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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신선한 카메라와 사운드

[리뷰]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등록|2024.06.23 11:59 수정|2024.06.23 12:00
미국은 워싱턴 D.C.에 홀로코스트 박물관을 건립하여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을 기억하고 기리지만, 자국의 잘못인 원주민(인디언) 학살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안타깝게도 우월적인 권력에 의해 역사의 기억은 선택적으로 보존된다. 이 과정에서 진실은 외면되거나 왜곡된다.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역사적 사건을 카메라에 담는 방식의 신선함을 갖췄다. 그러나 현재의 반영에는 거리가 멀다.

카메라의 제한적 선택과 음향의 배치, 사늘하고도 보편적인

영화의 제목은 영어 번역이며, 당시 독일군 장교가 사택으로 이용했던 '아우슈비츠와 그 주변'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영화가 시작되고 짧은 시간은 빈 화면이다. 레퀴엠(미사곡)의 선율만이 공간을 채우며 흐르다가, 서서히 들려오는 새소리와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웃음소리. 강으로 소풍을 나온 가족의 일상은 그저 평온할 뿐, 전쟁과 연관 짓기 어렵다.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자 홀로코스트를 전면에 다룬다. 그렇지만 적나라한 학살과 죽음, 그로 인한 고통스러운 장면은 앵글에 일절 담지 않았다. 오로지 철저한 편집 속에 제한된 음향만을 제공한다. 시각은 위장된 평화를 보여주고, 청각은 카메라 밖의 폭력을 드러낸다. 두 감각은 수시로 마주하게 되며, 잔인함을 극대화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사택 정원의헤트비히이상적인 정원의 꽃밭. 주인공 헤트비히와 자녀-배급사 '찬란' face book ⓒ 찬란

 
담장 너머로 보이는 아우슈비츠의 건물,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 총소리와 굉음, 구령 소리 등등은 주인공들이 어떤 임무를 수행 중인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렇기에 독일 장교 루돌프 회스는 사택에서 잠자리에 들기 전, 복도부터 방에 설치된 모든 조명을 끄는 게 일상이다. 임무에 충실하며 겉으로는 자신감을 표출하지만, 불안한 심리가 공존하고 있다.

그의 아내인 헤트비히는 사택의 정원을 확장하고 가꾸는 일에 열정을 쏟는다. 수영장과 여러 시설들을 꼼꼼하게 갖춰나간다. 상냥하면서 살갑고 인자한 연기로 안정감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그의 입에서 간혹 튀어나오는 대사는 인간에게 내재한 악마적 본성을 숨기지 않는다.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은 전작 <언더 더 스킨> 이후 10년 만에 관객을 마주한 작품이다. 주인공 헤트비히 회스 역은 2023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세 개봉했던 <추락의 해부학>의 산드라 휠러, 루돌프 회스는 영화 <하얀 리본>의 크리스티안 프리델이 맡았다.

무수한 영화 중에서도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보여주는 독창성과 연출은 여러 장면에서 우수함을 드러낸다. 열화상 카메라를 활용한 시퀀스는 사뭇 의미심장하다. 장소는 영화에서 한 번도 카메라에 담지 않았던 수용소 내부이다. 사과를 곳곳에 묻어두는 소녀의 움직임은 명암으로 대비되어 불안의 극대화로 비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암울한 현실에서도 합리적 낙관주의(Stockdale paradox)를 지향하는 희망의 메시지이다.
 

연출의 독창성루돌프 소장의 생일에 모인 일련의 독일 장교&사택에 모인 여인들-배급사 '찬란' face book ⓒ 찬란


홀로코스트, 지금의 비극 또한 기억해야

과거의 비극을 기억하되 지금에서 자행되는 폭력과 살상, 특히 팔레스타인에서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영화를 감상하기를 바란다. 역사의 피해자가 지금에서는 가해자 대열에 우뚝 섰다는 걸 오히려 부끄러워해야지 않을까. 역사적 사건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면, 현재와 미래의 폭력을 통찰하고 경각심을 일깨울 수 있는 영화가 더더욱 필요한 시대다.

우리는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유대인 학살로 제한되지 않는, 인간의 보편적인 악마화로 규정할 수 있다. 그렇다고 유대인을 절대적이고 선한 인류라고 규정할 수 없다. 그들이 근현대라는 역사 페이지에서 무참한 살육의 피해자였고 하지만, 이제는 전세를 뒤바꾸지 않았던가. 이스라엘과 시오니즘은 반세기가 넘어가도록 가해자의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미국과 공조하며 중동 내에서의 분쟁을 부추긴다. 힘의 균열을 이완하며 우위를 점하려는 핵심축이고자 전쟁을 연속시킨다. 이 과정에서 약소 국민이 감내하는 죽음의 진열. 이스라엘이 보여주는 자비의 결여, 홀로코스트를 더 이상 선과 악의 대비인 양 신성시할 수 없는 이유이다.

루돌프가 타 부서로 전출 된 뒤 아우슈비츠로 복귀하는 마지막 장면, 그의 기대감이 씁쓸하게도 우리의 시선을 붙잡는다. 더군다나 그가 심혈을 기울여 설치하려는 순환형 소각장의 원리는 영화 초반에 제공되는데.

'태우고-식히고-비우고-채우고' 현대의 전쟁조차 이를 바탕으로 전개되지 않던가.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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