, 통상 의사들은 구조적으로 산골짜기와 섬마을에서 유리된 도시의 번쩍이는 유리빌딩 속에서 살아가기 쉽다.

지역의료의 어제와 오늘

한국의 지역의료는 이미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있지 않다. 환자들은 의원-병원-대학병원을 가리지 않고 진료를 받으며, 일반의-과별 전문의의 경계 또한 흐려졌다. 예컨대 무릎 통증은 대학병원 '정형외과'에서, 천식은 '호흡기내과'에서, 당뇨는 동네 '내과의원'에서, 팔꿈치 건선은 '피부과'에서 진료받는 식이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동안, 이렇게 여기저기에서 처방받은 약이 어느새 한 주먹이 된 환자를 흔치 않게 보았다. 간이 나빠지거나 신장이 나빠지고, 신체가 빠르게 기능을 잃는 경우도 있다. 이들에게 의료 이용을 전인적으로 관리해주고, 중복된 약을 제한하고, 생활습관 개선과 건강증진을 돕는 '환자를 잘 알고, 환자도 잘 아는 의사'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지금의 제도 하에서는 어떠한 제한 없이 누구나 병원을 '선택'하게 되면서, 지역의 환자들은 가벼운 당뇨병, 고혈압으로도 수백 km 거리의 서울 대형병원을 찾고는 한다. 지역의료는 동료나 전문의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대학병원과도 경쟁관계에 놓여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국가적으로 의료 자원의 심각한 낭비인 동시에, 환자 본인의 건강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시민들도 지역의료의 문제를 체감하고 있다. 최근 서울대교수비대위, 신현영·안철수 국회의원, 이주영 당선인, 녹색소비자연대·한국소비자연맹이 주최한 '국민·환자들이 원하는 개선된 우리나라 의료시스템' 공모글을 참고하면, 국민들은 '대학병원이 최고라는 인식' '질문하고 원하는 답을 듣기에는 부족한 시간' '여러 의료기관을 거치며 중복된 검사' '아플 때마다 새로운 병원을 찾아다녀야 하는 수고' '아픈 부모를 서울에 모시지 못하면 불효자가 되는 실태' 등을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공청회는 지난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에서 진행됐다).

국민이 제안한 대안 또한 인상깊었다. '주치의 등록을 유도' '전담 의료기관 제공과 정부 지원' '건강 증진에서 의사의 역할 강화' '지방 의료 시설에 정부 투자' 등과 같은 주장도 있었고, '건보료 추가 부담', '감기 등 경증질환의 본인부담금 인상', '실손보험의 재평가', '지방병원 연계' 등의 제안도 나왔다. 시민들이 스스로 불편함과 추가 지출을 감수하고서라도 의료 제도를 지켜내겠다는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전문적이고 고도화된 대학병원의 의료만큼이나, 사람들 삶에 밀착된 지역의료는 분명히 의미가 있다. 이것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건강 향상을 위해서도, 폭증하는 의료비의 절감을 위해서도, 소외되는 지방의 소멸을 막기 위해서도 가야 할 방향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보내온, 동화같지만 동화같지 않은 이야기

"만약 환자와 의사 간의 돈독한 관계가 무엇인지 느껴 본 적 없다면 그걸 소중하게 여기거나 지키려고 있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거래로서 의료에 대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282p) 

그렇다면 우리의 '지역의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2022년 출간되고, 2024년 5월 번역되어 국내에 소개된 '폴리 몰랜드'의 <이야기는 진료실에서 끝나지 않는다>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이야기는 진료실에서 끝나지 않는다> ⓒ 바다출판사


이 책은 영국 산골짜기 진료소의 의사가 마을과 관계를 맺는 방식과 사례들, 지역의 의료 변천사, 코로나와 같은 대형 재난 상황에 대한 극복의 과정을 담담히 써 내려간다. 고성의 돌담과 골짜기의 안개, 노인들의 주름살이나 사춘기의 성 정체성 상담 등 이야기마다의 풍성한 묘사는 이 책이 단지 하나의 '사례 보고서'나 '교과서'가 아니라 지역사회와 의사의 '삶'에 관한 이야기임을 보여준다.

이것이 영국식 의료체계에 대한 찬양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먼저 일러두고 싶다. 되려 주치의제도가 의도한 것에서 멀어지는 영국의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에 대한 자조적인 반성에 가깝다. 작가는 한 산골의 이상을 보여줌과 동시에, 환자들의 의사에 대한 불신, 무너져가는 일차의료체계, 관료제와 의료계의 부조리, 진료 경험의 파편화, 모자란 예산과 의료자원에 대해서도 짚는다.

