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와 화합' 만델라 정신을 잊어버린 남아공의 현실
[TV 리뷰] tvN <벌거벗은 세계사>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는 아프리카어로 분리 혹은 격리를 뜻하며, 오늘날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Republic of South Africa)의 악명 높은 '인종차별 정책'을 뜻하는 용어로 널리 알려졌다. 본래 남아공은 천혜의 자연환경과 경제적 조건을 갖추며 더 풍요로운 국가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고질적인 흑백간의 인종갈등과 빈부격차, 정부의 거듭된 부정부패로 인하여, 오늘날에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현실판 범죄도시'라는 오명을 쓰게 됐다.
5월 28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153회에서는 '남아공은 어떻게 무법지대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나'편을 통하여 남아공의 역사를 조명했다. 황규득 한국외대 아프리카 학부 담당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남아프리카 지역이 세계사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유럽의 대항해시대(Age of Discovery)부터였다. 1488년 포르투갈인들이 오늘날의 남아공 케이프타운 남쪽 지점에 상륙했고, 이곳을 아프리카 최남단이라고 착각하여 희망봉(喜望峰, Cape of Good Hope)이라고 명명했다. 희망봉은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로 이어지는 항로를 연결하는 중요한 관문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유럽인들에게 희망봉의 발견은, 정작 아프리카인들에게는 절망의 시작이었다. 17세기 들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 소속의 네덜란드 백인들이 진출하여 처음으로 이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보어인(Boer.네덜란드어로 농부)으로 불리며 '아프리카에 정착한 네덜란드인'들로 훗날 남아공의 주류 백인들로 이어지는 뿌리가 됐다. 보어인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세력이 커지자 주변의 원주민 부족들을 정복하고 그들을 노예로 삼으며 가혹한 착취와 수탈을 일삼았다.
1795년에는 영국이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케이프타운을 점령하고 영국령 케이프 식민지를 선포한다. 이로 인하여 또다시 애꿎은 불똥이 튄 것은 원주민들이었다. 이 지역에 정착해있던 네덜란드계 보어인들은 영국 정부의 간섭을 피하여 케이프 식민지를 떠나 아프리카 북동쪽으로 이주했고, 수많은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영역을 차지하여 자신만의 자치령들을 건설한다.
18세기 후반 두 차례의 보어전쟁(Boer Wars)을 거쳐 영국과 네덜란드계 백인들의 패권 경쟁은 최종적인 영국의 승리로 끝난다. 남아프리카 일대를 통합한 영국은 보어인들과 타협하여 오늘날 남아공의 전신이 되는 남아프리카 연방(Union of South Africa)이 출범하게 된다.
하지만 영국이 패권을 차지했다고 해도 인구수에서 압도적이었던 보어인들을 장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영국이 보어인들을 다독이기 위하여 시행한 우대 정책 중 하나가 바로 '아파르트헤이트'의 시초다.
백인들의 이기심으로 시작된 아파르트헤이트
아파르트헤이트의 핵심은 백인의 특권을 보장하고 유색인종을 차별하는 극단적인 인종분리정책이다. 통행법에 따라 흑인들은 백인들의 지역에 접근할 수 없었고 투표권도 얻지 못했다. 남아공 전체인구의 21%에 불과하던 백인들이 모든 이권을 독차지하고 68%가 넘는 흑인들은 철저히 소외당했다. 백인들의 이기심으로 시작된 아파르트헤이트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남아공의 최대 사회 문제인 흑백갈등의 원흉으로 자리잡게 된다.
1934년 남아프리카 연방의 자치가 허용되면서 영국의 영향력이 줄어들었고, 1948년 보어인들로 구성된 국민당은 총선에서 승리하여 집권당이 된다. 국민당은 더욱 강도 높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추진하여 흑인 전체 인구의 3분의 2를 원래 살던 지역에서 강제로 쫓아내 반투스탄으로 이주시키는 '반투 자치법'을 시행한다.
