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번째 책... 글 쓰는 동력은 열등감과 무력감"
[인터뷰] <해저 연애 통신> 출간한 시인 이병철
▲ 청소년 시집 <해저 연애 통신>을 펴낸 이병철 시인. ⓒ 구창웅 촬영
1408일 동안 한 언론사에 칼럼을 연재했다. 3년 6개월의 짧지 않은 시간. 그럼에도 단 한 번 자신의 원고를 '펑크' 낸 적이 없다. 그 사람이 타자와 맺은 약속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한국에서 대학 시간강사(비전임 교원)란 '3D 업종'에 가깝다. 그 일을 얻기까지의 시간과 노력은 경제적 이익과 무관하다. 이병철은 대학 시간강사다. '돈이 되지 않는' 그 일을 유지하기 위해 중고 오토바이를 구입해 음식 배달까지 했지만, 그때도 절망하거나 얼굴을 찌푸리지 않았다.
바로 그 이병철이 최근 '청소년 시집'을 출간했다. 이 시인의 10번째 책이다. 기자에겐 이번 출간이 '의외의 이벤트'로 느껴졌다. 그의 활동 영역이 앞으로 얼마나 더 확장될 것인지 예측하는 건 쉽지 않다. 다만, 어째서 '청소년을 위한 책'을 썼는지는 궁금했다. 더불어, 아직도 '앞길이 구만 리'인 그의 향후 계획까지 묻고 싶었다.
아래는 그 의문을 풀기 위해 지난주 몇 차례의 전화 통화와 이메일을 통해 이병철과 주고받은 이야기를 간략하게 요약한 것이다.
사춘기 청소년의 내면은 미지의 세계
▲ 청소년 시집 <해저 연애 통신>의 표지. ⓒ 쉬는시간
- 시인이기에 시집을 내왔고, 평론집과 산문집도 출간했다. 그러나, 청소년 시집 출간은 의외로 다가온다. <해저 연애 통신>을 내고자 결심한 이유나 계기는.
"가까운 선배인 김성규 시인이 어느 날 내가 쓴 시 한 편을 보더니 청소년들을 위한 시로 바꿔 보면 좋겠다고 했다. 호기심이 생겼는데 아예 자연, 낚시, 학창 시절 등을 소재로 50편쯤 시를 써서 책으로 묶으면 어떨까 하는 제안을 받고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0년 전 서대문구 성산지역아동센터에서 저소득층 아이들과 동시 창작 수업을 했고, 또 몇 해 전에는 단대부고 문학동아리 지도 교사를 맡은 적이 있다. 그때 아이들이 참 좋았다. 청소년 문학에 대한 생각이 없지 않았다."
- 흥미 유발 차원에서 제목을 잘 정한 것 같다. <해저 연애 통신>은 누가 지은 제목이고, 어떤 의미이며, 제목을 결정한 사람은 누군가.
"원래 제목은 <나, 너한테 낚였어!>였는데, '낚시'라는 소재가 너무 부각되는 느낌도 있고, '낚다'에 보이스피싱이나 스미싱 같은 신종사기 수법을 연상시키는 데가 있다며 출판사에서 <해저 연애 통신>으로 바꿨다. 바뀐 제목을 보자마자 좋아서 박수를 쳤다. 출판에 있어서는 역시 저자가 편집자의 감각을 따라가지 못한다.
깊은 바다 속은 뭐가 있을지 모르는 미지의 세계다. 사춘기 청소년의 내면도 저 바다 속처럼 무궁무진하며 무한한 잠재력과 꿈들로 가득하지 않나. 이 시집은 어른들이 모르는 청소년들만의 비밀스런 세계에서 알록달록한 산호초처럼, 은빛 정어리떼처럼 다채롭게 반짝이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시집 제목이 바뀌고서 보니 표제작이 필요할 것 같아 '해저 연애 통신'이라는 시를 서둘러 썼는데 마음에 든다."
- 조금은 무지한 질문일 수 있다. 우리가 통칭하는 '시'를 쓸 때와 '청소년 시'를 쓸 때는 뭐가 다르고, 어떤 게 같은가. 또, '시'와 '청소년 시' 중 어떤 게 쓰기 어렵나. 청소년이 읽을 시를 쓸 때는 무언가를 의식하고 쓰는 것인지.
"둘 다 어렵지만 역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시가 좀 더 쉽고, 쓰면서도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운 관념이나 잠언, 화려한 기교나 수사를 배제하고 내가 청소년 화자가 되어 또래 친구와 마주앉아 있다고 생각하며 시를 썼다. 시를 읽는 청소년 독자들도 시 속 화자를 어른이 아닌 친구로 느꼈으면 하는데 그렇게 될는지 모르겠다.
