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미술에서 담은 '여성'의 존재
호암미술관 전시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관람 후기
미켈란젤로가 그린 <천지창조>는 그림에 문외한이라 해도 알 만한 작품이다. 하지만, 우리는 같은 종교 미술임에도 <천지창조>는 익숙하지만, 정작 <팔상도>라던가 <관음보살도>와 같은 불교 미술은 낯설다.
바티칸 성당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그려진 천지창조는 600여 미터가 넘는 거대한 공간에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들로 채워져 있다. 지금 우리에게는 불세출의 명작으로 기억되지만 그 작품을 미켈란젤로에게 그리게 한 건 대부분 글을 몰랐던 당시의 사람들이 그 '그림'만으로 구약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로의 거대 예수상을 비롯하여, 라파엘로의 성모자상 등은 예배와 기원의 '오브제'이다. 이렇게 기독교에 많은 성화와 성물이 있듯이, 불교 역시 불교의 교리를 대중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그리고 예배를 위한 작품들을 생산해 왔다. 이렇듯 대중화된 기독교, 일반화된 서양 기독교 문명과 달리 오랜 역사에도 불교 문화에 대한 접근은 쉽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오는 16일 피날레를 맞이하는 호암미술관의 전시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3.26~6.16)은 불화를 전시하여 알린다는 취지를 넘어, 오늘날의 시각에 맞춰 불교 미술을 재해석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불교 미술 속 여성에 주목하다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에서 주목한 것은 바로 '여성'이었다. '젠더'라는 관점에서 우리나라를 넘어 중국, 일본을 망라한 동아이상 미술을 조망하고자 한 것이다. 젠더라는 관점에서 본 불교 미술이라니?
여성은 하나의 성적 주체이다. 하지만 성적인 규정을 넘어 다양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해 왔다. 오늘날 '페미니즘'을 굳이 내세우지 않더라도 여성은 더 이상 성적인 존재만으로 그 삶의 역할을 제한하지 않는다. 그런데 반해, 전근대 사회의 특징 중 하나는 여성을 사회적으로 규정된 특정 역할로만 한정하여 자리매김 한다는 것이다.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이라는 제목에서도 보여지듯이 진흙 속에서도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연꽃처럼 불교라는 종교적 영역에서 제한성을 두었더라도 그 속에서 여성은 나름의 존재성을 드러냈다고 전시는 해석하고 있다.
전시는 불교 미술 속 다양한 캐릭터로 설명되는 여성들을 모아 놓는다. <팔상도>는 석가모니가 태어나서 열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여덟 장면으로 설명한 그림이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여성의 존재는 부처를 낳은 어머니 마야 부인이거나, 어머니 대신 석가모니를 키워준 이모이다. 즉 기독교의 성모 마리아처럼 불교 속 여성의 존재는 제일 먼저 '어머니'로 그려진다.
성스러운 어머니와의 대척점에 정념에 사로잡힌 인간 여성의 모습이 있다. 그런 모습을 가장 적나라하게 그려낸 작품이 <구상도>로, 이번 전시에서는 보스턴 미술관이 소장 중인 에도 시대 화가 기쿠치 요사이의 작품이 가장 눈에 띈다.
아리따운 여성, 하지만 그 아름다움도 잠시 그녀가 부패되어 썩어가는 시신의 모습이 9단계로 묘사된다. 이를 통해 삶과, 육신의 무상함을 깨닫는다. 마찬가지로 <시왕도> 속 이제 막 저승으로 끌려와 10명의 저승 왕에게 심판을 받은 여성은 옷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모습이다. 심판을 받고 끌려나가는 여성의 다리를 그녀의 자식인 듯한 아이가 잡아당기는데, 같은 '어머니'임에도 그 존재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런 무상함을 거쳐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중생을 제도하는 관세음보살 또한 여성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원래 '보살'은 인간 상위의 존재로 성적으로 규정된 대상이 아니었지만 '자비'의 상징으로서 '여성성', 특히 모성성이 가미되어 점차 여성의 모습으로 상징화되었다고 한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수월관음보살도> 등의 불화와 함께 백자나 금동으로 만들어진 관음보살입상 등이 보여진다. 특히 1907년 부여에서 발견된 보기드문 백제의 <금동관음보살입상>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전시된 작품이다. 최초라는 수식어를 차치하더라도 한 뼘도 되지 않은 작은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물결치듯 유려한 옷자락의 섬세한 모습에 그 작품성의 가치를 수긍케 한다.
흥미로운 건 18세기 청나라 덕화요의 백자 작품들 사이에서 보여진 동서양의 서로 다른 종교적 접근이다. 똑같이 아이를 안고 있는 여성의 모습인데 불교적으로는 아이를 돌보고 낳게 해준다는 송자관음보살상이 만들어졌다면, 기독교적으로는 성모 마리아 상이 등장한다.
이처럼 전시를 통해 동서양의 서로 다른 종교적 접근이라던가, 같은 대상에 대한 한, 중, 일 삼국의 서로 다른 묘사, 그리고 각 나라가 주요하게 천착했던 작품들을 보며 문화적 차별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된다.
