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산 야산에 걸린 가슴 아픈 현수막... 정녕 한국이 민주주의인가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 32] 북진·수복의 그늘...부역자 살상과 고양시 금정굴 학살사건
지금까지 33편의 글에서 한국전쟁이란 치명적인 우리 현대사의 현장을 찾아다니며 하나하나 되새겨 보고 있다. 이 글 역시 쓰는 사람이 주제를 조망하는 각도가 있고, 그것과 같든 다르든 읽는 사람이 읽어가는 각도가 있다. 글을 이어가면서 스스로 다짐하듯, 읽는 분들에게 당부하듯 이 글의 각도를 다시 한번 상기하고자 한다.
한국전쟁은 다시는 벌어지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터질 수 있다. 전쟁이 비극일수록 그것을 다시 되돌려서 보고 또 봐야 한다. 그 가운데 하나는 전쟁이 또 터지면 나는,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떠올리는 것이다.
한국전쟁을 리뷰하면 그때 그랬고 앞으로도 그래야 할 일이 보이고, 그때는 그랬지만 다시는 그러지 않아야 할 일도 드러난다. 어디에 중점을 두든 이런 점검과 성찰은 두 번째 한국전쟁을 막아낼 중요한 인식의 기반이 될 것이다. 전쟁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모두를 견고하게 준비했을 때 비로소 막아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게 이 글을 이어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부역혐의자 살상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남침으로 개전해 낙동강까지 밀어붙이고 있을 때, 수도를 빼앗기고 속절없이 밀려가는 전황에 대한 반사적 대응은 원군을 급히 불러들이는 것이었다. 이제 유엔군의 도움으로 반격을 시작하자 북진은 희망이 됐고 그 최대치는 '내친김에 압록강까지'가 됐다.
전면전이 아니었으면 정치적 논쟁이나 국지적 전투로 꾸역꾸역 틀어막을 수도 있었겠지만, 전면전이 터지자 모든 것은 사생결단이 되고 말았다. 군대뿐 아니라 일상 깊숙한 곳의 자잘한 것까지 생사를 뒤흔드는 극단이 뒤덮었다. 그래서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북한 정권에게 남침 개전의 원죄를 크고 깊게 진하게 물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어쨌든 유엔군의 반격이 성공하면서 북진은 무력으로 이루는 통일과 남침에 대한 정당한 복수가 됐다. 그러나 그나마 규율돼 오던 생존본능이 이념으로 포장돼 악마의 가면을 쓰고 폭발했다. 바로 부역혐의자 살상이다. 그때는 그랬지만 앞으로는 그러지 않아야 할지, 아니면 또다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인지, 결코 쉽지 않은 자문자답의 한 대목이다.
부역자 살상은 시기적으로 세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제일 먼저 유엔군이 북진하면서 1950년 8월부터 전선에서 벌어진 군인에 의한 민간인 즉결처분이 있었다. 희생자 숫자는 나중에 발생한 집단학살에 비해 많지는 않았다. 그다음 1950년 10월 초순부터 수복지구에 경찰이 복귀하기 직전부터 복귀 이후까지, 부역혐의자 살상이 남한 각지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졌다. 이번 글에서 주목하는 대목이다. 북진통일이 좌절하고 다시 전선이 급속하게 남하하던 1.4후퇴와 그 다음의 재수복 시기에 부역자 학살은 한번 더 벌어졌다.
국군에 의한 부역혐의자 총살은 가평, 강화, 고양, 여주, 남양주, 포천, 가평 등 여러 지역에서 발생했다. 시기적으로 가장 이른 즉결처분은 1950년 8월 20일 경남 통영일 것이다. 통영 수복 직후 주민 일부가 부역으로 총살을 당했다. 이후 경남, 경북을 거쳐 충청남·북도와 경기도에서 유사한 총살사건이 발생했다. 전쟁에서 그것도 접적 최전선이라는 치열한 전투상황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불가피했다고 할 수는 있으나 실제의 적대행위와 잠재적 적대위험 등은 진지하게 돌아볼 일이다.
