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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년간 강화 바다 지킨 돈대의 복원, 아쉬운 점은

[돈대를 찾아가는 길 25] 감나무가 우뚝 서 있는, 인천 강화군 선원면 화도돈대

등록|2024.07.21 10:50 수정|2024.07.21 10:50
마트에 갔다가 과일값을 보고 놀랐다. 사과 한 알에 6000원이 넘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놀랐는데 배 가격을 보고는 더 놀랐다. 배는 한 알에 1만 원이었다. 제사상에 올려도 좋을 정도로 괜찮은 상품(上品)이었지만 비싸도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사상에 올리는 과일 중에 감도 있다. '조율이시(棗栗梨柹)'의 시(柿)가 바로 감이다. 대추와 밤 그리고 배와 감을 조상님들이 제물(祭物)로 선택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대추가 자손 번창을 뜻하고 밤은 조상과 후손의 연결을 나타낸다면 감은 사람으로 태어났더라도 가르치고 배워야 올바른 사람으로 성장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배는 더 나아가 우주의 질서 속에 우리 민족의 긍지를 나타낸다고 하니, 우리의 조상님들은 제물을 선택하는 데도 이처럼 귀한 의미를 담았던 것이다.

감나무가 우뚝 서있는 '화도돈대'  

그런 깊은 뜻을 담아 선택된 과일들이지만 또 다른 까닭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대추와 밤, 그리고 감과 배 모두 우리나라에서 생육하는 과일들이란 점도 작용했을 것 같다. 더구나 감나무는 생육조건이 그리 까다롭지 않아 산 아래 돌 비탈 밭이나 집 울타리 안에서건 어디서나 잘 자란다. 그렇게 가까이 볼 수 있는 과일이어서 제사상에도 올라가는 영광을 누렸을 것이다.
 

▲ 감나무가 우뚝 서있는 화도돈대 ⓒ 이승숙


땅 힘이 좋아 각종 농산물이 잘 생장하는 강화에는 감나무도 잘 자란다. 강화도에는 '장준감'이라 불리는 감이 있는데 아주 달고 맛이 좋다. 가을에 감을 따서 챙겨뒀다가 익는 순서대로 한 알씩 먹노라면 이보다 더 맛있는 감이 있을까 싶다. 특히 추운 겨울에 먹으면 더욱 별미다. 강화의 대표 특산물 중 한 자리를 장준감이 차지하는 까닭이다.

강화 해안도로를 달리다가 감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있는 돈대를 발견했다. 봄이면 연두색 잎이 돋고 가을이면 붉게 물든 홍시로 주변을 환하게 밝혀줄 그 감나무는 장준감나무일 지도 모르겠다. 강화군 선원면 연리에 있는 '화도돈대(花島墩臺)' 이야기다.

강화 동쪽바다를 지킨 돈대들

'화도돈대'는 강화의 동쪽 바다를 지킨 여러 돈대 중 하나다. '염하'라고 흔히 불리는 강화해협은 한양으로 들어서는 중요 물길이었다. 그래서 '진'과 '보', 그리고 '돈대'가 촘촘하게 들어서서 바다를 지켰다.

조선시대 강화에는 모두 5개의 '진'과 7개의 '보', 54개의 '돈대'가 있었다. '진'은 지금으로 보면 대대급 군사 조직과 비슷한 규모이고 '보'는 중대급이라고 볼 수 있다. '돈대'는 '진'과 '보'에 속해 있는 소규모 군사 시설로 약간 명의 병졸이 머물며 바다와 육지를 방비하고 수호하던 요새라고 할 수 있다.
 

▲ 하늘에서 내려다 본 화도돈대와 강화해협 ⓒ 국가유산청

   

▲ 하늘에서 내려다 본 화도돈대와 물 빠진 갯벌, 그리고 삼동암천. ⓒ 국가유산청


강화는 지정학적으로 한양 도성의 입구에 해당하므로 군사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조선은 강화도의 방어 기능을 보강할 필요성을 느꼈다.

숙종 4년(1678) 병조판서 김석주의 건의로, 요충지인 강화도의 방어태세 강화를 위해 돈대 축조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그해 12월에 경석수(京石手) 400명이 강화로 와서 돌을 깨고 다듬어 공사 준비를 했다.

숙종, 강화를 요새로 만들다

숙종 5년(1679) 3월 초에 돈대 축성을 시작했고, 그해 5월 하순에 48개나 되는 돈대를 한꺼번에 완성했다. 황해도와 함경도 그리고 강원도의 승군 8000여 명과 어영군 4300명 이외에 순수 역부 1만3162명, 경석수와 제도석수 총 1100명 등 수많은 인원이 동원돼 80일이라는 단기간에 완성했다. 석재를 마련하는 작업 기간까지 다 합해도 총 6개월 밖에 걸리지 않은 공사였다.

