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소년의 우정 영화, 제주 건천의 개발 문제를 담다
[2023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20] 큐레이션 08 만남은 언제나 고독의 친구, <유빈과 건>
▲ 영화 <유빈과 건> 스틸컷 ⓒ 인디그라운드
*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근데 나 꼭 여기서 나가야 돼?"
영화 <유빈과 건>에는 두 소년이 있다. 건천 인근에 형성된 숲 속에서 작은 동굴을 거처 삼아 지내고 있는 건(장시우 분)과 그를 만나러 찾아오는 친구 유빈(윤희성 분)이다. 두 사람은 물길만 남은 채로 암석이 노출된 공간에서 다른 사람은 침범할 수 없는 그들만의 시간을 보낸다. 감춰진 채로 평화로울 줄만 알았던 두 사람의 공간에도 문제는 발생한다. 숲 속의 나무 곳곳에 묶인 채로 늘어진 공사 예정구역 표식들이 발견되면서다. 그 표식의 끝에는 건의 거처가 있다. 예정대로 공사가 시작된다면 두 사람이 헤어져야 할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02.
건천 지역을 개발하려는 시도를 막아보기 위한 두 사람의 노력이 시작된다. 나무에 묶인 표식을 모두 찾아 풀며 공사 구역이 아닌 것처럼 위장해보기도 하고, 제주특별자치도청을 찾아가 하릴없이 무작정 기다려보기도 한다. 혹시 모르는 상황을 대비해 유빈은 엄마(진정아 분)에게 건이 집에서 함께 지낼 수 있는지 묻기도 한다. 그는 거처를 잃게 될지도 모르는 건 본인보다 훨씬 더 분주한 모습이다. 상황은 소년의 노력으로는 벌써 손 쓸 도리가 없을 정도가 되어버린 후다. 어떤 종류의 요청도 모두 기각된다. 두 사람이 제거한 끈표식의 자리에는 흰 페인트가 대신하고 있고, 숲 초입에서는 공사가 이미 진행되고 있다.
친구의 문제인 것을 떠나 건천 지역을 굳이 왜 공사해야 하는지도 유빈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 공사가 끝나고 나면 더 이상 길을 멀리 돌아서 다니지 않아서 좋다는 엄마와 형(강동언 분)의 말만 원론적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대화가 등장하는 가족의 식탁 위에는 'Save our earth'라는 문구가 쓰인 머그컵이 놓여 있다.) 그 숲에 나무와 새가 있다고 누가 좋아하느냐고 반문하는 형의 말에서는 이제껏 느끼지 못했던 거리감이 느껴진다. 공간의 일부가 되길 원하는 쪽과 공간을 이용하길 원하는 쪽의 거리, 혹은 그 공간에 소중한 존재를 두고 온 쪽과 그렇지 않은 쪽의 간극이다.
▲ 영화 <유빈과 건> 스틸컷 ⓒ 인디그라운드
03.
유빈이 건천 지역과 그곳에서 머물고 있는 건을 지켜내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동안 엄마는 아들이 감추고 있던 것들의 꼬리를 조금씩 밟아가기 시작한다. 매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친하게 지낸다는 친구도, 학교가 끝나고 나면 참여한다던 방과 후 수업도 모두 거짓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고유하고도 특별한 시절을 부모가 개입되는 사정으로부터 한 뼘 떨어뜨려 놓으려는 시도다. 언제 들키게 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때까지는 건과 함께하는 이 시간을 이어가겠다는 마음. 그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는 엄마에게는 한참이나 멀게 느껴질 거리다.
유빈의 한 시절이 완성된 건천에서 엄마는 그가 그동안 감춰온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엄마가 자신을 보고 있는지도 모르고, 여전히 건천을 떠날 줄 모르는 건을 향해 답답함을 쏟아내는 유빈. 카메라는 은밀한 태도로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만을 선택적으로 담아낸다. 영화의 처음에서 등장했던 할망은 유빈의 가족이 여기를 떠나서 살아야 한다고, 이렇게 계속 살면 손가락질을 받게 될 팔자라고 경고했던 바 있다. 엄마는 그제야 그 말 뜻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자신의 아들에게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04.
"여기 꼭 있어. 다시 돌아올게."
그렇게 막고 싶어하던 이별의 순간은 이제 건의 쪽이 아니라 유빈의 쪽으로부터 시작된다. 건천에서 시작된 공사 때문도 아니고, 그로 인해 쫓겨나는 건의 처지 때문도 아니다. 할망이 경고했던 대로 엄마는 가족 모두와 함께 서울로 옮겨갈 결심을 한다. 먼저 떠나는 것은 역시 유빈이다. 어떤 사건의 시작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예상하지 못하는 순간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미 시작되어 버린 일은 쉽게 멈추거나 붙잡을 수 없다. 엄마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했던 그의 거짓말처럼.
영화 속 유빈의 모습으로부터 어린 시절 경험했을 법한 여러 종류의 모습들이 떠오른다. 괜히 자신만의 비밀 하나쯤 만들고 싶어 했던 마음,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작고 하찮은 노력을 기울이던 태도, 그리고 좋아했던 무엇인가를 떠나보내며 경험한 낯선 슬픔의 감정까지. 모두가 어린 시절의 것이라고,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하는 것이라고 모두 쉽게 여겨지는 대상이다.
다시 돌아오겠다는 굳은 다짐을 뒤로하고 건천을 떠나게 되는 유빈이지만, 어쩌면 그 역시도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되고 몇 번의 비슷한 감정적 경험을 성취한 후에는 비슷한 어른이 될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면 건천 지역이 개발되는 이유에 대해서도 자신이 남겨두고 간 약속의 헛됨에 대해서도 이해하게 될 테다. 다만 어린 시절의 건을, 그와 함께했던 건천을 잊지 않는 한, 유빈은 또 다른 시절을 소중한 이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어른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우리는 그렇게 성장한다.
덧붙이는 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설립하고 한국독립영화협회에서 운영 중인 인디그라운드(Indieground)는 2024년 2월 15일(목)부터 총 18개의 큐레이션을 통해 ‘2023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선정작 92편(장편 22편, 단편 70편)을 소개/상영할 예정입니다. 여덟 번째 큐레이션인 '만남은 언제나 고독의 친구'는 6월 1일부터 6월 15일까지 보름간 인디그라운드 홈페이지를 통해 회원 가입 후 무료로 시청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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