청소년이 읽을 시에서는 아무래도 가독성과 흥미요소, 그리고 무엇보다 여리고 예민한 감수성과 그들만의 세대 문화에 부합하는 공감대가 중요하다. 그리고 학부모, 교사들과 함께 읽는 시라는 것도 고려해서 청소년들이 간혹 지닐 수 있는 지나친 과격성이나 자극적인 반항기 같은 걸 걷어내려 했다."
- 이번 시집엔 적지 않은 시가 수록됐다. 기획부터 집필-퇴고-출간까지 걸린 기간은 어느 정도인가. 출간 과정에서 가장 힘겨웠던 순간은.
"기획은 꽤 오래 전에 됐다. 2019년 초에 청소년 시집을 써보라는 권유를 받고 겨울방학을 이용해 두어 달 동안 시집 한 권 분량을 탈고했다. 산문집과 평론집 등 다른 책들이 나올 예정이라 청소년 시집 출간은 그 다음으로 미루었는데, 출판사에서 원고가 좋으니 우수출판콘텐츠 등 지원 사업 수혜를 받아서 내면 어떻겠냐고 해서 그렇게 한 해 두 해 사업에 응모하고 탈락하고를 반복하느라 출간이 다소 늦어졌다.
올해 경기도와 안양문화예술재단 지원 사업인 '모든예술31'의 수혜를 받아 원고가 완성된 지 5년 만에 출간되게 됐다. 출간 과정에서 힘들었던 건 역시 지원 사업 응모에서 탈락했을 때다. 이제 우수출판콘텐츠 지원 사업은 아예 폐지가 되었는데, 문학 출판 시장이 위축되는 것 같아 아쉽다."
-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있을까'만은 <해저 연애 통신>에서 딱 한 편만 골라 읽어야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걸 추천하는가. 그리고, 추천의 이유는.
"미학적인 시, 메시지가 좋은 시, 핍진한 페이소스가 재현되는 시 등 추천하고 싶은 시가 여럿 있지만 지금 마음으로는 표제작 '해저 연애 통신'을 꼽고 싶다. "여기는 비밀, 우리만의 세상"에 어른들이 너무 많이 개입하지 않았으면 해서다. 청소년들을 개성과 취향과 자의식을 지닌 독립된 인격으로 존중해줬으면 좋겠다. 어른들이 원하는 무엇이 되기보다 "나는 네가 원하는 뭐든지 될 수 있어"라고 짝사랑 상대 아이에게 큰소리치는 낭만은 오직 그 시절에만 가질 수 있는 순수함이다. 청소년들의 그 순수함을 예쁘게 봐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 시를 추천한다."
학생들 눈빛... 인생의 가장 큰 보람
▲ 이병철 시인과 선후배·동료 작가, 독자들이 함께 한 북 콘서트. ⓒ 이병철 제공
- 선후배 작가와 독자들 사이에서 시집과 산문집 출간 후와는 다른 반응이 있었을 것 같다. 어땠나.
"재밌게 읽었다는 반응이 많다. 내 청소년기가 자전적으로 담겨 있는 시들도 있어서 시를 읽으며 시인을 알게 됐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몇몇 시들에는 사람 이름이 나오는데 거의 다 친구들이나 주변인들 이름을 가져다 쓴 것이다. 시집 출간 전에 친구들한테 '네 이름이 나온다'고 하자 다들 흔쾌히 기뻐했다. 다만 어떤 인물로 등장하는지, 어떤 내용인지는 얘길 안 해줬는데, 시집을 읽고 나서 얼굴이 빨개지는 녀석들도 있을 것 같다."
- 책의 마지막에 당신의 '낚시 사랑'이 읽히는 글이 실렸다. 당신이 청소년에서 어른으로 커가는 과정에서 시(詩)와 낚시 외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건 뭔가.
"역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부모님과 가족의 조건 없는 그 무한한 사랑. 어릴 때는 그것이 사랑인 줄 몰랐다. 티브이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끌어안고 쓰다듬고 "사랑해"라고 말해야 사랑인 줄 알았다. 하지만 가세가 기울어 넉넉지 못한 형편에서도 당신들의 삶을 다 제쳐두고 자식을 위해 사셨다. 그 억척스럽고 지난한 삶에서 다정함이나 살가움 같은 게 참 힘들고 어렵다는 걸 나이 먹으니 좀 알 것 같다. 어떻게 해서든지 대학에 보내야 한다, 삼시세끼 먹이며 공부를 시켜야 한다는 부모님의 그 일념이야말로 가장 뜨거운 사랑이었다."
- 이번 책이 10번째 저서라고 들었다. 당신 나이를 감안하면 적지 않은 숫자다. 그처럼 맹렬한 집필의 에너지는 어디에서 오는 건지.
"술 마시고 놀고 낚시 다니고 여행 가는 등 바깥으로 보이는 한량의 생활이 압도적인 것 같아도 실은 보이지 않는 방 안에서 읽고 쓰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항상 무엇이든 써야 한다는, 강박에 가까운 삶의 태도가 있는 듯하다. 가장 큰 동력은 열등감과 무력감이다. 어떤 글을 써도 만족스럽지 않다.