그런가 하면 한때는 '나쁜' 존재였지만 각성하여 불성의 존재로 거듭난 이들도 있다. 인도의 토속신앙 여신이었던 얼굴이 세 개 팔이 여덟 개인 마리시가 불교에 흡수되어 수호신이 되었다. 고려 시대 작품인 은제 마리지천 좌상은 케이스와 함께 목에 매달거나 벽에 걸어두는 용도로 만들어졌다.
만화를 좀 봤다면 익숙한 인물도 있다. 바로 <손오공>에 등장했던 우마왕의 아내 나찰녀이다. 파초선으로 화염산 불길을 부쳐대던 그녀, 그런데 이 만화 속 악인은 가공인물이지만 <법화경> 속 사람을 잡아먹던 10명의 악귀가 그 유래이다.
이들 나찰녀들은 석가모니에 귀의하여 불법을 수호하게 되었다는데, <석가여래오존 십나찰녀도>에서 그 모습을 그려낸다. 특히 일본 귀족 여성들이 자신들과 같은 여성의 모습을 한 나찰녀들에게 동질감을 많이 느꼈던 듯하다.
사람을 잡아먹기로 치면 1만 명의 자식이 있는데도 남의 자식을 훔쳐 잡아먹던 귀자모만 할까. 전시된 <게발도>는 석가모니가 귀자모의 아이를 발우 그릇에 숨기고 귀자모가 부하들을 동원하여 아이를 들어올리려 애쓰는 모습을 그려낸 장면이다.
이 시련을 겪고 자기 아이만큼 남의 아이도 소중하다는 걸 깨닫고 아이들의 수호신으로 거듭났다고. 이처럼 전시된 그림 한 점 한 점을 통해 우리가 몰랐던 불교의 다양한 여성신들은 물론, 그 신들을 통해 우리가 미처 몰랐던 동아시아의 고전을 만나게 된다.
전시는 그저 작품 속 대상을 넘어 불교 미술 생산에 적극적이었던 여성들을 조망한다. 조선 시대 국가는 유교라는 이데올로기로 움직였지만 그 그늘에서 많은 불교 행사를 주관하고 불교 미술을 후원했던 건 바로 여성이었음을 전시는 보여주고 있다.
전시회는 불교를 몰라도, 혹은 불교를 안다면 더욱 흥미롭게 볼 수 있었던 내용이었다. 하지만 전시에서 불교는 그저 특정 종교로만 한정짓기는 아쉽다. 외려 오랜 시간 동안 동아시아 문명의 한 축으로서 굳건하게 자리잡은 정신적 세계관으로서 불교에 대한 신선한 학습의 시간이었다. 또한 그 속에서 저마다의 캐릭터로 존재감을 뽐내던 여성의 모습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 호암미술관
바티칸 성당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그려진 천지창조는 600여 미터가 넘는 거대한 공간에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들로 채워져 있다. 지금 우리에게는 불세출의 명작으로 기억되지만 그 작품을 미켈란젤로에게 그리게 한 건 대부분 글을 몰랐던 당시의 사람들이 그 '그림'만으로 구약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로의 거대 예수상을 비롯하여, 라파엘로의 성모자상 등은 예배와 기원의 '오브제'이다. 이렇게 기독교에 많은 성화와 성물이 있듯이, 불교 역시 불교의 교리를 대중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그리고 예배를 위한 작품들을 생산해 왔다. 이렇듯 대중화된 기독교, 일반화된 서양 기독교 문명과 달리 오랜 역사에도 불교 문화에 대한 접근은 쉽지 않았다.
▲ 구상도 ⓒ 호암미술관
불교 미술 속 여성에 주목하다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에서 주목한 것은 바로 '여성'이었다. '젠더'라는 관점에서 우리나라를 넘어 중국, 일본을 망라한 동아이상 미술을 조망하고자 한 것이다. 젠더라는 관점에서 본 불교 미술이라니?
여성은 하나의 성적 주체이다. 하지만 성적인 규정을 넘어 다양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해 왔다. 오늘날 '페미니즘'을 굳이 내세우지 않더라도 여성은 더 이상 성적인 존재만으로 그 삶의 역할을 제한하지 않는다. 그런데 반해, 전근대 사회의 특징 중 하나는 여성을 사회적으로 규정된 특정 역할로만 한정하여 자리매김 한다는 것이다.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이라는 제목에서도 보여지듯이 진흙 속에서도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연꽃처럼 불교라는 종교적 영역에서 제한성을 두었더라도 그 속에서 여성은 나름의 존재성을 드러냈다고 전시는 해석하고 있다.
전시는 불교 미술 속 다양한 캐릭터로 설명되는 여성들을 모아 놓는다. <팔상도>는 석가모니가 태어나서 열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여덟 장면으로 설명한 그림이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여성의 존재는 부처를 낳은 어머니 마야 부인이거나, 어머니 대신 석가모니를 키워준 이모이다. 즉 기독교의 성모 마리아처럼 불교 속 여성의 존재는 제일 먼저 '어머니'로 그려진다.