백인 정권은 자치 보장을 명분으로 내세워 흑인들을 이주시켰지만, 실제로는 흑인을 외국인 노동자로 취급하며 노동력을 착취했고, 정작 연방 국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의료과 교육 등 최소한의 기본권도 보장하지 않았다. 국민으로서의 모든 혜택을 박탈 당한 흑인들의 반투스탄은 가난한 빈민가로 전락했다. 그나마 강제 이주를 피하여 도시 인근에 남은 흑인들도 백인들에 밀려 일자리를 구하지못하고 극빈층으로 전락했다.
또한 남아공의 버스, 구급차, 화장실, 도서관, 공원 등 모든 시설은 백인과 흑인 전용을 엄격하게 구분하며 차별을 시행했다. 흑인과 백인간의 결혼, 연애, 성관계 등도 '백인의 피를 더럽힌다'는 이유로 엄격히 금지되었고, 흑백 혼혈로 태어난 아이는 범죄의 산물로 취급받을 정도였다.
아이러니하게도 흑인들이 차별로 고통받는 상황에서도 남아프리카 연방의 경제는 호황을 달렸다. 남아프리카의 풍부한 광물자원을 눈여겨본 미국과 서방 국가들의 적극적인 투자 덕분이었다. 1960년대 연방의 경제성장률은 최고치를 연이어 경신했고 매년 25만 명이 넘는 백인 이민자들이 기회를 찾아 남아프리카로 이주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하지만 백인들의 부와 권위가 높아질수록 흑백간의 빈부격차는 더욱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 들어 남아프리카에 '흑인해방운동'의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면서, 넬슨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등장한다. 1918년 남아프리카의 트란스케이 움타타 지역에서 코사족 부족장의 아들로 태어난 만델라는, 젊은 시절 남아프리카 연방 최초로 흑인 법률사무소를 개설하며 변호사로 활동했을 정도의 엘리트였다.
이미 젊은 시절부터 남아프리카 연방의 뿌리깊은 인종차별과 흑인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가져왔던 만델라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바꾼 사건은 '샤프빌 학살'이었다. 1960년 3월 21일, 흑인 차별에 저항하며 평화 시위를 벌이던 흑인 시위대에게 백인 경찰들은 기관총을 발포하고 무자비한 폭력을 통하여 진압에 나섰다. 이 사건으로 10명의 어린이를 포함하여 69명의 사망자와 18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백인 경찰이 이러한 학살극을 태연히 벌일 수 있었던 것은 흑인들 대부분이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하에서 시민으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사망자들의 시신 대부분은 등에 총탄을 맞은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이는 저항하지 않고 비무장으로 도망가는 시민들에게 총기를 난사했다는 증거였다.
1960년대 들어 세계적으로 인권의식이 높아지면서 UN(국제연합)과 아파르트헤이트의 원조인 영국에서마저도 비판의 목소리가 강해졌다. 하지만 연방의 백인정권은 이러한 국제사회의 요구를 무시했고 1961년에는 영국에서 독립하여 지금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수립하기에 이른다.
만델라는 샤프빌 학살사건 이후 '움콘토 웨 시즈웨(아프리카어로 민족의 창)'라는 저항단체를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무장투쟁에 앞장섰다. 1964년 46세의 나이에 체포된 만델라는 국가반역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남아공에서 당시 가장 악명 높은 감옥이었던 로벤섬에 수감된다. 당시 만델라의 수감번호로 유명해진 '46664'라는 숫자는, 1964년도에 수감된 466번째 죄수라는 의미로 훗날 만델라를 대표하는 상징이 된다.
만델라는 옥중에서도 편지를 보내어 전 세계 주요인사들에게 아파르트헤이트의 부당함을 호소했다. 아파르트헤이트 저항과 흑인해방의 상징이 된 만델라의 명성은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고, 1980년에는 서방의 한 언론인으로부터 '만델라를 해방하라(Free Mandela)'는 슬로건과 캠페인까지 탄생하게 된다.