시를 쓰면 마음에 들지 않아 산문을 쓰고 산문을 쓰면 또 마음에 들지 않아 비평을 쓴다. 비평이 형편 없어 다시 시를 쓴다. 벌써 10년 가까이 매주 혹은 격주 쓰고 있는 신문 칼럼은 문학적 글쓰기를 위한 일종의 준비 운동으로 여긴다. SNS에 게시물을 올릴 때도 장문을 쓰는 편이다. 누가 읽건 말건. 글을 쓰지 않으면 스스로 쓸모없는 인간이라 여긴다. 나에게 쓸모란 use이자 write다."
- 다음으로 준비하고 있는 책은 뭔가.
"세 번째 시집의 원고가 꽤 모였는데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50편쯤 되는데 그중 20~30편은 버리고 새로 쓰고 싶다. 다음 책으로는 시집이 가장 앞줄에 있고, 박사학위 논문을 조금 라이트한 학술서적으로 고쳐 출간할 생각도 있다. 2019년에 연재한 '경북 바닷길 기행문'에다 다른 지역 여행기를 합해 전국 기행으로 완성한 가칭 '길에서 부르는 노래'라는 원고가 있는데, 참 애착이 가고 마음에 들지만 출간은 쉽지 않아 보인다. 책을 내줄 출판사가 있으면 좋겠다. 일전에 한 출판사가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의 평전을 써보자고 제안했는데, 아직 시기상조라 여겨 정중히 거절했다. 클라라 주미 강의 팬으로서 언젠가는 꼭 책을 쓰고 싶다."
-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꾸준히 하고 있다. '문학을 가르치는 시간강사'는 어떤 보람과 어려움이 있는지.
"비전임 교원으로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건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늘 괴로워해야 하는 일이다. 출강하는 두 학교에서 초빙교수로 있지만 사실 시간강사의 다른 이름이나 마찬가지다. 강의와 학생 지도, 상담에만 전념할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이 되질 않으니 외부강의나 집필활동, 부업 등을 겸할 수밖에 없다.
내 경우엔 지난해까지 배달 라이더로 일했다. 비전임 교원은 방학에 급여가 지급되지 않고, 건강보험도 지역가입자로 전환된다. 그리고 학교에 연구실이나 휴게실이 될 만한 공간 또한 제공되지 않으므로 강의와 강의 사이 휴식이나 학생 상담 같은 게 어렵다.
이번 학기 화요일엔 아침 10시부터 13시까지, 13시부터 16시까지, 16시부터 18시까지, 18시부터 21시까지 시간표상으로는 쉬는 시간이 1분도 없이 11시간 연강을 하고 있다. 잠깐 쉬거나 밥이라도 먹으려면 수업을 일찍 끝내는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학생들의 수업권이 침해된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에도 학생들과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시가 좋아서, 소설이 좋아서 반짝이는 그 눈빛들을 보는 일은 인생의 가장 큰 보람이다. 학생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볼 때, 수업을 통해 무언가 얻어갈 때 정말 기쁘다. 강의실 밖에서 술 사주는 것도 강사의 행복이다. 월급을 술값으로 다 써도 학생들 사주는 건 아깝지 않다."
청소년, 교사, 학부모 모두에게 권한다
▲ 독자를 위해 자신의 책에 사인을 해주는 이병철 시인. ⓒ 이병철 제공
- 멀리 10년 후를 내다보는 당신의 장기계획이 궁금하다.
"장기계획이라는 걸 딱히 가져본 일이 없다. 실업계고등학교에 다닐 때 지하 납땜 실습실에서 '전문대 문창과 입학-4년제 편입-육군 학사장교-대학원 진학-석사 및 박사-등단-책 출간-강의'라는 10여 년의 단계적 꿈을 꿨고 운이 좋아 정말 그대로 됐다.
현실적으로는 대학의 전임 교원이 되는 걸 최우선 계획으로 삼아야 하는 게 맞는데, 이상적으로는 잘 모르겠다. 그저 계속 글을 쓸 수만 있다면, 지금 사랑하는 것들을 계속 사랑하면서 살 수만 있다면 좋겠다."
- 마지막으로 덧붙일 말이 있다면.
"청소년 시집 <해저 연애 통신>은 청소년들이 읽기 좋은 책인 동시에 학부모와 교사들도 함께 읽어볼 만하다. 시집에는 여름방학의 계절감이 주로 펼쳐져 있는 만큼 곧 다가올 여름방학 동안 부모와 자녀가 함께, 교사와 학생이 함께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모든 분들에게 푸른 바다를 달리는 은빛 물고기떼처럼 맹렬하게 반짝이는 행복이 가득하길 기원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경북매일>에 게재된 것을 일부 보완한 것입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