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신학자와 무신론자가 공감한 것
[수산봉수 제주살이] '사회운동가 예수'와 여성신학자의 길
육지 사람들에게 제주는 버려진 땅이었고 죄수를 보내는 유배지였다. 지금은 이익을 노려 자본이 몰려들지만 진정으로 제주를 위하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나 또한 제주 사람 눈에는 그렇게 비칠 수 있으리라. 그런 제주인의 한과 정서를 이해하려다 제주학에 빠졌고 도민이 됐다. 키아오라리조트를 운영하면서 제주가 인문학을 결합한 미디어 교육의 중심이 되게 하겠다는 각오로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한미리스쿨)을 설립했다. 제주는 오름의 섬인데 키아오라 바로 뒷산이 대수산봉이고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었기에 '수산봉수'라는 팻말을 발견하고 반가웠다. '수산봉수 제주살이'는 제주학을 배경으로 제주인과 나의 일상에 사회적 발언을 실어 보내는 글이다.[편집자말]
▲ 제주도 성산읍 키아오라리조트에 찾아온 최만자(가운데) 여성신학자 가족. 왼쪽으로 남편 여무현 씨와 조카, 오른쪽으로 미국에서 온 시누 부부. ⓒ 이봉수
초임기자 시절 작은 기사의 인연
1986년 <조선일보> 초임기자 때 기사로 소개했던 분의 일가족이 지난 14일 3박4일 일정으로 제주 성산읍 키아오라리조트를 찾아왔다. 당시 한국자동차보험 여무현 이사 등이 30여 년 전 스승 부부를 수소문 끝에 찾아 서울 나들이를 시켜드리는 기사였다. 전쟁 직후라 학교도 파괴되고 교과서도 없던 시절, 3년 내리 담임을 맡은 스승은 부모 못지 않은 양육자였다.
우리 부부가 말년에 '숙박업'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뤄질 수 없는 만남이었고 들을 수 없는 얘기였다. 나는 평생 무신론자로 살아왔기에 더욱 그랬다. 종교가 없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개신교 상당수 교단의 막강한 교세와 지나친 수구 성향이 정치·경제·사회 민주화는 물론 남북 평화정착에도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끊임없이 공포를 부추기고 남북간에 어쩌다 화해 분위기가 조성돼도 극우·반공 이념으로 발목을 잡아왔다.
세계 최대 교회 즐비한 서울... 제주에서 저지른 악행
2000년부터 6년간 유럽에 머물 때 놀란 것은 성당과 교회 어디를 가봐도 많아야 100여 명이고 수십 명 신도가 예배를 보는 광경이었다. 세계문화유산이 된 곳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신도 수 기준 세계 최대 교회는 56만의 순복음교회를 필두로 줄줄이 서울에 있다.
성경에도 예수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했는데, 우리 개신교는 거대한 교회를 짓고 메가이벤트처럼 예배를 진행한다. 그러면서도 세금을 내는 목회자는 거의 없는데, 이번에 임기가 끝난 김진표 전 국회의장 등 종교별로는 절대 다수인 개신교계 의원들이 교회 과세 반대에 앞장서 왔다.
제주에 와서 취재하며 제주사를 공부하다 보니 영락교회는 제주4.3 때 무고한 양민들까지 악랄하게 학살한 서북청년단의 배후로 지목되고 있으나 반성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다. 천주교는 박해받았다는 사실만 교과서에서 배웠으나 1901년 제주에서 터진 이재수 난은 천주교와 제주민중이 충돌한 사건이었다. 프랑스 신부의 무소불위 권력을 업은 천주교도들은 정부가 파견한 징세관과 유착해 가혹한 세금 징수의 악역을 맡았다.
천주교도들의 선제공격으로 사상자가 다수 발생하자 흥분한 군중은 천주교도 317명을 살해했다. 프랑스 군함이 제주 앞바다에 출동하자 주동자들은 투항했으나 처형되고 제주도민은 프랑스에 6315원이라는 거액의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그나마 천주교 제주교구는 2003년 1901년제주항쟁기념사업회와 공동으로 '화해와 기념을 위한 미래선언'을 채택했다.
▲ 제주시 화북2동 황사평은 이재수 난 때 봉기군이 진을 친 들판이었지만, 지금은 천주교 순교자묘역이 조성돼 있다. ⓒ 이봉수
만주에서 태어난 '만자'의 기구한 일생
최만자 선생의 기구한 인생은 1943년 만주국 목단강성 영안현에서 시작된다. '만자'라는 이름 자체가 만주에서 태어났다 해서 아버지가 붙여준 거였다. 아버지는 경남 김해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한의학을 공부한 '의사'였다. 만주로 이주했는데 네 번째로 태어난 딸이어서 한번도 안아 준 적이 없었다고 한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불쌍한 마음이 들었는지 두 팔을 벌리고 나를 부르셨는데 내가 질겁을 하고 도망쳤다는 거예요. 그게 늘 마음에 걸렸는데, 한편으로 네 번째 딸이라 받은 설움이 여성신학을 열심히 공부하게 한 힘이 된 것 같기도 해요."