만델라가 수감된 동안에도 흑인들의 아파르트헤이트 저항운동과 만델라 석방시위는 더욱 거세졌다. 당시 피터르 빌럼 보타 당시 남아공 대통령은 만델라에게 석방을 조건으로 흑인 시위를 멈추게 할 것을 제안했지만, 만델라는 "아파르트헤이트 철폐가 우선이다. 우리 모두의 자유가 아니라면 어떠한 조건도 받지 않겠다. 나의 자유와 남아공 흑인의 자유가 분리될 수는 없다"고 답하며 타협을 거부했다.
1988년에는 감옥에서 70세를 맞이한 만델라의 생일을 기념하여 그의 석방을 기원하는 대규모 콘서트가 영국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개최된다. 이 자리에는 리처드 기어, 스티비 원더, 휘트니 휴스턴, 에릭 클랩튼 등 당대의 월드스타 83인이 출연하여 만델라의 석방을 지지했으며, 콘서트는 영국 BBC를 통하여 11시간 동안 무려 67개국에 생중계 될만큼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끝까지 초심을 잃지 않은 만델라
1990년 2월 12일, 남아공과 전 세계인들의 응원속에 만델라는 무려 9376일(약 27년 6개월) 만에 마침내 감옥에서 석방되어 자유의 몸이 된다. 돌아온 만델라는 무장투쟁 대신 흑인들의 전폭적인 신뢰를 등에 업고 평화적인 정치 활동을 통하여 아파르트헤이트 철폐에 앞장섰다.
흑인을 포함한 모든 인종을 대표하는 '민주 남아공 공화국 회의'가 열리고 남아공 최초의 흑백연합정권이 탄생한다. 연합정부는 1993년 헌법 개정을 통하여 최초로 흑인들의 투표권을 인정한다. 그해 만델라는 남아공의 흑인 인권과 아파르트헤이트 철폐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된다.
1994년 4월, 남아공에서 흑인들이 참여한 최초의 총선이 열리게 되고,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만델라는 남아공 최초의 흑인대통령에 당선되는 쾌거를 이룬다. 평화적인 방식으로 정권교체와 인종차별 철폐를 이뤄낸 남아공의 사례는 아프리카 국가들의 모범이 됐다.
만델라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공식적으로 아파르트헤이트의 철폐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또한 남아공을 '무지개 국가'로 선언하며 국기 변경에 나섰고, 검은 색을 비롯한 여러 가지 색깔의 조화를 통하여 인종차별에서 벗어난 다양한 색깔과 사상을 존중하겠다는 의미를 담았다.
특히 만델라가 후대까지 높은 평가를 받는 부분은 '관용'이었다. 아프리카의 수많은 지도자들이 정권을 잡은 후에는 독재자로 변질되거나, 권력을 남용하여 타락하는 경우가 많았다면, 만델라는 끝까지 초심을 잃지 않았다. 남아공의 백인들은 흑인 대통령의 등장으로 복수를 우려했지만, 만델라는 '용서와 화합'을 표방하며 백인들을 배척하거나 보복하려고 하지 않았고, 오히려 적극적인 흑백화합정책을 추구했다.
만델라의 흑백화합을 대표하는 정책 중 하나가 럭비월드컵 개최였다. 남아공에서 럭비는 백인들만 배울 수 있는 고급 스포츠였고, 남아공 흑인들은 럭비대표팀이 국제대회에 출전하면 오히려 상대팀을 응원할 정도였다. 하지만 스포츠를 통하여 흑백화합을 추구했던 만델라는 1995년 럭비월드컵을 유치했고, 남아공 럭비대표팀은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히던 뉴질랜드를 꺾고 우승을 차지하는 이변을 일으킨다.