외국을 본받자는 철지난 사대주의적 주장을 하고싶지는 않다. 되려 그들의 경험과 시행착오를 통해 우리는 우리대로  '무엇이 환자와 의사를 위해 최선일지' 치열하게 고민해 보자는 것이다. 이 책이 그 여정의 첫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라 믿는다.

"의술이라는 것이 앉아서 약을 나눠주거나 배를 가르고 다시 꿰매는 일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가르치셨어요. 그야말로 예술이죠. 인간이라는 존재로 사는 것에 대해 훨씬 더 폭넓은 관념을 요구하는 기술입니다. 벽에 학위증을 걸어놓고 알약이나 나눠주는 일이 아닙니다. (…) 진료소에서는 사람들과 마주 앉아 이야기 할 시간이 있었어요. 이것이 바로 시골 의원의 본질에 속합니다.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점 말이에요." (94p)

지역의료의 개선은 과학적으로도 매우 효과적이다. 2021년 '영국일반의학저널'에 게재된 논문에 따르면, 의료 지속성이 사망률 감소로 이어진다는 내용이 있다. 같은 의사를 1년 봤을 때보다, 15년 이상 보았을 때 환자의 사망률은 25% 감소한다는 것. 또한 응급의료나 중환자의료에 이르기 전에 미리 환자의 건강을 관리하고, 이상 신호를 앞서 포착하면 진료비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지역의료의 수가를 일시적으로 올리거나, 의사 숫자를 늘려 지방으로 '낙수'시키겠다는 발상은 단기적으로는 효과를 볼지도 모르지만,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우리가 나아가야할 방향은 '의사가 환자의 삶의 파편을 이어붙여 전문가적 시점에서 관찰할 충분한 시간과 기회를 주는 방식'이어야 하고, '환자의 인생 궤적 속에 의사가 깊숙이 개입하고 의지할 수 있게 돕는 구조'여야만 한다.

환자의 피상적인 상태가 아니라, 본질적인 '건강'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한 사람의 이야기는 진료실에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행위마다 단편적으로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이 아니라, 환자의 건강 개선, 경험 향상, 사회적 연대, 지속가능성 등을 포괄하는 '가치'를 높이는 뱡향에 '우대'가 제공되어야 한다.

획일적으로 그런 새로운 도전을 강요하자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단숨에 지금의 제도를 뒤엎자는 급진적인 주장은 더더욱 아니다. 지구 건너편의 동화 같지만 동화가 아닌 이야기를 함께 나누어 읽고, 한국 지역의료의 방향성을 함께 논의하자는 것이다.

시민과 의사들이 함께 만들어 갈 지역의료의 내일

"의료 전문가인 동시에 긴 세월에 걸쳐 사람들의 사연과 갖은 고생을 목도하고 거기에 공감해 주는 사람으로 사는 일은 어딘가 매력적이었다." (77p)

의사에게도 이러한 변화는 득이 된다. 책에서는 의사를 '모든 책꽂이에 매우 특별한 이야기들이 꽂혀 있는 아주 멋진 도서관을 뒤지는 사람'이라 말한다. 환자를 질병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책을 단지 종이와 잉크로 보는 태도'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흩어진 A4를 정신없이 수습하는 사무원보다는, 작은 도서관의 사서로 사는 것이 내게는 훨씬 견인력이 있다.

지금처럼 인간성이 사라진 채 파편화된 3분 진료실, 신뢰가 사라진 환자-의사 관계 속에 머무르고 싶으신 분들이 있다면 그렇게 하셔도 되겠다. 그러나 여기서 탈출할 '구명정'이 분명 있는데, 더 망설일 이유가 있는가.

시민분들께도 여쭙고 싶다. 진정 지금의 공장식 치료에 만족하시는가? 아플 때마다 우왕좌왕하며 낯선 의사를 찾아다니실텐가? 층수만 높은 병원들을 돌아다니다 시간을 허비하며 단면적인 진료만 받을 것인가?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사회적으로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질병이 아니라 진정 사람으로 대우받고 치료받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시민과 의사들이 함께 지역의료를 개선하는 길로 나서야만 한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류옥하다씨는 지난 2월 16일 가톨릭중앙의료원 인턴을 사직한 전공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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