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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받고 돈도 잘 벌던 장애인에게 닥친 암흑시대

[장애인의 옛날이야기 ②]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 자립과 존중에서 차별과 소외로

등록|2024.06.02 19:44 수정|2024.06.02 19:44
지난번에는 과거 유럽과 조선의 장애인에 관한 이야기를 했는데, 이번에는 시각 장애인을 중심으로 좀더 자세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조선도 병을 가진 사람이란 뜻에서 장애인을 잔질, 폐질, 독질이라 불렀고, 백성들은 단순히 병을 가진 몸이란 뜻에서 '병신'이라고 불렀는데, 지금처럼 모욕적인 뜻은 없었다고 한다. 편의상 여기서는 그냥 장애인이라고 부르겠다.

조선은 가족 중심의 농업 국가였던 만큼, 거의 모든 삶이 가족을 중심으로 이뤄져서 장애인도 가족이 일차적으로 책임을 졌다. 이것은 지금도 그렇고 일제 강점기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장애인을 보는 사회의 시각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조선 시대에는, 비록 신분에 따른 차별은 있었지만, 모든 사람은 배우고 일할 수 있어야 했고, 장애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 너무 늙었다든지, 고아가 됐다든지, 심한 병에 걸렸다든지, 그 어떤 이유로든 배울 수 없고 일할 수 없으면 마을 공동체나 나라가 이들을 지원하고 돌봤다.

조선은 장애인이라도 자기에게 맞는 직업을 통한 자립 생활이 원칙이었던 것 같다. 여러 학자가 이런 주장을 했는데, 특히 실학자 홍대용은 <담헌서>에서 시각 장애인을 비롯해 여러 장애인을 구체적으로 구분하고 그들에게 알맞은 직업을 언급하면서 모든 장애인이 일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했다.

만약 스스로 생활이 곤란하다고 판단되면 왕이 직접 지방 관아에 그들을 돌보라고 지시하고, 부족하면 직접 지원하기도 했다. 또 그들에게는 세금을 감면하거나 면제해 주고, 그것으로도 생활이 어려울 때는 친족이나 이웃 사람의 세금과 요역을 면제해 그들로 하여금 장애인을 보살피게 했는데, 지금의 요양보호사나 활동보조사와 같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시각 장애인이 가장 많이 종사하는 안마업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이고, 조선 시대에는 점을 치는 점복, 경을 읽어 병을 치유하는 독경,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 등에 주로 종사하였으며 이 밖에도 그물잡이 등 직업이 다양했다.
  

▲ 조선 시대에는 점복사, 독경사, 관현맹인 등 시각 장애인 전문 일자리가 많았다. ⓒ EBS


성리학의 영향으로 조선 초기에 잠시 천인으로 박해를 받았지만, 세종은 시각 장애인 점복가를 위해 관상감 소속 '명과학'이란 관직을 두어 직급과 녹봉을 주었다. 그리고 맹인 학생을 선발해 교육했다. 주로 왕후나 공주 등이 주관하는 내궁 향연에서 연주하던 장악원 소속 관현맹인(管絃盲人)이란 악사는 잠깐 폐지된 적은 있었지만 조선 말까지 활발히 활동했다.

시각 장애인은 경을 외워 읊으면서 병을 고치고 영혼을 달래는 독경사에도 많이 종사했는데, 이들은 대우도 좋고 수입도 많은 편이어서 시각 장애를 가진 양반집 여자들도 선호했다고 한다.

시각 장애인은 만통사(혹은 만통시)라는 단체까지 구성해 국가의 행사에도 참여했는데 태종과 세종은 이곳을 공식 후원하기도 했다. 기록상으로는 아마도 세계 최초의 장애인 단체가 아니었나 싶다. 시각 장애인들은 이후에도 맹청과 같은 단체를 결성해 꾸준히 활동했다.

조선 시대에는 점복가와 독경사를 판수라고도 불렀다. 비록 성리학의 유교 국가였지만 길흉화복을 점치는 일과 악귀를 몰아내어 치료하는 것은 왕궁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널리 퍼진 관습이었다. 그렇기에 적어도 일제 강점기 이전 판수는 대우받고 돈도 버는 아주 좋은 직업이었다.

좀 더 자세한 이야기는 <한국 시각 장애인의 역사>(이만수 지음)를 읽어보면 좋겠다.

제국주의와 우생학의 시대, 나락으로 떨어진 장애인

이처럼 지금과 비교해도 모자라지 않던 장애인에 대한 인식과 정책이 커다란 변화를 보인 것은 구한말 개화기를 거쳐 일제 강점기를 지나면서다. 누구도 완전한 사람이란 없기에 그냥 조금 더 불편한 사람에 불과했던 장애인이 이 시기에는 생의 밑바닥에 사정없이 내동댕이쳐지고, 인간 이하의 멸시와 능욕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이때부터 우리나라에서 장애인의 흑역사가 시작된 셈이다.