특히 놀랍게도 만델라 대통령이 남아공 흑인들에게는 증오의 대상으로 여겨지던 럭비대표팀의 녹색 유니폼을 입고 나와서 백인 주장에게 직접 우승트로피를 건네는 장면은, 큰 화제가 됐다. 이는 남아공의 화합과 평화를 상징하는 메시지를 전달하여 세계인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남아공은 만델라 정권(1994-1999)하에서 국제사회에서의 지위를 회복했고 서방 국가들과도 활발한 외교를 펼쳤다. 만델라 퇴임 직후인 2000년에는 남아공의 경제성장률은 무려 4%나 상승했다. 남아공의 국부로 추앙받는 만델라는 퇴임 후에도 만인의 존경을 받다가 평화롭게 여성을 보내다가 2013년 95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하지만 만델라가 그토록 꿈꿨던 남아공의 진정한 평화와 화합은 아직 이루어지지 못했다. 아파르트헤이트가 철페된 지 3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후유증은 남아공 사회를 괴롭히고 있다.
남아공은 극심한 빈부격차에 시달리고 있다. 2023년 4분기 기준 남아공의 실업자는 물 789만 5천 명에 육박했으며 이들 대부분은 흑인이었다. 남아공 전체인구에서 백인의 비중은 8%, 흑인은 무려 82%에 이르지만, 흑인은 경제성장의 혜택을 받지 못하여 남아공은 '전 세계 소득 불평등 1위' 국가라는 오명을 안아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이후 남아공의 집권세력이 된 흑인 정권들의 적극적인 흑인우대정책이 '제2의 아파르트헤이트'라는 모순을 초래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만델라 이후 현 시릴 라마포사 대통령까지 무려 5명 연속으로 흑인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남아공 내 흑인들의 영향력이 높아져지만, 문제는 그 혜택이 소수의 흑인 기득권자들에게 집중되면서 백인에서 역할만 바뀐 또다른 특권층을 양산했다는데 있다.
남아공의 네 번째 흑인대통령이었던 제이콥 주마(재임 2009-2018년)는 '만델라의 흑화 버전'으로 평가받으며 '무능한 흑인 정권'의 상징이 된 인물이다. 그는 한때는 만델라처럼 흑인 인권 운동가로 활동하고 수감생활을 하면서 명성을 얻었지만, 막상 정권을 잡은 후 만델라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으며 부패와 무능함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주마는 백인 차별 정책을 시행하고 재산을 몰수하며 빈민층 흑인들을 대상으로 한 포퓰리즘으로 인기를 끌었다. 또한 주마 정권은 극심한 정경유착과 부정부패로 무수한 비리를 저질렀다. 주마 개인도 초등학교 5학년이 학력의 전부였고, 대통령 재임 이전부터 뇌물수수 등 인성적인 문제가 많았던 인물이다. 이처럼 만델라 이후 흑인정권들의 연이은 부패와 무능, 이로 인한 빈부격차의 심화는 남아공 사회에 아파르트헤이트 시대 못지 않은 짙은 어둠을 드리우게 된다.
또한 아파르트헤이트가 낳은 남아공의 또다른 문제 중 하나는 '치안 악화'다. 흑인우대 정책으로 공권력도 백인에서 흑인 중심으로 이동했지만, 오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의 영향 때문에 교육수준과 전문성이 낮았던 흑인 경찰로의 갑작스러운 변화는, 오히려 공권력의 질적 저하를 초래했다.
현재 남아공은 베네수엘라와 파푸아뉴기니에 이어 전 세계에서 '범죄지수'와 '강간 신고율'이 가장 높은 국가 3위에 각각 이름을 올리는 오명을 안았다. 가난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남아공의 많은 청년들은 갱단에 가입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하여 마약, 강도, 성폭행 등 남아공의 강력범죄율은 크게 높아졌다.
백주대낮에 길거리에서 사람을 폭행하고 납치하여 재물을 빼앗는 사건도 빈번하게 벌어지는 곳이 남아공의 현실이다. 불안해진 시민들은 이에 대항하기 위한 독자적인 무장을 갖춘 자경단이나 민간보안업체가 성행하면서 공권력은 더욱 약화되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았다는 단순한 사실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가 우리의 삶의 의미를 결정할 것이다." 남아공의 영원한 국부 넬슨 만델라가 남긴 격언은, 오늘날의 남아공이나 우리 모두에게 깊은 울림을 전한다.