전선이 북상하고 경찰이 복귀하기 시작한 1950년 10월 초순부터 부역혐의자들에 대한 살상이 본격적으로 벌어졌다. 전쟁의 공포 속에 우발적인 반발이나 충동적인 보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한국전쟁에서의 부역자 살상은 그것과는 다르다. 살상이 광범위하고 조직적이었다. 그것은 이승만 정부가 강력한 의지를 갖고 법령과 제도로 시행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부는 여순사건 직후 국가보안법을 제정(1948년 12월 1일)해 남한 정부에 따르지 않는 행위를 북한을 이롭게 하는 반국가 이적행위로 등치시켜 처벌하기 시작했다. 국가보안법의 비민주 반인권은 새삼 재론할 것은 없다. 이 법으로 1949년 한 해에만 11만 8천여 명이 처벌됐다. 사형을 면한 이들은 국민보도연맹에 가입시켰다. 전쟁이 발발하자 보도연맹원들을 마구잡이로 처형한 것은 앞서 살핀 바와 같다.(관련기사 : 서울 빼고 거의 다 죽였다... 이게 '인종청소'랑 뭐가 다른가 https://omn.kr/26tly)
적의 손길이 닿았다는 이유만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비상사태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1950년 6월 25일), 비상시 향토방위령(1950년 7월 22일), 계엄하 군사재판에 관한 특별조치령(1950년 7월 26일) 등을 차례로 공포했다. 전쟁이란 특수상황에 당연한 법적 조치들이지만, 문제는 법과 제도의 집행 과정에서 커지곤 했다. 인민군 점령지역에 남아 있던 대다수 잔류민과 일부 국군 패잔병들이 모두 가혹한 처벌을 받을 수 있는 부역 혐의자가 됐다는 것이다.
정부와 국군이 38선을 제대로 방어해내지 못한 현실이나 국민을 속이고 먼저 도망간 대통령과 정부 등은 아무런 고려 요소가 아니었다. 오직 적의 손길이 닿은 자국민은 일단 부역으로 처벌할 대상이 된다는, 숨 막히는 반공의 근본주의가 거칠게 발동했다.
이승만 정부는 9.28 서울 수복 이후 10월 4일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부)를 설치해 이듬해 5월 24일까지 운용했다. 합수부는 부역자의 체포와 기소를 전담하고, 재판은 계엄고등군법회의에서 관할했다. 부역자는 핵심은 북한 점령기의 행정기관이나 내무서 등에 종사하거나 연루된 주민들이었다.
경찰이 지휘하고 감독하는 치안대가 경찰과 함께 또는 경찰에 앞서 부역혐의자를 체포하고 연행하는 일을 수행했다. 연행된 이들은 사찰계 소속 경찰관이 조사해 A, B, C 세 등급으로 분류했다. 합수부는 A급은 군법회의 송치, B급은 보완 조사 후 송치 또는 석방, C급은 훈방하라고 공식적으로 지시했다. 그러나 실제 과정은 달랐다. A급은 재판 근처도 가지 않고 즉결처형을 하고, B급은 기소해 재판에 넘기고, C급은 보류하는 것으로 돌아갔다. 남침에 대한 집단적 보복심이 수복지구를 휩쓸면서 눈에 보이는 대로 당장 처단하는 수많은 불법이 벌어진 것이다.
즉결처분을 피해 재판을 받은 주민들은 어땠을까. 대통령 긴급명령 제1호는 단심 재판에서 증거설명도 생략하고 바로 판결할 수 있게 했다. 결과는 가혹했다. 전쟁이 아니라면 징역 4~5년 정도일 범죄에 사형을, 2~3년 정도일 범죄에는 무기 혹은 15년 형을 선고하는 일이 비일비재였다. 부역자로 낙인이 찍힌 것은 물론 과도한 처벌을 받았고, 친인척까지 연좌제에 휘말려 죽을 때까지 심각한 고통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받은 고문과 폭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런 과정 곳곳에서 사적인 보복심이 개입한 사례도 적지 않았다.
부역행위에 대해서는 이토록 살벌하게 처벌하고 보복했으나, 부역에 대한 과도한 처벌을 감면할 목적으로 국회가 제정한 부역행위특별처리법과 사형(私刑)금지법은 정부가 두 달이나 끌다가 마지못해 공포(1950년 12월 1일)했다.