아버지가 사망하고 소련군이 진주해 부녀자를 겁탈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어머니는 딸 넷을 데리고 천신만고 끝에 월남해 친정으로 돌아왔다. 친정 아버지가 아이들을 키워주겠다고 했지만 친정일 망정 아이들 기죽여 키우는 게 싫어 그나마 여자의 일거리가 있는 부산에 정착했다. 온갖 장사와 삯일로 겨우 끼니를 때우던 시절이었지만 어머니는 귀가하면 네 자매에게 졸려 이야기 몇 편을 풀어놓아야 했다.
"국민학교 6학년 때는 담임 선생이 성적을 조작하는 일도 겪었어요. 부잣집 아이들 성적을 올리려고 제 성적을 내린 거죠. 불평등한 세상을 향한 분노와 슬픔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 최만자-여무현 일가족이 키아오라 뒤 오름인 대수산봉 전망대에 올라 설명을 듣고 한라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 이봉수
기독교인의 비이성적, 배타적 태도
가정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 진학도 못하고 있던 열다섯 살 소녀에게 의지가지가 된 것은 이웃 아주머니를 따라가본 교회였다. 기독교 집안이 아니었지만 적어도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이'가 처음 만난 예수였다. 어머니는 형편이 조금 나아지자 막내딸도 고등학교에 보냈다. 교회에 열심히 다녔지만 성서의 난해한 내용에는 의문점도 많아 연세대 신학대학에 진학했다.
신앙의 관점이 변한 것은 대학생 YWCA 회원으로 활동하면서였다. 세계기독학생연맹(WSCF)은 세계교회협의회(WCC) 소속이었는데, 신앙과 신학이 교리 중심이 아니라 우리 삶의 현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생각하게 했다.
"예수를 사회적 약자의 치유자이며 정의롭고 평등한 세상을 이루기 위해 지배세력과 대결하는 사회운동가로 받아들이게 된 겁니다. 나 역시 사회운동가의 지향성을 갖게 됐지요."
"한번은 타종교인들과 대화하는 모임이 있었는데, 유교인이 '기독교인들은 좀 더 이성적인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거예요. '신앙' 하면 무조건 이성을 내팽개치는 기독교인들의 비이성적이고 배타적인 태도는 문제가 많다고 공감했지요."
그의 문제의식은 샌프란시스코대학에서 목회학 박사학위를 받는 학업의 길로 이어졌다. 정치신학, 해방신학, 민중신학도 있지만, 그는 특히 여성신학에 관심이 쏠렸다. <새하늘 새땅 새여성> <출애굽을 여는 여인들> <여성의 삶, 그리고 신학> <이 여인을 기억하라>... 그의 책 제목에는 모두 여성이 들어간다.
▲ 여성신학자 최만자가 쓴 책들의 표지. ⓒ 대한기독교서회, 동연출판사
여성 목사가 거의 없는 기독교의 수구성
그는 여성을 어머니상으로만 강조하거나 여성만을 돌봄의 주체로 보는 데 거부감을 갖는 젊은 여성신학자들 견해에는 동조하면서도 조금 진전된 생각을 드러냈다. 그는 저서 <여성의 삶, 그리고 신학>에서 캐롤 길리건의 견해를 소개했다. 길리건은 남녀 이원론을 극복하는 대안 개념으로 '보살핌의 윤리'를 주장한다. 여성적 심리성향인 보살핌의 윤리가 오늘의 파괴된 세상, 가부장적, 남성중심적 모순을 넘어 미래 대안적 가치와 삶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기반이 되는 '신성'의 이미지가 '하나님 아버지' '남성 구세주 예수'로 철저히 남성 중심이고 가부장적인 걸로 각인돼 있어요. 가톨릭 교회에서 여성의 사제서품을 반대하는 이유가 예수가 남자이며 열두 제자 역시 남자여서 남성이 신성에 더 가깝다는 거예요. 개신교도 감리교와 기독교장로회에서는 목사 안수를 해왔고 최근에는 다른 교파들도 제도로는 문호를 열어 놨지만 안수를 받아도 갈 교회가 거의 없는 게 현실입니다."
