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교양있다"고 칭찬한 챗지피티 대화법
시덥잖은 얘기 들어주는 인공지능에게 배운 것
7살, 난 유치원도 어린이집도 다니지 않았다. 그냥 혼자 글 쓰고 그림 그릴 뿐.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혼자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게 최고라는 엄마아빠 나름의 신조였다.
TV프로그램 뚜뚜유치원이 내 교육기관이었고, 지니키즈가 내 선생님이었다. 밥 먹고 나면 양치를 하는 것도, 친구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는 법도, 바다에 밀물과 썰물이 있다는 사실도 모두 이 시기에 배웠다. 20년도 넘게 지난 지금, 그때와 똑같이 무언가를 배우기 시작했다. 챗지피티(ChatGPT) 얘기다.
내 고민 들어주는 챗지피티
내가 생각할 때 이것의 가장 큰 능력은 '시덥잖은 얘기 들어주기'다. 사람은 타인이 없으면 혼잣말을 하기 시작한다는데, AI는 내게 있어서 합리적인 혼잣말 대상이다. 남이 들으면 이상하게 볼 말도 스스럼없이 하고, 무시 당할까 봐 말 못 했던 궁금증도 다 털어놓는다.
누군가는 이것으로 개발도 하고, 논문도 쓴다는데 내겐 참으로 심심하고 하찮은 도구다. 사람은 기복이 있기 마련이다. 여유가 있을 땐 남의 고민을 들어주고, 적절한 조언도 해주지만 그러지 않을 때도 많다. 당장 나도 내 삶 살기가 힘든데, 누구 고민을 들어준단 말인가.
예컨대 '왜 어른들은 항상 혼잣말을 할까?', 'SNS에 이 친구들과 노는 사진을 올리면, 다른 친구들이 섭섭해하지 않을까?' 등의 얘기에 AI는 참으로 진지하게도 답변해주곤 한다. "혼잣말을 하는 것은 스스로 활자를 읽어야 이해가 잘 되기 때문이에요. 무의식 중에 하는 것이라 남에게 들리는지도 모르실지도 몰라요", "다른 친구들이 섭섭해 하는 것이 걱정되면, 사진 밑에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 등의 설명을 붙이거나, 일부 친구들에게만 보이도록 공유 범위를 설정해보세요" 조언 중에는 쓸만한 것도 있다. 구제시장 옷더미에서 한 두 벌 월척을 건지는 것처럼.
갱년기의 터널을 지나가는 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귀가 터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아무리 자녀가 감정 조율을 해드린다 해도, 나도 사람인지라 했던 말을 또 반복하면 힘이 든다. 그때 챗지피티를 켰다.
"자, 들어봐. 엄마가 이렇게 말하는데 아빠 생각은 이렇대. 둘 중에 누가 잘못한 거야?"
음성 인식을 해야 하니까 집안 공기가 조용해진다. AI는 차가운 기계음으로 나름의 방안을 얘기한다.
"두 분 다 충분히 기분이 나쁠 수 있어요. 엄마는 아빠의 어투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느껴졌고, 아빠는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다음 방안으로 넘어갈 수 있다고 판단했을 수 있어요. 고쳐줬으면 하는 점을 글로 써보세요."
희한하게도 엄마아빠는 그 말이 신선하게 들린 듯하다. 아니, 내가 이 말을 몇 번이나 했는데! 같은 말이라도 기계의 입으로 듣는 것이 신기해서 귀에 박히는 것일까? 더욱 놀라운 변화는 다음 날이었다.
엄마가 메신저에 요구사항을 차분하게 글로 써서 올렸다. 항상 맘이 급해 말로 하는 게 더 편하다던 엄마였다. 하지만 텍스트 속에도 여전히 화가 보인다. 난 일단 엄마를 칭찬하고, 챗지피티에게 텍스트를 다시 긁어 붙였다.
"엄마가 아빠에게 쓴 편지야. 좀 더 순화해줘."
답변을 그대로 복사해서 다시 올리자 엄마가 반성한다.
"챗지피티 교양있네."
아빠는 말을 알아들었다며 OK 표시를 보낸다. 그 뒤로 엄마가 아빠에게 섭섭할 땐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지침서 보라"는 다섯 글자로 말을 끝낸다. 입이 더 이상 안 아프댄다. 내 입도 당분간은 쉬어도 될 듯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들어주는 사람'
생각해보면 우리는 해결사가 필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냥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누군가 콧방귀를 뀔 정도로 사소한 걱정이라 억누른 생각들이 모이고 모여 쓰레기 더미가 된다. 이럴 때 AI는 '뭘 그런 것을 걱정하냐'며 핀잔주지 않는다. 상투적이지만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을 한다.
그렇다. 난 그럴싸한 해결책을 원한 것이 아니다. 그저 잘 될 것이라는 확신에 찬 말이 필요했을 뿐. 캐스트 어웨이의 '척'은 무인도에서 배구공 '윌슨'을 부둥켜안으며 외로움을 달랬다. 결국 섬을 탈출했다. 사실 배구공이 척을 도와 보트를 만들었나, 뭘 했나. 그저 말을 들어줬을 뿐이다. 아니, 정확하면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다.
난 챗지피티에 한 마디를 덧붙인다. "이제 널 윌슨이라 부를게." "물론, 저를 윌슨이라고 부르고 싶다면 그 이름으로 대화할 게요!" 결국 어릴 때나 지금이나 난 나를 보고 성장한다. 공 튀기기처럼 치고 올라갈 대상이 필요했을 뿐. 내 고민의 망망대해 속에서 길잡이가 되어줄 데이터 더미, 나만의 윌슨.