아무리 전쟁이라고는 하지만 허술하기 짝이 없는 사법처리 과정을 보면 대한민국이 민주주의란 말을 꺼내기조차 조심스럽다. 정부만 세워졌을 뿐 아직 모든 것이 취약한 국가라고 해도 그렇다. 일례로 내무부 치안국의 부역자 검거현황 보고를 보면 검거 15만3825명, 자수 39만7090명으로 모두 55만915명이 부역혐의로 사법조치 선상에 올랐다.
그러나 검경이 적극적으로 검거한 15만여 명 가운데 소위 '의식분자'는 1만9116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13만여 명은 점령군의 강압에 눌린 사람들이었다. 검거인원에 대한 자체분석이 이러하니 자수 인원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이런 행위로 처벌 받을 리 없다고 생각했던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고 검거됐으며 이런 공포 속에서 티끌 하나라도 묻어 있으면 자수를 해야 했다. 참으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정부와 군대가 제대로 지켜주지 못한 국민을 위로는커녕 가혹한 처벌만 하려고 들었으니.
금정굴 학살사건
부역자 살상사건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사례는 경기도 고양시 금정굴의 학살사건이다. 나는 그 현장을 찾아갔다. 금정굴은 일산서구의 고봉산삼거리에서 야산으로 난 오솔길로 올라가면 쉽게 찾을 수 있다. 내가 찾아갔을 때 오솔길 입구에는 73주기 고양지역 한국전쟁 민간인희생자 합동위령제의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현수막 한쪽에 "여보 절믄 나이에 억울하게 돌아가셔서 얼마나 원통하십니까. 보고 싶습니다"라는, 누군가의 손글씨가 있었다. 짐작컨대 뒤늦게 한글을 깨친 지긋한 할머니의 애처로움이 진하게 배어있었다.
오솔길로 들어서자 안내판이 보였다. 비교적 최근에 세운 것이었다. 이렇게 쓰여 있다.
오솔길을 따라 더 올라가자 1994년에 세운 표지판이 방문객의 걸음을 한번 더 멈추게 한다. 입구의 안내판을 세우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이 읽힌다. 서러운 한탄이고 애절한 호소다.
고양 금정굴 사건은 안내판에 쓰인 그대로다. 이들은 부역혐의 여부 또는 경중에 대해 최소한의 재판도 없이 마구잡이로 학살당했다. 부역혐의 당사자가 아닌 가족까지 마구잡이로 연행해다가 살해한 것도 위중한 대목이다.
전쟁과 아무 관련 없는 반인도적 범죄
불법학살에 대한 합수부의 조사와 기소, 계엄고등군법회의의 판결도 심각한 문제다. 주민의 진정서로 인해 합수부가 고양경찰서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고 들이닥쳐서 수사까지 했던 사건이다. 그들은 서장 면담은 물론 금정굴 현장검증까지 마쳤으나 학살을 집행한 경찰관들은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다만 의용경찰대원 한 명과 시국대책위원장 두 명에게만 사형을 선고하고는 유야무야됐다. 한 명은 인민군 환영대회를 준비했었고, 다른 한 명은 인민군 점령기의 내무서(북한의 경찰서)의 자위대였다. 세상이 뒤집어지자 새로 들이닥친 권력에 잘도 붙어버린, 좌익도 되고 우익도 되는 영악한 두 사람만 처벌한 것이다. 전체 학살을 주도한 이무영 고양경찰서장과 소속 경찰들, 이에 적극 가담한 치안대 의용경찰대원 등은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게다가 검찰은 이 사건이 마치 민청 등 좌익단체에 의해 자행된 양민학살 사건인 것처럼 조작하기도 했다. 합수부가 진정서를 접수하고 고양경찰서에 들이닥친 것이 10월 23일이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에 김창룡은 "치안대로 위장한 진짜 부역자에 의해 애국자들이 많이 희생됐으나 이를 바로잡았다"고 발표했다. 대검찰청이 발행한 <좌익사건실록>(1950년 형공 제1838호)에는 '민청 고양군 일산리 양민학살 사건'이라고 돼 있다.