천혜의 자연환경과 풍부한 천연자원을 갖춘 남아공은, 그 높은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의 그릇된 편견과 욕심이 남긴 후유증으로 인하여 오늘날까지 많은 아픔을 겪고 있다. 만델라가 천국에서 자신의 조국이 처한 현실을 목격했다면 과연 어떤 이야기를 했을까.
5월 28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153회에서는 '남아공은 어떻게 무법지대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나'편을 통하여 남아공의 역사를 조명했다. 황규득 한국외대 아프리카 학부 담당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하지만 유럽인들에게 희망봉의 발견은, 정작 아프리카인들에게는 절망의 시작이었다. 17세기 들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 소속의 네덜란드 백인들이 진출하여 처음으로 이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보어인(Boer.네덜란드어로 농부)으로 불리며 '아프리카에 정착한 네덜란드인'들로 훗날 남아공의 주류 백인들로 이어지는 뿌리가 됐다. 보어인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세력이 커지자 주변의 원주민 부족들을 정복하고 그들을 노예로 삼으며 가혹한 착취와 수탈을 일삼았다.
1795년에는 영국이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케이프타운을 점령하고 영국령 케이프 식민지를 선포한다. 이로 인하여 또다시 애꿎은 불똥이 튄 것은 원주민들이었다. 이 지역에 정착해있던 네덜란드계 보어인들은 영국 정부의 간섭을 피하여 케이프 식민지를 떠나 아프리카 북동쪽으로 이주했고, 수많은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영역을 차지하여 자신만의 자치령들을 건설한다.
18세기 후반 두 차례의 보어전쟁(Boer Wars)을 거쳐 영국과 네덜란드계 백인들의 패권 경쟁은 최종적인 영국의 승리로 끝난다. 남아프리카 일대를 통합한 영국은 보어인들과 타협하여 오늘날 남아공의 전신이 되는 남아프리카 연방(Union of South Africa)이 출범하게 된다.
하지만 영국이 패권을 차지했다고 해도 인구수에서 압도적이었던 보어인들을 장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영국이 보어인들을 다독이기 위하여 시행한 우대 정책 중 하나가 바로 '아파르트헤이트'의 시초다.
백인들의 이기심으로 시작된 아파르트헤이트
아파르트헤이트의 핵심은 백인의 특권을 보장하고 유색인종을 차별하는 극단적인 인종분리정책이다. 통행법에 따라 흑인들은 백인들의 지역에 접근할 수 없었고 투표권도 얻지 못했다. 남아공 전체인구의 21%에 불과하던 백인들이 모든 이권을 독차지하고 68%가 넘는 흑인들은 철저히 소외당했다. 백인들의 이기심으로 시작된 아파르트헤이트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남아공의 최대 사회 문제인 흑백갈등의 원흉으로 자리잡게 된다.
1934년 남아프리카 연방의 자치가 허용되면서 영국의 영향력이 줄어들었고, 1948년 보어인들로 구성된 국민당은 총선에서 승리하여 집권당이 된다. 국민당은 더욱 강도 높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추진하여 흑인 전체 인구의 3분의 2를 원래 살던 지역에서 강제로 쫓아내 반투스탄으로 이주시키는 '반투 자치법'을 시행한다.
백인 정권은 자치 보장을 명분으로 내세워 흑인들을 이주시켰지만, 실제로는 흑인을 외국인 노동자로 취급하며 노동력을 착취했고, 정작 연방 국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의료과 교육 등 최소한의 기본권도 보장하지 않았다. 국민으로서의 모든 혜택을 박탈 당한 흑인들의 반투스탄은 가난한 빈민가로 전락했다. 그나마 강제 이주를 피하여 도시 인근에 남은 흑인들도 백인들에 밀려 일자리를 구하지못하고 극빈층으로 전락했다.
