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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은 철거됐지만 그의 흔적은 철거되지 않았다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정춘수

등록|2024.07.06 19:22 수정|2024.07.06 19:22

▲ 태화관.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묘의 만해기념관(한용운 기념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대북전단이 아닌 대일전단이 1919년 3월 1일 새벽부터 살포됐다. 3·1운동은 기습적인 시위가 아니라 예고된 시위의 형태로 시작됐다. 원호처(국가보훈부) 소속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펴낸 <삼일운동사>는 "이날 새벽 이미 독립선언식을 예고하는 비라가 집집마다 뿌려졌고, 시내 주요한 곳에는 벽보가 나붙었으며 국민을 격려하는 조선독립신문 창간호가 독립선언서와 함께 배달되었다"고 기술한다.

이날 오후 2시 무렵, 서울 파고다공원에서는 학생들 중심으로 독립선언식이 거행됐다. 2시 정각에는 서울 인사동 태화관(명월관 지점)에서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불교 측 민족대표의 한 분인 한용운이 일어나 한국 및 한국인이 독립국임과 자주민임을 선언하고 그의 선창으로 일동이 대한독립만세를 일제히 불렀다"고 위 책은 묘사한다.

선언식을 마친 민족대표들은 태화관 사장 안순환을 통해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에 자수했다. 전화를 받고 일본 헌병과 경찰 80여 명이 출동했고, 민족대표들은 오후 4시경 자동차에 실려 남산으로 끌려갔다. 남산 중턱 왜성대(서울애니메이션센터 일대)의 경무총감부가 이들을 맞이했다.

이날 일제 헌병과 경찰은 민족대표 33인 전원을 다 체포하지 못했다. 거리가 멀어 참석하지 못한 4명이 있었다. 기독교 측 민족대표인 길선주·김병조·유여대와 더불어 훗날 국회 반민특위에 끌려갈 정춘수가 그 넷이다.

강원도 원산에서 감리교 목사로 활동하던 46세의 정춘수는 독립선언식에 지각한 데 이어 자수도 지각으로 했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정춘수 편의 설명이다.

"그날 열차편으로 서울에 올라왔으나 이미 선언식은 끝나고 시위가 시작된 후였다. 선언서 서명자들이 모두 체포되자 서울에 머물면서 상황을 살피다가 3월 7일 종로경찰서에 자수해 재판을 받았다."

정춘수는 충청도 청주 사람이다. 일본 군함 운요호(운양호)가 강화도 앞바다에서 도발하기 2년 전인 1873년에 출생했다. 아홉 살 때부터 한문을 배웠고, 서른한 살 때인 1904년에 감리교 성서학원에 입학했다. 그로부터 2년 뒤 개성 북부교회 전도사로 부임했다. 1907년에는 협성신학교에 입학했고, 1909년에는 한양 종교교회 전도사로 임명됐다.

목사가 된 것은 38세 때인 1911년이다. 대한제국 멸망 이듬해의 일이다. 목사가 된 뒤 종교교회, 개성 북부교회, 원산 상리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일했다. 이 상태에서 1919년에 민족대표 33인이 됐다가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1921년 5월에 출소했다.

감리교인들을 '일왕의 전쟁'으로 내몰아

출소 뒤 개성·철원·평양·서울 등에서 목사로 활동한 정춘수는 독립운동권에서도 비중 있는 역할을 수행했다. 54세 때인 1927년에는 대표적인 좌우 합작단체인 신간회의 간사로 선출됐다. 신간회 창립 이틀 뒤에 발행된 그해 2월 17일 자 <동아일보>는 회장 이상재와 부회장 홍명희를 선출한 다음에 35명의 간사가 선발됐다고 전했다. 그 35인에 정춘수가 있었다. 이 외에, 흥업구락부와 적극신앙단 같은 민족주의 단체에도 그의 발자취가 묻었다.

그랬던 그가 65세 때에 변심했다. <친일인명사전>은 "1938년 5월 기독교계 부일협력단체인 경성기독교연합회(7월에 조선기독교연합회로 확대됨)를 창립할 때 부위원장을 맡았다"고 알려준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16권 정춘수 편에 조선기독교연합회 회칙이 실려 있다. 이 회칙 제2조는 "본회는 기독교의 단결을 도모하고 상호 협력하여 기독교 전도의 실효를 실행하여 황국신민으로서 보국의 성(誠)을 치(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했다. '천국 백성'이 아닌 '황국신민'으로서 일왕에 대한 성의를 다하는 것이 단체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이런 단체의 부위원장이 됐다면 친일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런 그가 얼마 안 있어 반일 혐의로 구속되는 일이 벌어진다. 비밀 민족주의단체인 흥업구락부의 회원이었던 사실이 밝혀진 결과다. 하지만 오래 수감되지는 않았다. 위 진상규명보고서는 "전향 성명서 발표 후 기소유예로 풀려"났다고 말한다.