온통 거짓말이다. 희생자들이 애국자라고? 애국자들이 무고하게 총살을 당하고 있었는데 합수부가 고양경찰서를 들이닥친 이후 10월 25일까지 3일 동안 총살이 계속되는 것을 방임했다고? 합수부의 조치를 되짚어 보면 학살당한 사람은 죽어도 괜찮은 사람들이었고, 학살을 주도하고 집행한 사람들은 잘못이 없다는 것이다. 가증스럽다. 전쟁이란 급박한 상황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반인도적 범죄일 뿐이다.
훗날 유족들이 그 억울함을 풀어보려고 발버둥 친 과정 역시 투쟁이란 말이 어울릴 것 같다. 금정굴인권평화재단의 홈페이지에 기재된 그동안의 경과를 읽어보면 이들에게 대한민국이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을지, 면구스럽기 짝이 없다.
금정굴 사건은 금정굴이라는 시신유기 장소가 멀쩡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에 결국에는 법적인 보상조치까지 가능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상규명 보고서와 구술자료집을 보면 금정굴 사건 전후로 고양지역에서는 무수한 부역자 살상사건이 동네마다 벌어졌다. 보고서에는 '수복 후 민간인 희생사건'에 네 개의 세부 항목이 있는데 그 첫 번째가 바로 부역혐의 민간인 희생사건이다.
도대체 어떤 행위가 부역이었을까. 부역혐의에도 불구하고 살아난 사례들을 보면 이들이 전부 즉결처형을 당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고양군 대자리의 인민위원장이었던 김정부, 권상용 등은 마을 주민들이 위원장으로 추대한 점을 인정받아 무사했다. 신도면 대덕동 최철하의 부친은 인민군 점령기에 방위대 부대장이었던 이유로 치안대에 끌려갔으나 곧 풀려났다. 인민군 점령기에 용두리에 살던 같은 집안의 대한청년단장을 숨겨준 일이 있었는데, 청년단장이 치안대를 찾아가 자신을 숨겨준 사정을 설명해서 석방된 것이다. 파주 야당리 하우개마을의 인민위원회 반장은 마을 어른들끼리 열흘씩 돌아가면서 일을 보았다. 이들은 부역을 총명하게 분산시킨 덕분에 모두가 처벌을 피할 수 있었다.
이상은 고양지역의 구술채집에서 나온 것들이다. 인민군이 점령하면서 인민위원회 체제가 시행되자 주민들은 이를 피하려고 했다. 아무도 나서지 않으면 마을의 유지나 존경받는 사람들이 떠밀려 행정에 참여했다. 이념적으로도 무장된 사람들은 이미 전쟁 전에 월북하거나 검경의 눈을 피해 어딘가로 숨어들었다. 뒤늦게 적극적으로 가담한 사람들도 대부분 인민군이 후퇴할 때 그들을 따라갔다. 그들은 이미 사상문제는 생사가 걸렸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세상이 다시 뒤집혔는데 한가하게 남아 있을 리가 있겠는가.
한국전쟁을 읽어가면서 가장 거북하고 읽기 힘든 대목은 바로 민간인 학살이다. 우리에게 전쟁이 다시 벌어진다면 우리는 또다시 민간인이 나서서 다른 민간인을 학살하는 일을 벌일까. 과연 벌어지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한국전쟁은 다시는 벌어지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터질 수 있다. 전쟁이 비극일수록 그것을 다시 되돌려서 보고 또 봐야 한다. 그 가운데 하나는 전쟁이 또 터지면 나는,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떠올리는 것이다.
부역혐의자 살상
▲ 1950. 7. 29. 유엔군이 진주 부근 마을에서 사로잡은 부역자 혐의자를 산으로 연행하고 있다. ⓒ NARA/박도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남침으로 개전해 낙동강까지 밀어붙이고 있을 때, 수도를 빼앗기고 속절없이 밀려가는 전황에 대한 반사적 대응은 원군을 급히 불러들이는 것이었다. 이제 유엔군의 도움으로 반격을 시작하자 북진은 희망이 됐고 그 최대치는 '내친김에 압록강까지'가 됐다.