또한 남아공의 버스, 구급차, 화장실, 도서관, 공원 등 모든 시설은 백인과 흑인 전용을 엄격하게 구분하며 차별을 시행했다. 흑인과 백인간의 결혼, 연애, 성관계 등도 '백인의 피를 더럽힌다'는 이유로 엄격히 금지되었고, 흑백 혼혈로 태어난 아이는 범죄의 산물로 취급받을 정도였다.
아이러니하게도 흑인들이 차별로 고통받는 상황에서도 남아프리카 연방의 경제는 호황을 달렸다. 남아프리카의 풍부한 광물자원을 눈여겨본 미국과 서방 국가들의 적극적인 투자 덕분이었다. 1960년대 연방의 경제성장률은 최고치를 연이어 경신했고 매년 25만 명이 넘는 백인 이민자들이 기회를 찾아 남아프리카로 이주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하지만 백인들의 부와 권위가 높아질수록 흑백간의 빈부격차는 더욱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 들어 남아프리카에 '흑인해방운동'의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면서, 넬슨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등장한다. 1918년 남아프리카의 트란스케이 움타타 지역에서 코사족 부족장의 아들로 태어난 만델라는, 젊은 시절 남아프리카 연방 최초로 흑인 법률사무소를 개설하며 변호사로 활동했을 정도의 엘리트였다.
이미 젊은 시절부터 남아프리카 연방의 뿌리깊은 인종차별과 흑인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가져왔던 만델라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바꾼 사건은 '샤프빌 학살'이었다. 1960년 3월 21일, 흑인 차별에 저항하며 평화 시위를 벌이던 흑인 시위대에게 백인 경찰들은 기관총을 발포하고 무자비한 폭력을 통하여 진압에 나섰다. 이 사건으로 10명의 어린이를 포함하여 69명의 사망자와 18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백인 경찰이 이러한 학살극을 태연히 벌일 수 있었던 것은 흑인들 대부분이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하에서 시민으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사망자들의 시신 대부분은 등에 총탄을 맞은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이는 저항하지 않고 비무장으로 도망가는 시민들에게 총기를 난사했다는 증거였다.
1960년대 들어 세계적으로 인권의식이 높아지면서 UN(국제연합)과 아파르트헤이트의 원조인 영국에서마저도 비판의 목소리가 강해졌다. 하지만 연방의 백인정권은 이러한 국제사회의 요구를 무시했고 1961년에는 영국에서 독립하여 지금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수립하기에 이른다.
만델라는 샤프빌 학살사건 이후 '움콘토 웨 시즈웨(아프리카어로 민족의 창)'라는 저항단체를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무장투쟁에 앞장섰다. 1964년 46세의 나이에 체포된 만델라는 국가반역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남아공에서 당시 가장 악명 높은 감옥이었던 로벤섬에 수감된다. 당시 만델라의 수감번호로 유명해진 '46664'라는 숫자는, 1964년도에 수감된 466번째 죄수라는 의미로 훗날 만델라를 대표하는 상징이 된다.
만델라는 옥중에서도 편지를 보내어 전 세계 주요인사들에게 아파르트헤이트의 부당함을 호소했다. 아파르트헤이트 저항과 흑인해방의 상징이 된 만델라의 명성은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고, 1980년에는 서방의 한 언론인으로부터 '만델라를 해방하라(Free Mandela)'는 슬로건과 캠페인까지 탄생하게 된다.
만델라가 수감된 동안에도 흑인들의 아파르트헤이트 저항운동과 만델라 석방시위는 더욱 거세졌다. 당시 피터르 빌럼 보타 당시 남아공 대통령은 만델라에게 석방을 조건으로 흑인 시위를 멈추게 할 것을 제안했지만, 만델라는 "아파르트헤이트 철폐가 우선이다. 우리 모두의 자유가 아니라면 어떠한 조건도 받지 않겠다. 나의 자유와 남아공 흑인의 자유가 분리될 수는 없다"고 답하며 타협을 거부했다.
