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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1일 새벽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

동학혁명군 남원대회와 갑오변란

등록|2024.06.02 11:19 수정|2024.06.02 11:19
2024년이 동학혁명 130주년이다. 처음엔 '반역'에서 동학란으로, 또 그사이 동학농민전쟁이었다가 백주년에서야 비로소 ‘동학농민혁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름 하나 바꾸는데 백 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동학혁명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혁명에 참여했던 오지영 선생이 지은 <동학사> 한 권을 들고 전적지를 찾아다니며, 그 답의 실마리나마 찾아보려 한다. 우리를 되돌아보는 기행이 되었으면 한다.[기자말]
억강부약(抑强扶弱)이라 했다. 그게 나라다. 하지만 말기 조선의 왕과 권력은 그 반대였다. 알량한 권력을 지키려 외국 군대를 서슴없이 불러들였다. 이런 아둔한 어리석음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임오군란의 경험이다. 그때 이태원에서 청나라 군대가 죽인 수많은 사람은 조선 백성이 아니었단 말인가?

일본과 맺은 강화도-제물포-한성조약이 뭘 의미하는지 조선은 알지 못했다는 게 솔직한 진단이다. 알았다면 외국 군대를 빌어오기보다 가장 먼저 개혁에 나섰을 것이다.

왕은 또한 백성을 어떤 존재로 바라봤을까? 마음대로 죽여도 무방하다고 여겼음이 분명하다. 그러니 목숨 걸고 요구하는 개혁에 탄압으로 일관했다. 무기를 들고 나서자, 서푼짜리 권력의 존망을 외국 군대에 의지하기에 이른다.

대가는 혹독했다. 경복궁이 점령당하는 갑오변란(甲午變亂)을 불러들이고 만다. 치욕이다. 그 결과 '조일잠정합동조관'이 체결되어 일본의 노골적인 군사 침략이 이뤄진다. 그 첫째 목표물이 선량한 백성, 동학혁명군이다.
 

일본군 상륙일본 혼성여단이 1894년 5월(음) 인천항으로 상륙하는 모습. ⓒ 인천광역시청


일본이 조선에 군사를 보냈을 땐, 그들은 침략적 제국주의 대열에 서려는 절박함이 있었다. 동북아를 손에 쥐려는 야욕이다. 그게 누구건 일전이 불가피하다고 여긴다. 이런 호전적 담론이 일개 공사관까지 목숨 걸고 침략 선봉에 서도록 만들었다. 청나라엔 거침없으나 계획적인 도발을 감행한다. 이 전쟁에 판을 깔아주며 쑥대밭을 자초한 게 조선이요, 고종과 왕후 민씨다.

동학혁명군, 남원에서 기세를 모으고

바쁜 농사일이 끝난 6월(음)은 오랜만에 한가로운 때였다. 김개남의 제안으로 보름을 맞아 남원에서 동학혁명군 대회가 열린다. 각 고을을 대표하는 두령들과 수만 혁명군이 남원에 집결한다.
 

남원 요천남원 시가지 남측으로 흐르는 요천. 이곳에서 1894년 6월 보름 동학혁명군 남원대회가 열렸다. 사진 우측으로 광한루가 자리한다. ⓒ 이영천


술과 음식, 흥겨운 농악으로 전쟁과 농사로 고생한 농민을 위무하는 잔치가 열린다. 대회는 또한 전열을 가다듬고, 짙게 드리운 전운에 위급에 처한 나라를 구하자는 다짐도 곁들인다.

남원 동헌에서 두령 회의가 열린다. 집강소 운영 및 청·일 군대의 움직임과 대응 방안에 대해 열띤 공방을 벌인다. 일촉즉발인 전쟁이 화두다. 누가 되었건 동학혁명군과 일전이 불가피하다는 예측에 모두 공감한다.

무기 확충과 군자금 마련, 혁명군 의식 강화가 절실하게 다가온다. 재봉기 불가피성이 부각한다. 모범적인 집강소 운영이 바탕이 되어야 하며, 전라도만으론 한계가 명확하므로 반외세 열기를 빠르게 전국으로 확산시켜 나가자고 결의한다.
 