전면전이 아니었으면 정치적 논쟁이나 국지적 전투로 꾸역꾸역 틀어막을 수도 있었겠지만, 전면전이 터지자 모든 것은 사생결단이 되고 말았다. 군대뿐 아니라 일상 깊숙한 곳의 자잘한 것까지 생사를 뒤흔드는 극단이 뒤덮었다. 그래서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북한 정권에게 남침 개전의 원죄를 크고 깊게 진하게 물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어쨌든 유엔군의 반격이 성공하면서 북진은 무력으로 이루는 통일과 남침에 대한 정당한 복수가 됐다. 그러나 그나마 규율돼 오던 생존본능이 이념으로 포장돼 악마의 가면을 쓰고 폭발했다. 바로 부역혐의자 살상이다. 그때는 그랬지만 앞으로는 그러지 않아야 할지, 아니면 또다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인지, 결코 쉽지 않은 자문자답의 한 대목이다.
부역자 살상은 시기적으로 세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제일 먼저 유엔군이 북진하면서 1950년 8월부터 전선에서 벌어진 군인에 의한 민간인 즉결처분이 있었다. 희생자 숫자는 나중에 발생한 집단학살에 비해 많지는 않았다. 그다음 1950년 10월 초순부터 수복지구에 경찰이 복귀하기 직전부터 복귀 이후까지, 부역혐의자 살상이 남한 각지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졌다. 이번 글에서 주목하는 대목이다. 북진통일이 좌절하고 다시 전선이 급속하게 남하하던 1.4후퇴와 그 다음의 재수복 시기에 부역자 학살은 한번 더 벌어졌다.
국군에 의한 부역혐의자 총살은 가평, 강화, 고양, 여주, 남양주, 포천, 가평 등 여러 지역에서 발생했다. 시기적으로 가장 이른 즉결처분은 1950년 8월 20일 경남 통영일 것이다. 통영 수복 직후 주민 일부가 부역으로 총살을 당했다. 이후 경남, 경북을 거쳐 충청남·북도와 경기도에서 유사한 총살사건이 발생했다. 전쟁에서 그것도 접적 최전선이라는 치열한 전투상황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불가피했다고 할 수는 있으나 실제의 적대행위와 잠재적 적대위험 등은 진지하게 돌아볼 일이다.
전선이 북상하고 경찰이 복귀하기 시작한 1950년 10월 초순부터 부역혐의자들에 대한 살상이 본격적으로 벌어졌다. 전쟁의 공포 속에 우발적인 반발이나 충동적인 보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한국전쟁에서의 부역자 살상은 그것과는 다르다. 살상이 광범위하고 조직적이었다. 그것은 이승만 정부가 강력한 의지를 갖고 법령과 제도로 시행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부는 여순사건 직후 국가보안법을 제정(1948년 12월 1일)해 남한 정부에 따르지 않는 행위를 북한을 이롭게 하는 반국가 이적행위로 등치시켜 처벌하기 시작했다. 국가보안법의 비민주 반인권은 새삼 재론할 것은 없다. 이 법으로 1949년 한 해에만 11만 8천여 명이 처벌됐다. 사형을 면한 이들은 국민보도연맹에 가입시켰다. 전쟁이 발발하자 보도연맹원들을 마구잡이로 처형한 것은 앞서 살핀 바와 같다.(관련기사 : 서울 빼고 거의 다 죽였다... 이게 '인종청소'랑 뭐가 다른가 https://omn.kr/26tly)
적의 손길이 닿았다는 이유만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비상사태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1950년 6월 25일), 비상시 향토방위령(1950년 7월 22일), 계엄하 군사재판에 관한 특별조치령(1950년 7월 26일) 등을 차례로 공포했다. 전쟁이란 특수상황에 당연한 법적 조치들이지만, 문제는 법과 제도의 집행 과정에서 커지곤 했다. 인민군 점령지역에 남아 있던 대다수 잔류민과 일부 국군 패잔병들이 모두 가혹한 처벌을 받을 수 있는 부역 혐의자가 됐다는 것이다.
정부와 국군이 38선을 제대로 방어해내지 못한 현실이나 국민을 속이고 먼저 도망간 대통령과 정부 등은 아무런 고려 요소가 아니었다. 오직 적의 손길이 닿은 자국민은 일단 부역으로 처벌할 대상이 된다는, 숨 막히는 반공의 근본주의가 거칠게 발동했다.