그후로도 6개의 돈대를 더 만들어서, 모두 54개의 돈대가 촘촘하게 들어서서 강화의 해안을 지켰다.

이로써 강화는 금성탕지(金城湯池, 쇠처럼 단단한 성곽과 끓는 연못 같은 해자에 둘러싸인 성이란 뜻이니, 방비가 빈틈없이 견고하다)나 마찬가지였다. 5진과 7보 54돈대가 있는 강화는 한양을 지키는 제일선이자 수도 방어체제를 수행할 수 있는 보장처가 됐다.
 

▲ 돈대 출입문인 '돈문' ⓒ 이승숙


해안도로를 달리다가 화도돈대 표지판을 보고 차를 세웠다. 조금 높은 언덕에 돈대가 있었다. 돈대 석축과 맞닿아서 감나무 한 그루도 있었다. 감나무는 한여름의 열기에도 굴하지 않고 우뚝 서 있었다.

감나무를 바라보다가 화도돈대로 눈길을 돌렸다. 새로 쌓은 듯한 석축이 보였고 반듯하게 다듬은 돌을 양 옆으로 나란히 세워 만든 출입구도 있었다. 그러나 그뿐, 삼백여 년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은 없었다.

부분 복원한 화도돈대, 그러나...

이끼가 끼고 때가 묻은 기단석 일부가 돈대가 품고 있는 역사를 이야기하는 듯했지만 그 역시도 새로 쌓은 매끈한 석축에 눌려서 존재를 드러내지 못했다. 더구나 복원한 돈대의 석축 높이는 채 1m도 안 돼 보인다. 원래 돈대의 성벽 높이는 3m도 넘어 여장 높이까지 다 합하면 4m~5m에 육박했을 텐데, 현재의 모습으로는 과거의 위용을 느끼기가 어려웠다.
   
더 문제는 석축의 두께였다. 조선은 성벽을 쌓을 때 성의 안과 밖 모두를 돌로 쌓거나(협축식) 또는 외벽만 돌로 쌓고 안쪽 성벽은 흙으로 채우는 (편축식) 방식으로 했다. 그 두 가지 모두 성벽의 두께가 두꺼워서 무너뜨리거나 파괴하기에 쉽지 않은 방식이었다.

부분적으로나마 복원한 화도돈대의 성벽으로는 조선의 축성 기법을 알 수 없었다. 두께도 얇은데다 높이도 낮아서 돈대의 성벽이라기보다는 마치 화단의 담장처럼 느껴졌다.
 

▲ 부분 복원한 화도돈대의 석축 ⓒ 이승숙


화도돈대는 네모난 모양의 돈대로 둘레가 129m에 달한다. 남북 35m, 동서 32m로 총 면적은 1100제곱미터인 이 돈대는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7호이기도 하다. 1999년 발굴조사후 2002년에 기초를 복원했는데, 시설로는 돈문(墩門)과 물빠짐을 위한 누조 1개가 있다.

300여 년 동안 강화의 동쪽 바다를 지켰던 돈대다. 19세기 후반, 외세의 침입으로 돈대가 폐지되면서 화도돈대는 다른 돈대들과 함께 오래 방치됐다. 그러는 사이에 돈대의 석축은 허물어지고 석재들도 다 사라졌다. 돈대 터는 농지로 이용됐다. 한때 과수원이었기도 했던 화도돈대는 1999년에 육군박물관의 발굴조사후 2002년 부분 복원되어 현재에 이른다.

과수원과 연못이 된 돈대

기단석만 남아있는 화도돈대를 둘러봤다. 혹시라도 더 남아 있는 것은 없을까 싶어 근처 여기저기를 살펴봤다. 돈대 아래쪽 빈 터에 석재 무더기가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필시 돈대 석축에 사용됐을 석재다. 돌무더기 앞에는 쓰레기 더미도 보였다. 오랜 세월 돌보지 않고 방치됐음을 보여주는 흔적이었다.

돈대 앞쪽에 있는 밭도 살펴 봤다. 비탈진 곳에는 돌로 담장을 쌓아놨는데 그 돌들 역시 보통 돌은 아니었다. 모두 크고 네모났다. 다듬어 손 본 걸로 봐서 분명 돈대 석축에 쓰였을 돌들이 분명하다. 흩어지고 사라졌던 화도돈대의 석재들이 이렇게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 돈대의 성벽에 쓰였을 듯한 석재가 인근 빈 터에 있었다. ⓒ 이승숙

        

▲ 밭의 담장으로 쓰이는 화도돈대의 석재 ⓒ 이승숙

 
돈대 앞은 바다다. 썰물이 들어 물이 빠져나간 갯벌로 들어가봤다. 해안의 절벽 아래에는 깨진 기왓장 조각과 도자기 파편이 더러 있었다. 기왓장도 도자기 파편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화도돈대와 연관지어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아 유심히 살펴 봤다.

