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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스윗 스팟은 언제인가요?"

[안지훈의 뮤지컬 읽기] 피츠제럴드 소설 원작의 <벤자민 버튼>

등록|2024.05.27 11:23 수정|2024.05.27 11:23
영화로도 제작되어 널리 알려진,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의 단편소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영제는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으로, 이를 직역한 '벤자민 버튼의 기이한 사건'으로도 번역 출간되었다)가 뮤지컬로 재탄생 되었다.

11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개막한 뮤지컬 <벤자민 버튼>은 특히 조광화 연출, 이나오 작곡가 등 국내 창작진이 모여 만든 창작 뮤지컬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조광화 연출에 따르면 2013년부터 작품 개발이 이루어졌다고 하니 시도부터 초연까지 10년 이상의 세월이 걸린 셈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벤자민 버튼'은 늙은 몸으로 태어나 점점 젊어진다. 시간을 거꾸로 사는 셈이다. 하지만 늙은 노인부터 갓난아기까지, 한 명의 배우가 무대에서 연기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뮤지컬 <벤자민 버튼>은 꼭두각시 인형인 '퍼펫(puppet)'의 힘을 빌렸다. 벤자민을 연기하는 배우와 퍼펫이 힘을 합쳐 시간을 거꾸로 사는 벤자민을 무대에 구현하는 것이다.

<벤자민 버튼>은 그룹 동방신기 멤버 최강창민, 심창민의 뮤지컬 데뷔작으로 알려지며 일찍이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심창민이 뮤지컬배우 김재범, 김성식과 함께 주인공 '벤자민'을 연기하며, 벤자민이 사랑하는 여인 '블루'는 김소향과 박은미, 이아름솔이 번갈아 연기한다. 이어 벤자민을 돌보는 재즈클럽 주인 '마마' 역에는 하은섬과 김지선이 캐스팅되었으며, 블루의 매니저인 '제리'에는 민재완과 박광선이 분한다. 이외에도 강은일, 송창근, 구백산, 이승현, 신채림, 박국선이 작품에 참여한다. <벤자민 버튼>은 오는 6월 30일까지 공연된다.
 

▲ 뮤지컬 <벤자민 버튼> 공연사진 ⓒ EMK뮤지컬컴퍼니


당신의 스윗 스팟은 언제인가요?

뮤지컬 <벤자민 버튼>을 관통하는 주제는 '스윗 스팟(sweet spot)'이다. 야구를 좋아하는 필자에게 스윗 스팟이란 단어는 익숙하다. 배트에 공이 맞았을 때 이상적인 타구가 나올 수 있는 최적점을 의미하는 단어인데, 이번 작품에서는 조금 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인생에서 가장 화려하고 빛나는 순간을 두고 스윗 스팟이라 명명한 것.

남들과는 다른 시간의 흐름을 경험하는 벤자민은 그로 인해 좌절하기도 한다. 그런 벤자민에게 마마는 인생에는 찬란한 순간, 즉 스윗 스팟이 반드시 찾아온다고 말해준다(넘버 'SWEET SPOT'). 스윗 스팟의 존재를 알게 된 벤자민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한 명 있었는데, 바로 재즈클럽의 여가수 블루다. 어느덧 자신의 나이에 맞는 모습을 하게 된 벤자민은 블루를 만나 스윗 스팟을 꿈꾼다.

하지만 행복한 순간도 잠시뿐, 블루는 자의가 아닌 타의로 벤자민을 떠나게 된다. 돈을 벌 목적으로 자신을 이용하는 매니저 제리에 의해서다. 이후 세월이 지나 벤자민과 블루는 다시 만나고, 벤자민은 블루와 다시 사랑을 나누길 원하지만 블루는 두려워한다. 벤자민은 점점 어려지는 데 반해 자신은 늙어가니, 사랑이 영원할 수 없다는 불안 때문이다. 블루는 눈물을 삼키며 사랑을 외면하곤 다시 떠난다. 스윗 스팟을 꿈꾸고 누리고 좌절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그러곤 벤자민은 제2차 세계대전에 징병된다. 그리고 전쟁터에서 입대 전 3일 동안 사랑을 나눴다고 기뻐하는 군인을 마주한다. 그 군인은 짧지만 강렬했던 스윗 스팟을 두고두고 기억하며 행복해했다. 이때 벤자민은 깨닫는다. 스윗 스팟을 누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찬란했던 순간을 기억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어쩌면 스윗 스팟을 기억하는 그 순간마저도 스윗 스팟일 수 있다는 것을.

