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 예물, 가정폭력 조사까지... 조선시대 의녀들의 역할
[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MBN <세자가 사라졌다>
▲ MBN <세자가 사라졌다>의 한 장면. ⓒ MBN
MBN 사극 <세자가 사라졌다>의 최명윤(홍예지 분)은 의료인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의술에 매우 능하다. 공식적으로 의원 생활을 한 적이 없는데도 웬만한 치료는 거뜬하게 해낸다.
어의 출신으로는 이례적으로 대사헌이 된 아버지 최상록(김주헌 분)은 임금과 맞서는 입장에 서 있다. 최상록은 위독한 임금을 얼마든 고칠 수 있는데도 일부러 시간을 끈다. 그런 아버지를 옳지 않다 여기는 최명윤은 폐세자와 협력해 대전에 들어가 아버지 몰래 임금을 치료해준다.
최명윤은 세자빈으로 내정됐지만, 의원을 차려 독립하는 길을 꿈꾼다. 간판을 내걸고 '개원의'로 살아가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의원의 길에 전념하고자 하는 최명윤의 이 같은 모습은 일반 의녀들이 볼 때는 참으로 꿈만 같은 일이었다. 최명윤처럼 독립적인 의원 활동을 하지 못하고 관청에 얽매여 사는 의녀들은 의료 활동 외에도 이것저것 신경이 분산될 일이 많았다.
조선시대 여성 의료인의 현실
▲ MBN <세자가 사라졌다>의 한 장면. ⓒ MBN
조선시대 여성 의료인의 상당수는 무녀이거나 아니면 관노비였다. 무녀를 제외하면, 책으로 의술을 익힌 여성들은 주로 관노비들이었다.
음력으로 태종 18년 6월 21일자(양력 1418.7.24) <태종실록>에 따르면, 교육과 외교 등을 관장하는 예조는 의녀 증원을 태종 이방원에게 건의하면서 "청컨대, 각 관청의 비자(婢子) 중에서 나이 13세 이하인 사람 열 명을 더 뽑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요청했다. 13세 이하의 여성 공노비(관노비) 중에서 10명을 증원하자고 주청한 것이다. 조선시대 의녀 충원의 일반적인 방식을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공노비 중에서 의녀를 선발한 것은 국가가 쉽게 활용할 수 있는 여성 인력 자원이 주로 그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기에는 재정적 이유도 작용했다. 공노비는 국가와의 관계에서 인간이 아닌 물건으로 취급됐기 때문에 국가는 이들을 원칙상 무보수로 활용했다. 무보수 'AI 의료인'을 공공의료에 투입한 셈이다. 그래서 이들은 비번 날에 생업을 하든가, 아니면 수많은 관청 아전들이 그랬던 것처럼 직무를 이용해 부정한 방식으로 돈을 벌든가 해야 했다.
국가에 얽매인 공노비들이 공공기관 의녀로 충원되다 보니, 이런 의녀들은 오로지 의술에만 전념하기 힘들었다. 관청의 필요에 따라 이런저런 업무에 동원되는 경우가 흔했다. 그래서 최명윤이 꿈꾸는 개원의로 나서지 않는 한, 이들의 신경은 이래저래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경국대전>이 시행된 1485년 이후에 나온 보충적 법전들 중 하나가 <대전후속록>이다. 이 법전의 예전(禮典) 편에 따르면, 의녀들은 혼인 예물을 조사하는 임무도 맡았다. 혼인 절차가 진행되는 가문을 방문해 예물 교환에 위법이 있는지 여부를 조사하는 일도 맡았던 것이다.
▲ MBN <세자가 사라졌다>의 한 장면. ⓒ MBN
예종의 조카이자 후임자인 성종이 임금일 때인 1490년이었다. 이 해 상반기에 패륜적인 소문이 나돌았다. 예종의 부인인 안순왕후 한씨의 동생인 청천군 한환(韓懽, ?~1499)이 장인인 조지산(趙智山)을 구타했다는 풍문이었다.
이를 듣고 사헌부가 수사에 착수해보니 한환의 패륜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성종 21년 5월 27일자 (1490.6.14) <성종실록>에 따르면, 한환은 처가에 가서 장인을 꾸짖기도 했다. 그의 첩인 일지홍(一枝紅)은 조지산 집의 기물을 부수기도 했다. 다른 날에는 신음 소리가 처가의 이웃집에까지 들릴 정도로 한환이 장인을 구타하기도 했다.
폭행 대상은 장인뿐만이 아니었다. 부인 조씨도 가정폭력에 노출됐다. 한환이 주택 개축을 이유로 부인 조씨를 친정에 보내고 그 자신은 첩의 집에 머물 때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 첩의 집에 있다가 부인을 찾아간 한환은 부인이 자신과 싸우다가 이웃집 마당으로 달아나자 거기까지 쫓아가 폭행을 계속했다. <성종실록>은 한환이 남의 집 마당에 들어가 부인의 옷을 찢은 뒤 벗겨버렸다고 말한다.
인간 말종의 모습을 보여준 한환에 대한 수사에도 의녀들이 투입됐다. 그해 10월 13일자(양력 11.24) <성종실록)은 "의녀 영로(永老) 등이 한환의 부인인 조씨의 상처를 조사했다"고 보고한다. 풍문으로 나도는 한환의 가정폭력 실태를 확인하고자 남성 수사관이 아닌 여성 수사관이 나섰던 것이다.
조씨의 몸 상태를 확인한 의녀들은 주상 비서실인 승정원에 "조씨에게 상처가 많다"고 보고했다. 이들은 또 다른 피해 실태도 함께 보고했다. "또 그 집에는 비자(婢子)의 시신이 있었고, 노(奴) 한 명도 곧 죽게 생겼습니다"라는 내용이었다. 의녀들이 방문했을 때에 여자 노비가 죽어 있고 남자 노비가 치명상을 입은 상태로 있었던 것이다.
이 해에 33세인 성종 임금은 한환의 장인 폭행에 대해 장형 100대와 고신(告身, 임명장) 회수를 선고했다. 곤장 100대를 맞으면 웬만한 사람은 죽었다. 하지만 속죄금을 바치고 장형을 면죄한다는 단서가 붙어 한환은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성종은 한환의 나머지 범죄인 여자 노비 살해, 남자 노비 폭행(또는 살인미수) 및 부인 폭행에 관해서는 '한양 밖으로 부처(付處)하고 부부를 이혼시키라'는 선고를 내렸다. 한양 밖으로 유배 가는 한환이 부부의 연을 더 이상 가질 수 없게 한 것이다.
왕실 외척이 패륜적인 살상을 저지른 중대 사건이었다. 이런 사건에서 의녀들의 가정폭력 조사 결과가 성종 임금의 판결 선고에 영향을 끼쳤다. 의녀들이 보건뿐 아니라 형사사법에서도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 외에도 의녀들은 다양한 일을 했다. 범죄자 체포에 나서기도 하고, 임금의 행차 때 의장대 대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환자를 돌보는 중에도 갑작스런 역할 변동에 항상 대비하고 있어야 했다. 의술에만 전념해도 시원찮을 의녀들을 국가가 이리저리 혹사시켰던 것이다. <세자가 사라졌다>의 최명윤과 달리 국가에 얽매인 공공기관 의녀들은 그런 부담을 숙명으로 안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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