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법 배우셨나요?" 거장들의 자문자답
[안지훈의 3인칭 관객 시점] 이호재·전무송·박정자·손숙 등 참여한 연극 <햄릿>
▲ 연극 <햄릿> 공연사진 ⓒ 신시컴퍼니
고전은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읽지 않은 책'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이는 연극에도 적용된다. 사람들의 흥미나 관심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그 전에 '고전'이라 불리는 연극 공연은 많지 않다. 신선하고 자극적이고 빠르고 쉬운 연극이 넘쳐나기 때문인데, 이러한 경향은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더 두드러졌다.
그러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대표작, <햄릿>이 돌아왔다. 이름만으로도 관객을 열광케 하는 배우들과 함께, 그것도 대극장 공연으로. 한국 연극인들에게 최고의 영예로 꼽히는 '이해랑연극상'을 수상한 배우만 11명이다. 이호재, 전무송, 박정자, 손숙, 김재건, 정동환, 김성녀, 손봉숙, 남명렬, 박지일, 길해연까지. 출연 배우가 총 24명이라는 점을 알고 나면, 11명이라는 수상자 수치가 더 대단하게 느껴진다. 출연 배우의 절반 가까이가 이해랑연극상을 수상한 것이다.
신시컴퍼니가 선보이는 연극 <햄릿>은 오는 9월 1일까지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에서 공연한다(국립극단도 <햄릿>을 선보이는데, 이는 오는 7월 5일 명동예술극장에서 개막해 7월 29일까지 공연할 예정이다).
신·구의 조화, '배우란 무엇인가'
무대는 말 그대로 비어있다. 무대 세트랄 게 딱히 없다. 유리판이 세워져있고, 의자 몇 개만 배우들이 들고 나왔다 들어가며 활용한다. <햄릿>의 배경이 되는 12세기 덴마크 왕국을 드러낼 만한 장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배우들도 현대적인 의상을 입고 나와 연기하고, 작중 인물들은 칼 대신 총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 구성은 동시대성을 자극하기 위한 작업으로 보인다. 12세기 덴마크를 배경으로 쓰여진 17세기 영국의 작품이 오늘날 이곳에서도 유효하다는 걸 증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단촐하기 짝이 없는 빈 무대를 채우는 건 '동시대성'이다. 여기에 셰익스피어의 걸출한 텍스트도 무대를 채우는 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필자는 배우들의 힘을 강하게 느꼈다. 무대는 연극의 시공간적 배경과는 어울리지 않고, 등장인물들 역시 겉모습만 보기에는 <햄릿>의 캐릭터라고 생각조차 하기 힘들지만, 배우들은 기어코 무대를 <햄릿>으로 만들어놓는다.
▲ 연극 <햄릿> 공연사진 ⓒ 신시컴퍼니
이번 <햄릿>에는 세대를 아우르는 다양한 배우들이 등장한다. 아이돌 출신의 배우 루나도 있고, 여든이 넘은 원로 배우들도 있다. 그 가운데에는 이호재, 전무송, 박정자, 손숙 등은 무대에서만 60년 넘는 세월을 보냈다.
오래 무대를 지킨 배우들의 연기를 볼 때면, '경이롭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갈매기>에 출연한 이순재 배우를 보았을 때 그랬고, 최근에는 <웃음의 대학>에서 송승환 배우를 보았을 때 그랬다. 배우로서의 능력은 물론이고, 갖은 제약에도 불구하고 끝내 무대에 오르는 원로 배우들에겐 그저 인간으로서의 존경심이 든다. 이번 <햄릿>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커튼콜 방식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조연에서 주연 순으로 나와 관객에게 인사를 건네는 게 일반적인 커튼콜 방식인데, <햄릿>은 연기 경력 순으로 객석에 인사했다. 필자가 관람한 회차의 '햄릿'을 연기한 강필석 배우가 중간에 등장하고, 이어 중견 배우와 원로 배우들이 차례로 등장하더니, 마지막에 '선왕'을 연기한 전무송 배우가 가운데로 걸어나와 인사를 건넸다.
공연 중에도 나지 않았던 눈물이 흘렀다. 거장들의 인사에 그저 박수밖에 보내지 못해 송구한 마음과 함께, 신구의 조화 속에서 '배우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햄릿>은 그런 연극이었다.
<햄릿>이라는 고전의 매력
많은 이들의 <햄릿>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알고 있다. 왕인 아버지를 죽인 숙부에 대한 왕자 '햄릿'의 복수. 설사 내용은 모른다 하더라도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다"라는 <햄릿>의 대사는 익히 들어봤을 것이다. 이 유명한 대사는 햄릿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고뇌하는 상징적인 장면에 등장한다. 그렇다, <햄릿>은 복수의 서사를 통해 삶과 죽음을 성찰하게 하는 작품이다.
이 고전의 성찰이 그동안 얼마나 유효했고, 또 얼마나 매력적이었는지, 여태 공연되고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우리는 하나의 렌즈를 더 추가해 작품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각색'의 묘미다. 같은 희곡을 가지고 공연하더라도 연출가가 어디에 초점을 맞추는지, 어떤 무대 세트를 사용하는지, 번역과 윤색을 거쳐 어떻게 대사를 다듬는지, 또 경우에 따라 기타 설정을 추가하는지에 따라 관객은 완전히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 연극 <햄릿> 공연사진 ⓒ 신시컴퍼니
이번 <햄릿>은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이라는 연극의 고전적 주제뿐 아니라, 삶과 죽음의 흐릿한 경계를 조명하는 듯한 느낌도 준다. 우리의 일반적인 시각은 삶과 죽음을 완전히 다른 것으로 분리한다. 연극의 한 장면에서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다"라고 고뇌하는 햄릿도, 그 장면에서만큼은 마찬가지인 것 같다.
하지만 <햄릿>에는 사실 삶과 죽음이 혼재해있다. 살아있는 햄릿과 그에게 나타난 죽은 선왕의 유령. 이미 여기에서부터 삶과 죽음은 뒤엉켜있다. 또 햄릿이 삶과 죽음 사이에서 답을 찾았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도 않다. 햄릿은 피 튀기는 복수극 끝에 목숨을 잃는 마지막 순간, 자신과 결투한 레어티즈의 "어디서부터 잘못된 겁니까?"라는 물음에 "하느님만이 아시겠지"라고 답한다. 그리고 "누가 누구를 용서한단 말인가?"라고 자문하며 죽음의 순간을 기다린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고뇌하던 햄릿도 그 답을 찾진 못했다. 햄릿은 단지 '그냥 살아내다' 죽었을 뿐이다. 이렇게 이번 <햄릿>은 삶과 죽음의 흐릿한 경계에서 그저 살아낸 한 인물을 강조한다. 다시 돌아온 <햄릿>을 관람하는 관객에게, 손진책 연출은 "사느냐 죽느냐"가 아닌 다음의 햄릿 대사를 들어보라고 권한다.
"우리는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는 법을"
덧붙이는 글
극작가이자 연극 연출가인 고 차범석 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아, 연극 <햄릿>의 수익은 차범석연극재단과 한국연극인복지재단에 기부됩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