"스윗 스팟은 어느 한 때 한 순간이 아냐. 스윗 스팟이 끝날지라도 이미 내 마음에 있어."
- 넘버 'Before and After' 중에서.


너무 짧은 스윗 스팟에 실망하고, 뜻대로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아 좌절하던 벤자민은 달라진다. 벤자민은 다시 블루를 찾아가 사랑을 고백하고, 벤자민이 자신의 주름마저 사랑해줄 수 있다는 진정성을 느낀 블루는 영원한 사랑을 다짐한다. 블루가 치매에 걸려 자신을 3분밖에 알아보지 못했는데도, 벤자민은 그 3분을 기억하며 행복해한다. 그렇게 벤자민과 블루의 스윗 스팟은 죽음이 이들을 데려가는 순간까지 이어진다.

<벤자민 버튼>은 관객에게 각자의 스윗 스팟이 언제였는지 생각해보게 하는 힘을 지닌 듯하다. 이 글을 읽고, 또는 뮤지컬을 보고 한번 생각해보시길 추천드린다. 그리고 마음껏 행복해하시길. 여러분의 스윗 스팟은 언제인가? 스윗 스팟을 꿈꾸고 계시는가? 혹은 지금 스윗 스팟을 맞이하셨는가?
 

▲ 뮤지컬 <벤자민 버튼> 공연사진 ⓒ EMK뮤지컬컴퍼니


'잃어버린 세대'를 다시 생각하다

공연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그리고 다음날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홀짝이며 작품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이때 원작을 쓴 소설가 피츠제럴드가 떠올랐다. 그가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를 대표하는 작가라는 점도 함께 상기해보았다. 왠지 피츠제럴드가 속한 잃어버린 세대와 뮤지컬 <벤자민 버튼> 사이에 의미가 통하는 지점이 있을 것 같았다.

잃어버린 세대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에 환멸을 느낀 젊은 지식인과 예술가들은 지칭하는 용어로, 피츠제럴드를 포함해 어니스트 헤밍웨이나 윌리엄 포크너가 잃어버린 세대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이 세대는 물질적으론 풍요로워졌지만 정신적 빈곤 상태에선 벗어나지 못한 채 방황하는 사회를 보며 통탄했고, 돈 앞에 좌절했으며, 끊임없이 불안해했다.

필자는 <벤자민 버튼> 속 블루에게서 잃어버린 세대의 모습이 많이 느껴졌다. 평범하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 내내 불안을 겪고, 돈을 쫓는 매니저 제리의 지나친 구속으로 인해 불안은 지속된다. 블루를 둘러싼 환경의 불안정함은 당대 사회의 혼돈을 표현하는 듯하고, 제리는 그 사회에 만연했던 물질주의를 대변하는 인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한 지식인의 말처럼, 이성으로는 비관해도 의지로 낙관해야 하는 법. 스윗 스팟의 존재를 알려주는 마마와 진정한 스윗 스팟을 깨달은 벤자민은 방황하는 이들에게 '낙관할 수 있는 의지'가 되어준다. 이는 하나의 지향이 되고, 블루는 벤자민 덕분에 방황을 멈춘다. 어쩌면 <벤자민 버튼>에는 잃어버린 세대가 자신들의 방황을 멈춰줄 희망을 향한 갈구가 담겨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관점에서 작품을 바라본다면, 다시 한 번 방황하고 있는 현대인들은 또 하나의 메시지를 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충분히 위로받으시길, 희망을 발견하시길, 그렇게 방황을 멈추시길.
덧붙이는 글 정승호 무대 디자이너가 <벤자민 버튼>을 끝으로 무대 디자인에서 은퇴합니다. 정승호 디자이너는 약 30년간 무대미술 분야에서 활동하며 뮤지컬 <레베카>, <베르테르>, <엑스칼리버> 등의 무대를 만든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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