이승만 정부는 9.28 서울 수복 이후 10월 4일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부)를 설치해 이듬해 5월 24일까지 운용했다. 합수부는 부역자의 체포와 기소를 전담하고, 재판은 계엄고등군법회의에서 관할했다. 부역자는 핵심은 북한 점령기의 행정기관이나 내무서 등에 종사하거나 연루된 주민들이었다.
경찰이 지휘하고 감독하는 치안대가 경찰과 함께 또는 경찰에 앞서 부역혐의자를 체포하고 연행하는 일을 수행했다. 연행된 이들은 사찰계 소속 경찰관이 조사해 A, B, C 세 등급으로 분류했다. 합수부는 A급은 군법회의 송치, B급은 보완 조사 후 송치 또는 석방, C급은 훈방하라고 공식적으로 지시했다. 그러나 실제 과정은 달랐다. A급은 재판 근처도 가지 않고 즉결처형을 하고, B급은 기소해 재판에 넘기고, C급은 보류하는 것으로 돌아갔다. 남침에 대한 집단적 보복심이 수복지구를 휩쓸면서 눈에 보이는 대로 당장 처단하는 수많은 불법이 벌어진 것이다.
▲ 1950. 9. 29. 서울. 서울 수복 후 군경 및 우익청년단체들이 완장을 차고 부역혐의자들을 연행하고 있다. ⓒ NARA/박도
즉결처분을 피해 재판을 받은 주민들은 어땠을까. 대통령 긴급명령 제1호는 단심 재판에서 증거설명도 생략하고 바로 판결할 수 있게 했다. 결과는 가혹했다. 전쟁이 아니라면 징역 4~5년 정도일 범죄에 사형을, 2~3년 정도일 범죄에는 무기 혹은 15년 형을 선고하는 일이 비일비재였다. 부역자로 낙인이 찍힌 것은 물론 과도한 처벌을 받았고, 친인척까지 연좌제에 휘말려 죽을 때까지 심각한 고통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받은 고문과 폭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런 과정 곳곳에서 사적인 보복심이 개입한 사례도 적지 않았다.
부역행위에 대해서는 이토록 살벌하게 처벌하고 보복했으나, 부역에 대한 과도한 처벌을 감면할 목적으로 국회가 제정한 부역행위특별처리법과 사형(私刑)금지법은 정부가 두 달이나 끌다가 마지못해 공포(1950년 12월 1일)했다.
아무리 전쟁이라고는 하지만 허술하기 짝이 없는 사법처리 과정을 보면 대한민국이 민주주의란 말을 꺼내기조차 조심스럽다. 정부만 세워졌을 뿐 아직 모든 것이 취약한 국가라고 해도 그렇다. 일례로 내무부 치안국의 부역자 검거현황 보고를 보면 검거 15만3825명, 자수 39만7090명으로 모두 55만915명이 부역혐의로 사법조치 선상에 올랐다.
그러나 검경이 적극적으로 검거한 15만여 명 가운데 소위 '의식분자'는 1만9116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13만여 명은 점령군의 강압에 눌린 사람들이었다. 검거인원에 대한 자체분석이 이러하니 자수 인원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이런 행위로 처벌 받을 리 없다고 생각했던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고 검거됐으며 이런 공포 속에서 티끌 하나라도 묻어 있으면 자수를 해야 했다. 참으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정부와 군대가 제대로 지켜주지 못한 국민을 위로는커녕 가혹한 처벌만 하려고 들었으니.
금정굴 학살사건
부역자 살상사건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사례는 경기도 고양시 금정굴의 학살사건이다. 나는 그 현장을 찾아갔다. 금정굴은 일산서구의 고봉산삼거리에서 야산으로 난 오솔길로 올라가면 쉽게 찾을 수 있다. 내가 찾아갔을 때 오솔길 입구에는 73주기 고양지역 한국전쟁 민간인희생자 합동위령제의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현수막 한쪽에 "여보 절믄 나이에 억울하게 돌아가셔서 얼마나 원통하십니까. 보고 싶습니다"라는, 누군가의 손글씨가 있었다. 짐작컨대 뒤늦게 한글을 깨친 지긋한 할머니의 애처로움이 진하게 배어있었다.