1988년에는 감옥에서 70세를 맞이한 만델라의 생일을 기념하여 그의 석방을 기원하는 대규모 콘서트가 영국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개최된다. 이 자리에는 리처드 기어, 스티비 원더, 휘트니 휴스턴, 에릭 클랩튼 등 당대의 월드스타 83인이 출연하여 만델라의 석방을 지지했으며, 콘서트는 영국 BBC를 통하여 11시간 동안 무려 67개국에 생중계 될만큼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끝까지 초심을 잃지 않은 만델라
1990년 2월 12일, 남아공과 전 세계인들의 응원속에 만델라는 무려 9376일(약 27년 6개월) 만에 마침내 감옥에서 석방되어 자유의 몸이 된다. 돌아온 만델라는 무장투쟁 대신 흑인들의 전폭적인 신뢰를 등에 업고 평화적인 정치 활동을 통하여 아파르트헤이트 철폐에 앞장섰다.
흑인을 포함한 모든 인종을 대표하는 '민주 남아공 공화국 회의'가 열리고 남아공 최초의 흑백연합정권이 탄생한다. 연합정부는 1993년 헌법 개정을 통하여 최초로 흑인들의 투표권을 인정한다. 그해 만델라는 남아공의 흑인 인권과 아파르트헤이트 철폐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된다.
1994년 4월, 남아공에서 흑인들이 참여한 최초의 총선이 열리게 되고,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만델라는 남아공 최초의 흑인대통령에 당선되는 쾌거를 이룬다. 평화적인 방식으로 정권교체와 인종차별 철폐를 이뤄낸 남아공의 사례는 아프리카 국가들의 모범이 됐다.
만델라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공식적으로 아파르트헤이트의 철폐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또한 남아공을 '무지개 국가'로 선언하며 국기 변경에 나섰고, 검은 색을 비롯한 여러 가지 색깔의 조화를 통하여 인종차별에서 벗어난 다양한 색깔과 사상을 존중하겠다는 의미를 담았다.
특히 만델라가 후대까지 높은 평가를 받는 부분은 '관용'이었다. 아프리카의 수많은 지도자들이 정권을 잡은 후에는 독재자로 변질되거나, 권력을 남용하여 타락하는 경우가 많았다면, 만델라는 끝까지 초심을 잃지 않았다. 남아공의 백인들은 흑인 대통령의 등장으로 복수를 우려했지만, 만델라는 '용서와 화합'을 표방하며 백인들을 배척하거나 보복하려고 하지 않았고, 오히려 적극적인 흑백화합정책을 추구했다.
만델라의 흑백화합을 대표하는 정책 중 하나가 럭비월드컵 개최였다. 남아공에서 럭비는 백인들만 배울 수 있는 고급 스포츠였고, 남아공 흑인들은 럭비대표팀이 국제대회에 출전하면 오히려 상대팀을 응원할 정도였다. 하지만 스포츠를 통하여 흑백화합을 추구했던 만델라는 1995년 럭비월드컵을 유치했고, 남아공 럭비대표팀은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히던 뉴질랜드를 꺾고 우승을 차지하는 이변을 일으킨다.
특히 놀랍게도 만델라 대통령이 남아공 흑인들에게는 증오의 대상으로 여겨지던 럭비대표팀의 녹색 유니폼을 입고 나와서 백인 주장에게 직접 우승트로피를 건네는 장면은, 큰 화제가 됐다. 이는 남아공의 화합과 평화를 상징하는 메시지를 전달하여 세계인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남아공은 만델라 정권(1994-1999)하에서 국제사회에서의 지위를 회복했고 서방 국가들과도 활발한 외교를 펼쳤다. 만델라 퇴임 직후인 2000년에는 남아공의 경제성장률은 무려 4%나 상승했다. 남아공의 국부로 추앙받는 만델라는 퇴임 후에도 만인의 존경을 받다가 평화롭게 여성을 보내다가 2013년 95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하지만 만델라가 그토록 꿈꿨던 남아공의 진정한 평화와 화합은 아직 이루어지지 못했다. 아파르트헤이트가 철페된 지 3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후유증은 남아공 사회를 괴롭히고 있다.