왕명으로 일본의 선진 문물을 배우러 갔던 수신사나 서구 사회를 경험하고 <서유견문>을 쓴 유길준은 일본과 서구 사회를 소개하고 구체적인 개화 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나라에는 이를 실행할 힘이 없었다. 구한말 조선은 외세와 탐관오리들의 부패에 시달렸고 왕족들은 그들끼리의 권력다툼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폭정으로 인한 극심한 빈곤과 가혹한 처우, 임술농민봉기에서부터 동학농민운동을 거쳐 항일 의병에 이르는 피 끓는 항쟁, 이 과정에서 장애인이 속출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더 많은 장애인이 속출했다. 여전히 끼니조차 해결하기 어려운 고단한 삶에 더해 전차나 공장, 탄광과 같은 산업 시설에서 희생된 이들이 장애인이 되어 거리로 내쫓겼다. 산업화와 자본주의로 뒤늦게 제국주의에 뛰어든 일본의 눈에 식민지 조선의 장애인들은 그저 방해물일 뿐 보살핌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선교사들이 학교나 병원을 세워 장애인을 돌보기도 하고, 일부 지식인들이 노력하기도 했지만, 한마디로 새 발의 피였을 뿐이다. 일제 역시 '제생원 맹아부' 같은 교육기관을 세우고 치료 시설이나 보호 시설을 만들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일본인을 위한 것이거나 눈가림에 불과했다. 실제로는 법을 만들어 장애인을 차별하고, 자기들의 책임이 닿지 않는 곳으로 유폐해 버렸다.

1930년대 전 세계를 휩쓴 '우생학'도 한몫했다. 보통 우생학 하면 히틀러의 나치를 떠올리지만, 이를 최초로 법제화한 나라는 미국이었고 그 후 자본주의 국가에 널리 퍼졌다. 당연히 일제도 이를 중요시했고, 우리나라 지식인 중에도 이를 신봉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그냥 환자에 불과했던 장애인의 호칭이 무언가를 갖추지 못한 사람이란 뜻의 일본어 '후구샤(不具者)'에서 유래한 '불구자'가 됐다. 그리고 민간이 부르던 병이든 몸이란 뜻의 '병신'은 욕이 됐다. 자기들의 책임을 회피하고,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확산해 조선인 스스로 장애인을 격리하거나 사회에서 제거하게 하려는 일제의 의도였는지도 모르겠다.

 

▲ 이런저런 대책이 없지는 않았으나 일제강점기 장애인은 그저 '불구자'에 불과했다. ⓒ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제국주의로 나선 일제는 50년이 채 못 되는 시기에 여섯 번의 큰 전쟁을 일으켰다.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1914년 1차세계대전 참전,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그리고 1941년 태평양전쟁까지. 이 중 러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제외하면 일제는 막대한 경제적 이득도 얻었다. 마지막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해 나라가 존망의 기로에 몰리기 전까지, 일제는 전쟁이 가장 손쉬운 돈벌이 수단이요 제국주의로의 지름길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런 전쟁광 일제에 장애인은, 더욱이 식민지 장애인은 그 존재 자체를 인정하기 어려운 기피 대상이요 쓸데없는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이렇게 급격하게 늘어난 장애인들은 사회적 인식도 나빠진 데다가 혜택은커녕 제대로 된 일자리도 없어서 극심한 어려움을 겪게 된다. 거지로 전락하거나 사회에서 격리되어 유폐되었다. 심지어 살해되는 경우가 많았다.

비교적 안정된 직업을 가졌던 시각 장애인 판수들도 혹세무민이요, 미신 타파라는 미명 아래 직업을 빼앗겼다. 그나마 경제력을 유지하던 이들은 추락한 위상 탓에 사기와 범죄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당시 신문에는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멸시를 견디지 못해 극단 선택을 한 장애인이나 가족이나 이웃에게 살해당한 장애인 기사가 종종 실렸다.

조선 시대에 장애인은 그냥 다른 능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됐고,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다. 능력이 되면 하는 것이고 능력이 안 되면 못 할 뿐이었다. 창피한 것도 아니었고, 기피할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함께할 수 있으면 함께 했고, 필요하면 도왔다. 그 과정에서 피해가 된다거나 폐를 끼치는 존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해방이 됐고, 한강의 기적을 통해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 됐다지만, 아쉽게도 개화기 때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잃어버린 장애인에 대한 인식과 정책은 아직 되찾지 못한 듯하다. 여전히 불구자의 개념으로 장애인을 보고, 경제 논리를 앞세워 물건 취급하는 이들이 있으니까.

다시 옛날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아, 그 지긋지긋한 신분 타령은 빼고. 나도, 나를 둘러싼 사람들도 그리고 사회도 국가도, 조선 시대 정도로는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이미 수백, 아니 수천 년을 그렇게 살았는데, 지금이라고 못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정말 이젠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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