오솔길로 들어서자 안내판이 보였다. 비교적 최근에 세운 것이었다. 이렇게 쓰여 있다.
일본 제국주의는 고양 덕이리 한산마을 뒷산인 황룡산 자락 끝까지 금광을 개발했다. 당시 금구뎅이로 불리던 금정굴은 한국전쟁 국군 수복 후인 1950년 10월 6일부터 25일까지 고양경찰서에 의해 200여 명의 주민들이 학살당하는 참극의 현장이 됐다.
1995년 9월 반백 년 동안 숨죽이며 살아왔던 유족들이 부모 형제의 유골이나마 찾고자 용기를 내 발굴을 시작했다. 암흑 속에 있던 153구의 유골을 비롯해 희생자들의 손목을 묶었던 통신선, 심장을 뚫었던 총탄, 죽음을 예감하지 못하고 지녀온 비녀, 빗, 곰방대 등 1천여 점의 유품이 빛을 보게 됐다.
2007년에 와서야 대한민국은 이들의 억울한 죽음을 인정했으며, 2012년 사법부 역시 국가의 불법행위에 의한 배상책임을 받아들였다.
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고양유족회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 금정굴 학살사건 현장에 걸린 현수막 ⓒ 윤태옥
오솔길을 따라 더 올라가자 1994년에 세운 표지판이 방문객의 걸음을 한번 더 멈추게 한다. 입구의 안내판을 세우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이 읽힌다. 서러운 한탄이고 애절한 호소다.
금정굴은 1950년 6.25전쟁 중 9.28 수복으로 점령 중인 북한군이 후퇴하자 부역자를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부역자 가족들 남녀노소를 비롯 억울한 사람들이 반공단체와 경찰에 의해 대량으로 집단학살된 곳이다.
실제 좌익활동자는 월북한 후여서 남아 있던 사람들은 죄가 없어 피신할 필요가 없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이었는데 그중에는 개인감정을 가진 사람들도 포함됐다고 한다. 당시 학살담당 책임자인 고양경찰서장 이무영은 불법학살에 대한 책임으로 파면됐다고 한다.
그러나 유가족들은 그후로도 빨갱이 가족이라는 누명을 쓰고 재산도 잃고 사회적 활동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며 (...) 지금도 이곳에 와서 떳떳하게 성묘 한번 제대로 못하고 있다. 이에 일부나마 유가족들이 모여 '일산금정굴가족회'를 결성하고 왜곡된 역사의 진실을 규명하고 명예회복 및 유골의 발굴 안장을 추진하고 대통령과 국회 등 각계 요로에 '청원서, 탄원서'를 보내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언젠가는 진실을 규명하고 억울하게 돌아가신 영령들을 위로하며 후손들의 명예회복과 나아가 '용서와 화해'로서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고 조국의 평화 통일에 미력이나마 기여하고자 안내문을 세우게 됐다.
1994.6.11
고양일산(금정굴) 양민피학살 유가족회
고양 금정굴 사건은 안내판에 쓰인 그대로다. 이들은 부역혐의 여부 또는 경중에 대해 최소한의 재판도 없이 마구잡이로 학살당했다. 부역혐의 당사자가 아닌 가족까지 마구잡이로 연행해다가 살해한 것도 위중한 대목이다.
전쟁과 아무 관련 없는 반인도적 범죄
불법학살에 대한 합수부의 조사와 기소, 계엄고등군법회의의 판결도 심각한 문제다. 주민의 진정서로 인해 합수부가 고양경찰서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고 들이닥쳐서 수사까지 했던 사건이다. 그들은 서장 면담은 물론 금정굴 현장검증까지 마쳤으나 학살을 집행한 경찰관들은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다만 의용경찰대원 한 명과 시국대책위원장 두 명에게만 사형을 선고하고는 유야무야됐다. 한 명은 인민군 환영대회를 준비했었고, 다른 한 명은 인민군 점령기의 내무서(북한의 경찰서)의 자위대였다. 세상이 뒤집어지자 새로 들이닥친 권력에 잘도 붙어버린, 좌익도 되고 우익도 되는 영악한 두 사람만 처벌한 것이다. 전체 학살을 주도한 이무영 고양경찰서장과 소속 경찰들, 이에 적극 가담한 치안대 의용경찰대원 등은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 이승만과 악수하는 김창룡 ⓒ 국가기록원
게다가 검찰은 이 사건이 마치 민청 등 좌익단체에 의해 자행된 양민학살 사건인 것처럼 조작하기도 했다. 합수부가 진정서를 접수하고 고양경찰서에 들이닥친 것이 10월 23일이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에 김창룡은 "치안대로 위장한 진짜 부역자에 의해 애국자들이 많이 희생됐으나 이를 바로잡았다"고 발표했다. 대검찰청이 발행한 <좌익사건실록>(1950년 형공 제1838호)에는 '민청 고양군 일산리 양민학살 사건'이라고 돼 있다.