병졸들이 상주하며 바다를 관측하고 방비했던 돈대다. 돈대 안에는 대포를 설치해 두었던 포좌도 네 군데나 있었을 것이고 각종 병장기들을 보관했던 병기창도 있었을 것이다. 돈대 아래 바닷가 갯벌에 박혀 있는 깨진 기왓장이며 그릇 파편들은 그때를 알려주는 흔적임이 분명하다.

갯벌에 남은 흔적  

돈대는 해안가에 쌓은 소규모 관측 방어시설이다. 병사들이 돈대 안에서 경계 근무를 서며 바다를 살피고 적이 침략할 때는 돈대 안에 비치된 무기로 방어전을 펼친다.

따라서 돈대는 주변을 잘 살피고 관측하기 쉽도록 평지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돈대를 만든 목적이 그러하다면 화도돈대가 들어선 자리는 애매하다. 바닷가의 높은 곳에 있어야 사방을 관측하기에 쉬울 텐데 화도돈대는 평지에 들어섰다.

강화에는 모두 54개의 돈대가 있는데 바다 쪽으로 툭 튀어나간 곶(串)에 위치한 돈대가 24개소나 된다. 그 외 산 정상이나 산의 사면(옆면)에 위치한 돈대는 23개이다. 평지에 있는 돈대는 몇 개 되지 않는다. 그만큼 돈대는 위치가 중요한데 화도돈대는 평지나 다름없는 곳에 들어서 있다.
  

▲ 돈대 아래 바닷가에서 만난 깨진 기왓장 조각과 도자기 파편 ⓒ 이승숙

   

▲ 물 빠진 갯벌에는 기왓장 조각과 도자기 파편들이 더러 보였다. ⓒ 이승숙


화도돈대는 삼동암천이 바다와 맞닿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수로를 통해 육지 깊숙이 들어올 적을 막기 위해 평지보다 조금 높은 언덕에 돈대를 세웠을 것이다. 그런 뜻을 알고 화도돈대를 보면 지금 보여지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

돈대라고 해서 대단한 것을 기대하고 왔는데 두어 층 쌓은 석축에 평평한 땅만 보여서 실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곳이 처했던 과거를 돌아보면 그나마 이렇게라도 복원하고 정비한 게 대단하다는 마음도 든다.

이만큼이라도 보존돼 고마운 돈대

1999년 육군박물관 조사에 의하면, 바다와 접한 동쪽은 인공시설물에 의해 훼손된 상태였으며 돈대 내부는 과수원으로 경작되고 있었다. 돈대 남쪽은 연못이 조성되어 현상 변경이 심하게 진행된 상태였다고 한다.

훼손이 심해 대포를 설치해두었던 포좌(砲座)와 출입구인 문지(門地)는 위치 추정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그나마 남아있는 일부 기단석을 통해 돈대가 네모난 형태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후 발굴 조사할 때 전반적인 문지의 모습과 성벽 아랫단의 기축부가 확인됐고, 이를 바탕으로 보수공사를 진행했다. 이후 지금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화도돈대를 부분 복원한 것은 이러한 까닭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심하게 훼손되어 포좌의 위치도 알 수 없었다. 성곽 역시 부분적으로만 복원했던 것은 그러한 까닭 때문이었을 것이다.
 

▲ 남아있는 기단석을 바탕으로 부분 복원한 화도돈대 ⓒ 이승숙

        

▲ 남아 있는 기단석과 부분 복원한 돈대 석축 ⓒ 이승숙

 
이른 봄에 가봤던 화도돈대를 강아지똥풀 꽃이 노랗게 피어나던 5월 중순에도 가봤다. 언덕 위에 우뚝 서있는 감나무에는 연두색 새순이 돋아 이 있었다. 새의 부리처럼 생긴 여린 감잎이 아름다웠다. 

장마가 잠시 멈춘 날 또 화도돈대를 찾아가봤다. 그 사이에 풀이 성성하게 세력을 뻗치고 있었다. 부지런한 손길이 돈대 주변의 풀을 다 깎아 놓아 깔끔했다. 문화재를 보호하고 관리하는 세심한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돈대의 석축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순간 길다란 게 얼핏 보였다. 막대기인가 채 생각하기도 전에 그것이 화들짝 놀라며 풀숲으로 사라졌다. 장마 중에 잠깐 내비친 햇빛에 젖은 몸을 말리려고 나온 뱀이었다.

뱀을 보고 놀랐던 것도 잠시, 모든 게 평온했다. 햇살은 뜨거웠지만 그늘에 들어서니 시원했다. 감나무 그늘 아래 서서 쉬었다. 인적 없는 돈대에서 한참을 머물다 발길을 돌려 사람 사는 동네로 돌아왔다. 
덧붙이는 글 '강화뉴스'에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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