성스러운 어머니와의 대척점에 정념에 사로잡힌 인간 여성의 모습이 있다. 그런 모습을 가장 적나라하게 그려낸 작품이 <구상도>로, 이번 전시에서는 보스턴 미술관이 소장 중인 에도 시대 화가 기쿠치 요사이의 작품이 가장 눈에 띈다.
아리따운 여성, 하지만 그 아름다움도 잠시 그녀가 부패되어 썩어가는 시신의 모습이 9단계로 묘사된다. 이를 통해 삶과, 육신의 무상함을 깨닫는다. 마찬가지로 <시왕도> 속 이제 막 저승으로 끌려와 10명의 저승 왕에게 심판을 받은 여성은 옷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모습이다. 심판을 받고 끌려나가는 여성의 다리를 그녀의 자식인 듯한 아이가 잡아당기는데, 같은 '어머니'임에도 그 존재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묘사된다.
▲ 수월관음보살도 ⓒ 호암미술관
그런 무상함을 거쳐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중생을 제도하는 관세음보살 또한 여성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원래 '보살'은 인간 상위의 존재로 성적으로 규정된 대상이 아니었지만 '자비'의 상징으로서 '여성성', 특히 모성성이 가미되어 점차 여성의 모습으로 상징화되었다고 한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수월관음보살도> 등의 불화와 함께 백자나 금동으로 만들어진 관음보살입상 등이 보여진다. 특히 1907년 부여에서 발견된 보기드문 백제의 <금동관음보살입상>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전시된 작품이다. 최초라는 수식어를 차치하더라도 한 뼘도 되지 않은 작은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물결치듯 유려한 옷자락의 섬세한 모습에 그 작품성의 가치를 수긍케 한다.
흥미로운 건 18세기 청나라 덕화요의 백자 작품들 사이에서 보여진 동서양의 서로 다른 종교적 접근이다. 똑같이 아이를 안고 있는 여성의 모습인데 불교적으로는 아이를 돌보고 낳게 해준다는 송자관음보살상이 만들어졌다면, 기독교적으로는 성모 마리아 상이 등장한다.
이처럼 전시를 통해 동서양의 서로 다른 종교적 접근이라던가, 같은 대상에 대한 한, 중, 일 삼국의 서로 다른 묘사, 그리고 각 나라가 주요하게 천착했던 작품들을 보며 문화적 차별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된다.
그런가 하면 한때는 '나쁜' 존재였지만 각성하여 불성의 존재로 거듭난 이들도 있다. 인도의 토속신앙 여신이었던 얼굴이 세 개 팔이 여덟 개인 마리시가 불교에 흡수되어 수호신이 되었다. 고려 시대 작품인 은제 마리지천 좌상은 케이스와 함께 목에 매달거나 벽에 걸어두는 용도로 만들어졌다.
만화를 좀 봤다면 익숙한 인물도 있다. 바로 <손오공>에 등장했던 우마왕의 아내 나찰녀이다. 파초선으로 화염산 불길을 부쳐대던 그녀, 그런데 이 만화 속 악인은 가공인물이지만 <법화경> 속 사람을 잡아먹던 10명의 악귀가 그 유래이다.
이들 나찰녀들은 석가모니에 귀의하여 불법을 수호하게 되었다는데, <석가여래오존 십나찰녀도>에서 그 모습을 그려낸다. 특히 일본 귀족 여성들이 자신들과 같은 여성의 모습을 한 나찰녀들에게 동질감을 많이 느꼈던 듯하다.
사람을 잡아먹기로 치면 1만 명의 자식이 있는데도 남의 자식을 훔쳐 잡아먹던 귀자모만 할까. 전시된 <게발도>는 석가모니가 귀자모의 아이를 발우 그릇에 숨기고 귀자모가 부하들을 동원하여 아이를 들어올리려 애쓰는 모습을 그려낸 장면이다.
이 시련을 겪고 자기 아이만큼 남의 아이도 소중하다는 걸 깨닫고 아이들의 수호신으로 거듭났다고. 이처럼 전시된 그림 한 점 한 점을 통해 우리가 몰랐던 불교의 다양한 여성신들은 물론, 그 신들을 통해 우리가 미처 몰랐던 동아시아의 고전을 만나게 된다.
▲ 보현보살십나찰녀도 ⓒ 호암미술관
전시는 그저 작품 속 대상을 넘어 불교 미술 생산에 적극적이었던 여성들을 조망한다. 조선 시대 국가는 유교라는 이데올로기로 움직였지만 그 그늘에서 많은 불교 행사를 주관하고 불교 미술을 후원했던 건 바로 여성이었음을 전시는 보여주고 있다.
전시회는 불교를 몰라도, 혹은 불교를 안다면 더욱 흥미롭게 볼 수 있었던 내용이었다. 하지만 전시에서 불교는 그저 특정 종교로만 한정짓기는 아쉽다. 외려 오랜 시간 동안 동아시아 문명의 한 축으로서 굳건하게 자리잡은 정신적 세계관으로서 불교에 대한 신선한 학습의 시간이었다. 또한 그 속에서 저마다의 캐릭터로 존재감을 뽐내던 여성의 모습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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