온통 거짓말이다. 희생자들이 애국자라고? 애국자들이 무고하게 총살을 당하고 있었는데 합수부가 고양경찰서를 들이닥친 이후 10월 25일까지 3일 동안 총살이 계속되는 것을 방임했다고? 합수부의 조치를 되짚어 보면 학살당한 사람은 죽어도 괜찮은 사람들이었고, 학살을 주도하고 집행한 사람들은 잘못이 없다는 것이다. 가증스럽다. 전쟁이란 급박한 상황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반인도적 범죄일 뿐이다.
훗날 유족들이 그 억울함을 풀어보려고 발버둥 친 과정 역시 투쟁이란 말이 어울릴 것 같다. 금정굴인권평화재단의 홈페이지에 기재된 그동안의 경과를 읽어보면 이들에게 대한민국이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을지, 면구스럽기 짝이 없다.
금정굴 사건은 금정굴이라는 시신유기 장소가 멀쩡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에 결국에는 법적인 보상조치까지 가능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상규명 보고서와 구술자료집을 보면 금정굴 사건 전후로 고양지역에서는 무수한 부역자 살상사건이 동네마다 벌어졌다. 보고서에는 '수복 후 민간인 희생사건'에 네 개의 세부 항목이 있는데 그 첫 번째가 바로 부역혐의 민간인 희생사건이다.
도대체 어떤 행위가 부역이었을까. 부역혐의에도 불구하고 살아난 사례들을 보면 이들이 전부 즉결처형을 당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고양군 대자리의 인민위원장이었던 김정부, 권상용 등은 마을 주민들이 위원장으로 추대한 점을 인정받아 무사했다. 신도면 대덕동 최철하의 부친은 인민군 점령기에 방위대 부대장이었던 이유로 치안대에 끌려갔으나 곧 풀려났다. 인민군 점령기에 용두리에 살던 같은 집안의 대한청년단장을 숨겨준 일이 있었는데, 청년단장이 치안대를 찾아가 자신을 숨겨준 사정을 설명해서 석방된 것이다. 파주 야당리 하우개마을의 인민위원회 반장은 마을 어른들끼리 열흘씩 돌아가면서 일을 보았다. 이들은 부역을 총명하게 분산시킨 덕분에 모두가 처벌을 피할 수 있었다.
▲ 금정굴 학살사건 현장 ⓒ 윤태옥
이상은 고양지역의 구술채집에서 나온 것들이다. 인민군이 점령하면서 인민위원회 체제가 시행되자 주민들은 이를 피하려고 했다. 아무도 나서지 않으면 마을의 유지나 존경받는 사람들이 떠밀려 행정에 참여했다. 이념적으로도 무장된 사람들은 이미 전쟁 전에 월북하거나 검경의 눈을 피해 어딘가로 숨어들었다. 뒤늦게 적극적으로 가담한 사람들도 대부분 인민군이 후퇴할 때 그들을 따라갔다. 그들은 이미 사상문제는 생사가 걸렸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세상이 다시 뒤집혔는데 한가하게 남아 있을 리가 있겠는가.
한국전쟁을 읽어가면서 가장 거북하고 읽기 힘든 대목은 바로 민간인 학살이다. 우리에게 전쟁이 다시 벌어진다면 우리는 또다시 민간인이 나서서 다른 민간인을 학살하는 일을 벌일까. 과연 벌어지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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