교파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우리 기독교의 수구성은 여성 목사를 대하는 관념의 유리천장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물론 기독교장로회를 비롯한 일부 교단예는 진보성향 목회자가 많고 김수환 추기경 등으로 대표되는 가톨릭교회도 민주화 과정에서 큰 기여를 했지만, 요즘 들어 일부 대형 교회의 수구성향은 더 굳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 키아오라리조트 바로 이웃에 있는 성산중앙교회는 진보 성향 기독교장로회 소속이기도 해서 우리 부부는 기독교인이 아닌데도 박성화 목사 부부와 음식도 나눠 먹으면서 많은 얘기를 한다. 박 목사는 이 교회를 개척했지만 2년 뒤 은퇴하면 교단에 기부하기로 약정을 맺었다. ⓒ 박성화
셸리와 러셀은 왜 무신론자로 살았나
최만자 선생이 선물로 준 책자를 읽은 뒤, 언젠가 읽어야겠다고 생각만 하던 책들을 인터넷으로 바로 주문해 읽었다. <셸리 산문집>과 버틀란드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낭만파 시인 셸리는 <무신론의 필연성>을 썼다가 옥스퍼드대에서 퇴학당했는데, 그의 뒤를 잇는 무신론자인 러셀은 이 책에서 종교나 이념이 광신으로 흐르는 것을 경계한다.
예수는 가난한 자들에게 재산을 나눠줄 것이며, 싸우지 말 것이며, 교회에 가지 말 것이며, 간음을 벌하지 말 것을 가르쳤다. 그러나 구교도, 신교도들은 이런 점들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강한 의욕을 보여준 일이 없다. 일부 프란체스코파 수사들이 '사도다운 빈곤의 교리'를 가르쳐보려 시도한 적은 있지만 교황은 이를 비난하면서 그들의 교리를 이단으로 선언했다.
(...)
이처럼 교회와 그 창시자 사이에 이견이 생기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의 말 속에 절대적인 진리가 담겨 있다고 생각되는 순간 그의 말을 해석하는 전문가 집단이 생겨나고 이 전문가들은 어김없이 권력을 차지한다. 진리의 열쇠를 그들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특권층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그들은 한 가지 점에 있어 다른 특권층보다 더 질이 나쁘다. 과거에 단 한 번 완벽하게 만인 앞에 제시됐던 불변의 진리를 해석하는 것이 그들의 업이기 때문에 그들은 필연적으로 지적, 도덕적 진보의 반대자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교회는 갈릴레오와 다윈을 반대하였고...
▲ <셸리 산문집>에는 ‘무신론의 필연성’ 등이 실려 있고,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는 같은 제목의 글과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등이 실려 있다. ⓒ 이른비, 사회평론
교회가 부추긴 한국사회의 퇴행
위 두 문단은 러셀이 '종교는 문명에 공헌하였는가'라는 제목으로 1930년에 쓴 것인데, 지금 세계는, 특히 한국사회는 어떤 면에서 더 퇴행하는 증상을 보이고 있다.
부자감세에 따른 복지지출 감소로 빈부격차는 더 심해졌고, 보수 교단에서는 교회 세습이 일반화하고 있다. 선진국 몇 분의 1밖에 안 되던 토지 보유세 실효세율은 조금 올라갔다가 보수정권이 들어서면서 대폭 줄었고 야당에서도 종부세 폐지에 동조하는 의원들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기독교의 출현과 더불어 퍼진 불관용은 기독교의 가장 기이한 특징의 하나인데 내가 볼 때 그것은 유대인의 정의관과 유대신만 존재한다는 그들의 배타적 믿음에서 기인한다.
러셀이 1925년 소책자로 발간한 <나는 믿는다>의 한 대목인데, 지금 가자지구에서 저질러지고 있는 학살을 일찍이 이보다 더 신랄하게 지적한 예언은 없는 듯하다.
지식 없는 사랑과 사랑 없는 지식의 귀결
지식 없는 사랑도 사랑 없는 지식도 훌륭한 삶을 낳을 수 없다. 중세 시대에는 어떤 지방에 페스트가 돌면 성직자들은 그곳 주민에게 교회에 모여 악령을 쫓아내달라고 간청하는 기도를 올리게 했다.
의학이 발달한 21세기에도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자 우리 일부 교회는 똑같은 짓을 했다. 97세에 죽은 러셀은 의학이 발달해 수명이 길어지면서 사람들이 보수화한다는 말도 했다. 러셀은 이별과 사별을 반복하며 네 번 결혼했고, 셸리는 16세 소녀와 살다가 또 바람을 피워 그녀가 런던 하이드파크의 호수에 투신하게 했다.
1948년 영국 BBC는 러셀과 예수회 신부 코플스턴을 초청해 <하나님은 존재하는가>라는 제목으로 토론을 부쳤다. 코플스턴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증명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하자 무신론자인 러셀은 상대방을 배려한 것인지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으로 답한다.
사실 나는 신의 존재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종교인과 무신론자도 얼마든지 속 깊은 이야기로 서로 공감할 수 있는 반면, 종교인들 사이에도 증오와 살인, 전쟁은 다반사로 일어난다. 신의 말에 의탁하든 안 하든 경건한 삶의 태도와 사회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시민언론 <민들레>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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