남원 관아 터남원 관아가 있던 자리. 1894년 이곳에서 동학혁명군 재봉기가 논의되었다. 현재는 남원문화원으로 사용 중이다. ⓒ 이영천


이때 감영 사마 송인회가 남원으로 찾아와 전라감사의 서찰을 내보인다. 민관이 힘을 합해 위급에 처한 나라를 구할 방도를 논의하잔다. 우선 전주만이라도 지킬 방안을 찾고 싶으니 혁명군 대표를 만나자는 내용이다. 송인회는 아울러 일본군 동향을 상세히 설명한다.

이에 전봉준이 나선다. 전라감영으로 들어간다는 건 어찌 보면 목숨을 담보하는 일이다. 하지만 위급에 처한 나라와 백성에 관한 문제다. 억강부약이다. 머뭇거릴 틈이 없다.
 
6월 보름 사이에 봉준과 개남 등은 남원에 크게 모였는데, 그 수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봉준은 각 읍의 포에 명령하여 읍마다 도소를 설치하고 …(중략)… 그러나 김학진은 …(중략)… 군관 송사마(宋司馬)에게 편지를 가지고 남원으로 가 전봉준에게 이러한 사정을 설명하고 나라의 어려움을 함께 대비하자며 도인들을 이끌고 전주를 함께 지키자고 약속하게 하였다. (번역오하기문, 황현, 김종익 옮김, 역사비평사, 1994, 이필(二筆) p197)

이때 박봉양이, 승리감에 취해 경계가 허술해진 혁명군의 틈을 노려 다시 운봉을 차지해 버린다. 함안 군수를 설득해 무기와 군사를 지원받아 민보군과 함께 기습으로 운봉을 점령한 것이다. 군율을 엄히 세우고 천연의 지형을 이용, 철통같은 방어벽을 구축한다. 나주에선 오권선이 공격에 나섰으나 계략에 빠져 크게 패하고 만다.

배후가 온전하다 해도 재봉기가 여의치 않은 상황에, 나주와 운봉이 드세게 저항하고 있어 큰 근심거리였다.

일본, 드디어 야욕을 드러내고

무단으로 군사를 들인 일본은 이홍장을 뇌물로 매수하는 한편, 작전대로 8천 병력을 부평과 서울 남산에 분산 배치한다. 전쟁 명분을 만들기 위해, 정치를 개혁하고 청과의 주종관계를 청산하라며 조선 내정에 깊숙이 간섭해 들어온다.

날마다 한양 시가지를 행군하며 무력 시위를 벌인다. 나라는 힘없는 백성에게나 호랑이였지, 이때 이르러 아무나 빼앗아간다 해도 무방한 허깨비에 불과했다.
 

광화문(1900년 경)일본군은 광화문을 통해 경복궁 점령에 나선다. 갑오변란이 일어나던 당시의 모습을 간직한 광화문. ⓒ 서울역사박물관


한 달여가 지난 시점, 일본의 무례한 도발이 현실화한다. 6월 17일, 3일 기한으로 '조선은 청나라 속국이 아님을 선포하라'며 일방적으로 통고해온다. 이를 핑계 삼아 조선 조정을 뒤엎을 속셈이다. 조선은 이를 거부한다.

일본군은 이를 빌미로 6월 21일 새벽 경복궁을 점령해 버린다. 갑오변란이다. 이로써 나라의 전권이 장악당한다. 총칼로 위협하는 일개 공사관 앞에서, 모든 걸 앗긴 고종과 왕후는 벌벌 떨며 말 한 마디 제대로 내뱉지 못한다. 진정 나라는 껍데기뿐이고 임금은 용포라는 누더기를 걸친 얼간이에 불과했다.
 

강녕전(1910)갑오변란 당시 고종이 기거하던 강녕전. 일본군은 이곳을 점령하여 고종을 인질로 삼는다. ⓒ 서울역사박물관


이는 왕보다 백성이 떠안아야만 했던 치욕이었다. 그 치욕이 얼마나 깊었으면, 동학혁명군 2차 봉기의 직접 계기로 작동했을까.
 