중일전쟁 발발(1937.7.7.)로 인해 한국인들을 전쟁에 동원할 필요성이 더욱 커진 이 시기에 일제는 독립운동권에서 친일파를 대거 수혈했다. 홍난파는 1937년 11월, 이광수는 1938년 11월에 전향을 선언했다. 이들 운동권 출신이 친일 우익진영의 주류가 되는 현상이 이때부터 나타났다. 65세의 정춘수도 이런 트렌드를 따라갔다.

이 새로운 우파들은 원조 친일파 못지않은, 그 이상의 충성심을 과시했다. 정춘수도 예외가 아니었다. 감리교인들을 '하나님의 전쟁'이 아닌 '일왕의 전쟁'으로 내모는 일에 열정을 발휘했다.

1939년 9월에 감리교 지도자인 총리사가 된 그는 그해 성탄절에 '국가에 대한 헌금'을 독려하는 통지를 교인들에게 발송했다. 1940년 7월 하순에는 각 교회마다 애국반을 조직하라는 통첩을 보냈다. 1941년 10월에는 교회 철문과 철책을 '국가'에 헌납하라는 '종교보국 5개 항'을 결의했다. 1942년 2월에는 철문과 철책은 물론이고 교회종까지 헌납할 것을 교구장들에게 요구했다.

정춘수 외에도 친일하는 목사들은 많았지만, 그의 행동은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인상을 준 듯하다. 감리교 내부에서 일종의 쿠데타가 일어났을 정도다. <친일인명사전>은 "부일협력과 전횡은 감리교 내부에서도 반발을 일으켜 1942년 10월에 열린 총회에서 불신임을 결의"했다고 알려준다.

성직자 인생의 명운이 걸린 이 상황에서 그는 기도를 올렸다. 그는 하나님이 아닌 일제에 SOS를 쳤다. '그의 하나님'은 즉시 응답했다. <친일인명사전>은 총회 불신임 결의를 받은 그가 "일본 경찰의 지원을 받아 감리교 총회 해산을 공고했다"고 알려준다.

'민족대표'가 '친일대표'로
 

▲ 2007년 8월 8일 청주시 상당구 수동 우암산 기슭 3.1공원에 좌대만 남아 있는 정춘수 동상. 정춘수가 친일 행각을 했다며 1996년 지역 시민단체가 동상을 철거했다. ⓒ 연합뉴스

 
일제의 힘을 빌려 교단 지도자의 위치를 지켰다. 봉급이 나오고 활동비가 나오는 자리를 일본의 힘으로 지킨 사실은 그의 생계와 재산이 친일적 성격을 띠었음을 보여준다. 교회 재정에 의존하는 일반적인 성직자와 달리 친일재산에 의존하는 길을 걸었던 것이다.

답례로, 그는 더 열심히 친일했다. 감리교인들을 전쟁으로 내모는 것은 물론이고 그들을 노동으로도 내몰려 했다. 그는 교회에 나오는 시간보다 노동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질 것을 요구했다. 대중의 정신과 체력을 노동에 집중시키려는 일제 자본가들의 이익도 대변했던 것이다. <친일인명사전>은 1944년에 그가 "예배 집회시간도 단축해 주1회만 집회하도록 하고, 근로시간을 늘리도록 각 교회에 통고했다"고 기술한다. '민족대표'가 '친일대표'로 변질돼 있었던 것이다.

1945년 해방 뒤에 그는 거물급 친일파로 분류됐다. 1949년 3월, 친일청산 기구인 국회 반민특위 특경대가 76세 된 그를 붙잡으러 경기도 포천으로 출동했다. 그러나 그는 집에 없었다.

일제가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체포하기 직전에 그는 제발로 조선기독교연합회에 들어갔다. 1949년 3월 15일 자 <조선일보>에 따르면, 그는 1949년에는 제발로 반민특위 중앙사무국을 찾아갔다. 특경대가 집을 덥쳤다는 소식을 듣고, 이들에게 붙들리기 전에 자진 출두했던 것이다.

두 달간 구속됐다가 이번에도 기소유예로 풀려난 그는 더 이상 감리교인으로 살기 힘들었던 듯하다. 그 직후에 또다시 '전향'한다. <친일인명사전>은 "1949년 10월 명동성당의 노기남 주교를 찾아가 천주교로 개종했다"고 말한다.

한국전쟁 중인 1953년 1월 10일, 정춘수는 80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80년에 충청북도는 그의 동상을 청주시 우암산 삼일공원에 세웠다. 이 동상을 철거하기 위한 시민들의 투쟁이 1996년 2·8 독립선언 77주년에 결국 실현됐다. 그러나 동상은 철거됐지만 그와 그의 동지들이 만든 친일의 흔적은 우리 사회에서 아직 철거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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