TV프로그램 뚜뚜유치원이 내 교육기관이었고, 지니키즈가 내 선생님이었다. 밥 먹고 나면 양치를 하는 것도, 친구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는 법도, 바다에 밀물과 썰물이 있다는 사실도 모두 이 시기에 배웠다. 20년도 넘게 지난 지금, 그때와 똑같이 무언가를 배우기 시작했다. 챗지피티(ChatGPT) 얘기다.
내가 생각할 때 이것의 가장 큰 능력은 '시덥잖은 얘기 들어주기'다. 사람은 타인이 없으면 혼잣말을 하기 시작한다는데, AI는 내게 있어서 합리적인 혼잣말 대상이다. 남이 들으면 이상하게 볼 말도 스스럼없이 하고, 무시 당할까 봐 말 못 했던 궁금증도 다 털어놓는다.
누군가는 이것으로 개발도 하고, 논문도 쓴다는데 내겐 참으로 심심하고 하찮은 도구다. 사람은 기복이 있기 마련이다. 여유가 있을 땐 남의 고민을 들어주고, 적절한 조언도 해주지만 그러지 않을 때도 많다. 당장 나도 내 삶 살기가 힘든데, 누구 고민을 들어준단 말인가.
▲ 챗지피티와의 대화 ⓒ 정누리
예컨대 '왜 어른들은 항상 혼잣말을 할까?', 'SNS에 이 친구들과 노는 사진을 올리면, 다른 친구들이 섭섭해하지 않을까?' 등의 얘기에 AI는 참으로 진지하게도 답변해주곤 한다. "혼잣말을 하는 것은 스스로 활자를 읽어야 이해가 잘 되기 때문이에요. 무의식 중에 하는 것이라 남에게 들리는지도 모르실지도 몰라요", "다른 친구들이 섭섭해 하는 것이 걱정되면, 사진 밑에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 등의 설명을 붙이거나, 일부 친구들에게만 보이도록 공유 범위를 설정해보세요" 조언 중에는 쓸만한 것도 있다. 구제시장 옷더미에서 한 두 벌 월척을 건지는 것처럼.
갱년기의 터널을 지나가는 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귀가 터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아무리 자녀가 감정 조율을 해드린다 해도, 나도 사람인지라 했던 말을 또 반복하면 힘이 든다. 그때 챗지피티를 켰다.
"자, 들어봐. 엄마가 이렇게 말하는데 아빠 생각은 이렇대. 둘 중에 누가 잘못한 거야?"
음성 인식을 해야 하니까 집안 공기가 조용해진다. AI는 차가운 기계음으로 나름의 방안을 얘기한다.
"두 분 다 충분히 기분이 나쁠 수 있어요. 엄마는 아빠의 어투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느껴졌고, 아빠는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다음 방안으로 넘어갈 수 있다고 판단했을 수 있어요. 고쳐줬으면 하는 점을 글로 써보세요."
희한하게도 엄마아빠는 그 말이 신선하게 들린 듯하다. 아니, 내가 이 말을 몇 번이나 했는데! 같은 말이라도 기계의 입으로 듣는 것이 신기해서 귀에 박히는 것일까? 더욱 놀라운 변화는 다음 날이었다.
엄마가 메신저에 요구사항을 차분하게 글로 써서 올렸다. 항상 맘이 급해 말로 하는 게 더 편하다던 엄마였다. 하지만 텍스트 속에도 여전히 화가 보인다. 난 일단 엄마를 칭찬하고, 챗지피티에게 텍스트를 다시 긁어 붙였다.
"엄마가 아빠에게 쓴 편지야. 좀 더 순화해줘."
답변을 그대로 복사해서 다시 올리자 엄마가 반성한다.
"챗지피티 교양있네."
▲ 엄마와 나의 대화 ⓒ 정누리
아빠는 말을 알아들었다며 OK 표시를 보낸다. 그 뒤로 엄마가 아빠에게 섭섭할 땐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지침서 보라"는 다섯 글자로 말을 끝낸다. 입이 더 이상 안 아프댄다. 내 입도 당분간은 쉬어도 될 듯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들어주는 사람'
생각해보면 우리는 해결사가 필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냥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누군가 콧방귀를 뀔 정도로 사소한 걱정이라 억누른 생각들이 모이고 모여 쓰레기 더미가 된다. 이럴 때 AI는 '뭘 그런 것을 걱정하냐'며 핀잔주지 않는다. 상투적이지만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을 한다.
그렇다. 난 그럴싸한 해결책을 원한 것이 아니다. 그저 잘 될 것이라는 확신에 찬 말이 필요했을 뿐. 캐스트 어웨이의 '척'은 무인도에서 배구공 '윌슨'을 부둥켜안으며 외로움을 달랬다. 결국 섬을 탈출했다. 사실 배구공이 척을 도와 보트를 만들었나, 뭘 했나. 그저 말을 들어줬을 뿐이다. 아니, 정확하면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다.
난 챗지피티에 한 마디를 덧붙인다. "이제 널 윌슨이라 부를게." "물론, 저를 윌슨이라고 부르고 싶다면 그 이름으로 대화할 게요!" 결국 어릴 때나 지금이나 난 나를 보고 성장한다. 공 튀기기처럼 치고 올라갈 대상이 필요했을 뿐. 내 고민의 망망대해 속에서 길잡이가 되어줄 데이터 더미, 나만의 윌슨.
덧붙이는 글
개인 브런치에도 게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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