이날 새벽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는 먼저 대궐을 포위하고 군대를 풀어 광화문으로 진입한다. 이때 대궐에서 당직을 서던 평양 감영 소속 오위군 500명이 서양 대포를 연달아 발사하여 일본군 수십 명을 죽인다. 그러자 일본군은 곁 문을 통해 곧바로 강녕전으로 가 임금에게 포격을 멈추게 하라며 협박한다. 임금은 어쩔 수 없이 사알을 보내 경거망동하지 말 것과 명을 어긴 자는 대역죄로 다스리겠다는 칙지를 전한다. 평양 감영 병사들은 모두 통곡하면서 총을 부러뜨리고 군복을 찢어버린 다음 담을 넘어 흩어져 버린다.

…(중략)… 게이스케는 대원군을 가마에 태워 대궐로 데려와 칼을 빼 들고 …(중략)… 마침내 게이스케는 임금 칙서로 백관을 소집한다. 일본군대를 풀어 대궐 문을 지키면서 일일이 이름을 대조한 다음에야 대신을 대궐 안으로 들여보내도록 하였다. 김홍집, 김병시, 조병세, 정범조 등이 모두 대궐 안으로 들어오고 심순택 또한 도착하였다. …(중략)… 대신들은 대궐 안으로 들어와 벌벌 떨면서 힐난도 못 한 채 게이스케가 물어보면 그저 '네, 네'라며 대답할 뿐이었다.

마침내 하루 만에 법을 바꾸고 대원군과 함께 대궐 안에 억류되었다. 게이스케는 대궐의 각 문을 지키는 왜인들에게 명을 내려 증명서가 없으면 백관이라 할지라도 들여보내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때 백관들은 모두 흩어지고 내수사(內需司)에는 사람이 없어 임금께 수라조차 올릴 수가 없었다 …(중략)… 일본군은 사방에서 약탈을 자행하였는데 대궐 내의 재화와 …(중략)… 국가가 수백 년 동안 모아두었던 것을 하루아침에 쓸어갔으며, 서울에는 무기라고는 하나도 없게 되었다. 여러 민(閔) 씨들은 목숨을 구해 도망하였다. (앞의 책. p 146~151 의역 인용)

이로써 20여 년 권력을 오로지 하며 나라를 망국의 나락으로 빠뜨린 여흥민씨 정권이 몰락한다. 하지만 오토리 게이스케가 세운 김홍집 내각도 일본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일본은 드디어 마각을 드러낸다. 6월 23일 아산만에 정박 중인 청나라 함대에 포격을 감행, 군함 2척을 격침하고 수천 군사를 사살한다. 청·일 전쟁이다. 일본은 부산과 인천으로부터 조선 천지를 전쟁터로 삼는다. 선전포고도 없던 이 도발로 조선은 쑥대밭이 되고 만다. 청나라는 육지에서도 패전을 거듭하며 북쪽으로 밀려간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만리창(용산구 효창동)에 상륙하는 일본군. 청일전쟁 당시 한강을 통해 만리창으로 상륙하는 일본군을 일본거류민과 조선 관리들이 환영하는 모습이다. ⓒ 서울역사박물관


꼭두각시 내각을 압박, 조일잠정합동조관(1894.07(음)) 체결로 조선을 병참기지로 삼는다. 이를 통해 엄청난 양의 군수물자를 들여온다. 청일전쟁에 사용할 군수품은 물론, 장차 조선 지배에 활용할 물자까지 비축하고 나선다. 이로써 한반도는 일본의 대륙 침략 전진기지로 전락한다.

꼭두각시이긴 했지만, 김홍집 내각은 그동안 보지 못한 혁신적 개혁안을 속속 발표한다. 기구로 '군국기무처'를 만들어 중앙통치 중추 기구로 삼는다. 소위 말하는 '갑오개혁'이다. 하지만 이는 모두 허상에 불과했다.

이제 희망은 오직 동학혁명군뿐이다. 전봉준은 다짐했을 터이다. 이 땅의 주인이 누구인지, 나라를 사랑한다는 게 뭔지를 보여줘야 한다. 그게 진정한 권력이고 억강부약이다. 남의 나라를 오로지 하려는 왜놈은 반드시 몰아내야 한다. 이게 총칼 들고 일어선 참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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