남아공은 극심한 빈부격차에 시달리고 있다. 2023년 4분기 기준 남아공의 실업자는 물 789만 5천 명에 육박했으며 이들 대부분은 흑인이었다. 남아공 전체인구에서 백인의 비중은 8%, 흑인은 무려 82%에 이르지만, 흑인은 경제성장의 혜택을 받지 못하여 남아공은 '전 세계 소득 불평등 1위' 국가라는 오명을 안아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이후 남아공의 집권세력이 된 흑인 정권들의 적극적인 흑인우대정책이 '제2의 아파르트헤이트'라는 모순을 초래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만델라 이후 현 시릴 라마포사 대통령까지 무려 5명 연속으로 흑인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남아공 내 흑인들의 영향력이 높아져지만, 문제는 그 혜택이 소수의 흑인 기득권자들에게 집중되면서 백인에서 역할만 바뀐 또다른 특권층을 양산했다는데 있다.
남아공의 네 번째 흑인대통령이었던 제이콥 주마(재임 2009-2018년)는 '만델라의 흑화 버전'으로 평가받으며 '무능한 흑인 정권'의 상징이 된 인물이다. 그는 한때는 만델라처럼 흑인 인권 운동가로 활동하고 수감생활을 하면서 명성을 얻었지만, 막상 정권을 잡은 후 만델라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으며 부패와 무능함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주마는 백인 차별 정책을 시행하고 재산을 몰수하며 빈민층 흑인들을 대상으로 한 포퓰리즘으로 인기를 끌었다. 또한 주마 정권은 극심한 정경유착과 부정부패로 무수한 비리를 저질렀다. 주마 개인도 초등학교 5학년이 학력의 전부였고, 대통령 재임 이전부터 뇌물수수 등 인성적인 문제가 많았던 인물이다. 이처럼 만델라 이후 흑인정권들의 연이은 부패와 무능, 이로 인한 빈부격차의 심화는 남아공 사회에 아파르트헤이트 시대 못지 않은 짙은 어둠을 드리우게 된다.
또한 아파르트헤이트가 낳은 남아공의 또다른 문제 중 하나는 '치안 악화'다. 흑인우대 정책으로 공권력도 백인에서 흑인 중심으로 이동했지만, 오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의 영향 때문에 교육수준과 전문성이 낮았던 흑인 경찰로의 갑작스러운 변화는, 오히려 공권력의 질적 저하를 초래했다.
현재 남아공은 베네수엘라와 파푸아뉴기니에 이어 전 세계에서 '범죄지수'와 '강간 신고율'이 가장 높은 국가 3위에 각각 이름을 올리는 오명을 안았다. 가난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남아공의 많은 청년들은 갱단에 가입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하여 마약, 강도, 성폭행 등 남아공의 강력범죄율은 크게 높아졌다.
백주대낮에 길거리에서 사람을 폭행하고 납치하여 재물을 빼앗는 사건도 빈번하게 벌어지는 곳이 남아공의 현실이다. 불안해진 시민들은 이에 대항하기 위한 독자적인 무장을 갖춘 자경단이나 민간보안업체가 성행하면서 공권력은 더욱 약화되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았다는 단순한 사실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가 우리의 삶의 의미를 결정할 것이다." 남아공의 영원한 국부 넬슨 만델라가 남긴 격언은, 오늘날의 남아공이나 우리 모두에게 깊은 울림을 전한다.
천혜의 자연환경과 풍부한 천연자원을 갖춘 남아공은, 그 높은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의 그릇된 편견과 욕심이 남긴 후유증으로 인하여 오늘날까지 많은 아픔을 겪고 있다. 만델라가 천국에서 자신의 조국이 처한 현실을 목격했다면 과연 어떤 이야기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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