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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국엔 '이사부'가 사수도엔 '최강 장군'이 있었다

등록|2024.06.10 10:43 수정|2024.06.10 10:43

▲ 최강장군 승첩 기념비 ⓒ 완도신문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지증 마립간 13년(서기 512) 6월, 우산국이 복종하여 해마다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기로 하였다. 우산국은 명주의 동쪽 바다에 있는 섬으로 울릉도라고도 불렸다. 땅은 사방 백 리인데,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그곳 사람들이 항복하지를 않았다.

이찬 이사부가 하슬라주 군주가 되어 말하기를 "우산국 사람은 어리석고도 사나워서 힘으로 다루기는 어려우니 계책으로 복종시켜야 한다"며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전함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에 이르렀다.

이사부가 다그치며 말하기를 "너희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사나운 짐승을 풀어 밟아 죽이겠다"고 하자 그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즉시 항복했다. 울릉도와 독도가 최초 우리의 영토가 된 배경이다.

비슷한 상황이 완도에도 있었다. 가리포진 제59대 첨사로 재직한 최강의 이야기다.

1605년 6월 8일, 남망산 망왜대의 봉직이 외쳤다. "사수도 해역에서 왜적들이 가리포를 향해 온다" 곧바로 척후병이 첨사에게 전갈했다. 그러나 7년 전란으로 전력이 약해진 가리포진 수군은 병력 150여 명과 판옥선 1척, 병선 5척 뿐이었다.

30여척 넘는 왜적을 정면 대결로는 어렵다고 판단해 최강은 군사를 매복케 하고 도망가는 척하며 적을 속여 석장포로 유인했다. 그는 물때와 석창포의 지형을 이용해 적의 일부를 만으로 유인해 권응수, 정세아 등과 함께 화공법으로 왜적을 격멸시켰다.

일시에 공격당한 왜선 30여척은 순간 화염에 쌓여 겨우 3척만 남아 탈출을 시도하여 사수도 해역으로 도망갔다. 최강은 끝까지 추격하여 한 사람도 살려 보내지 않고 전멸시켰다. 이 전투에서 우리 수군은 한 사람도 희생된 사람이 없었고, 군선도 어디 한군데 파손된 곳이 없었다.

최강(崔堈 1559∼1614)의 고향은 고성으로 임진왜란 때 민병을 모아 진주와 고성에서 큰 공을 세웠다. 1585년(선조 18) 무과에 급제한 그는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그의 형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김시민 장군과 합세하여 진주성 싸움에서 공을 세웠다. 1593년 김해로부터 웅천에 침입하려는 적을 격퇴해서 전과를 올렸고, 1594년 김덕령의 의병장으로도 활약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조정에서는 그의 공을 인정해 제59대 가리포 첨사로 임명했다. 7년 전쟁은 마무리 됐지만, 이후에도 왜구의 침탈은 계속 이어졌다.

석장포 전투의 승전이 알려지면서 조정에서는 그에게 큰 상을 내리고, 최강은 순천부사를 거쳐 경상수사로 영전하는 혜택을 얻었다. 그 후 최강 첨사는 충청수사를 거처 포도대장까지 추대되었으나, 지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고성에서 생을 마감한다. 고향에서 최강 첨사가 사망했다는 전갈을 받은 가리포진 유지들이 그곳까지 찾아가 3년 상을 치르고 돌아왔다고.

그는 1816년(순조 16) 그의 형인 최균과 함께 병조판서에 추증됐고, 고성의 도산서원에 제향 됐다. 그의 시호는 의숙(義肅), 대첩비는 완도읍 석장포가 바라다 보이는 곳에 건립돼 있다.

최강 첨사는 사수도 해역을 지키는 것이 가리포진을 사수하는 것이라 여겼다. 석장포 앞 바다를 계속해서 나가면 넓은 바다가 사수도 해역이다. 조선 시대에는 청산도에 진을 설치하고, 사수도 해역을 우리의 관할권에 포함시켰다.

석장포 전투의 승리는 가리포진 방어의 최후 승첩으로 기록되었고, 완도의 해양영토가 사수도 해역임을 분명하게 알려줌으로써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석장포 전첩비 후면에는 최강 장군의 승첩에 관한 기록과 사수도 해역을 지켜낸 전적을 기념해 1993년 2월 완도군이 기념비를 세우면서 장수도(障水島)의 이름을 명확히 기록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글쓴이는 정지승 문화예술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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