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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일간 3만 5천명' 기독교 청년들의 대학살..."모두 미쳐 있었다"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 33] 황해도 신천의 비극

등록|2024.07.05 12:11 수정|2024.07.05 12:11
앞의 글에서 유엔군의 북진 속에서 일어난 남한 지역의 대표적인 학살로 경기도 고양 지역의 금정굴을 찾아갔었다. 이런 참극은 북한 지역에서도 발생했다. 남한과는 양상이 달랐다. 학살이 가장 잔인하고 규모가 컸던 곳은 황해도 신천이다. 대학살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천의 학살은 1950년 10월 초순부터 12월 중순까지, 유엔군이 북진했다가 중국군에게 밀려 후퇴하기까지 한 달 반 사이에 벌어진 사건이다. 살상의 주체는 유엔군이 진격해 오기 전에 봉기를 일으켜 신천을 장악했던 우익 치안대와 자치경찰 등이고 피살자는 신천의 주민들이다. 물론 노동당원과 인민군 패잔병 등이 포함돼 있다.

이런 사건이 벌어진 원인은 멀게는 일제강점기부터 쌓여온 갈등이 기저에 깔려 있다. 가깝게는 일제 패망 후의 좌우갈등과 토지개혁을 중심으로 하는 북한의 정치적 억압이 상당한 폭발력을 응축시켰다. 탄압에 대한 반발과 보복이 유엔군의 북진, 곧 북한의 치안력은 사라지고 남한의 행정기관과 경찰이 이 지역을 접수하지 못한 진공상태에서 극단적인 집단학살로 터져 나온 것이다.

한 달 반 만에 3만5000명 학살... 신천군 인구의 1/4
 

▲ 신천박물관 내부 모습. ⓒ 신은미


북한에 의하면 3만5000여 명이 죽임을 당했다. 이는 신천군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엄청난 숫자다. 당장 제주4.3의 최대 추정 피해자 3만 명과 비교된다. 신천은 면적으로 제주의 3분의 1 정도다. 게다가 제주4.3은 6년 반이었는데 신천은 겨우 한 달 반이었다. 3만5천이란 숫자를 액면대로 믿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을 반으로 삭감해도 엄청난 숫자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제주4.3은 정규군이 투입됐으나 신천은 기독교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 민간 치안대 등이 벌인 보복살상이었다. 상대적으로 비교하자면 정규군은 무력이 훨씬 강하지만 규율이 있는 편이고, 민간 무장집단은 무력은 약하지만 규율이 약한 탓에 자칫 동시다발적인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 그것이 최악의 최악으로 작동한 것이다.

황해도 신천에는 신천박물관이 있다. 이곳을 방문했던 사람의 기록이나 인터넷에서 검색되는 북한측 동영상과 사진 등을 통해 전시관의 일부는 볼 수 있다. 전시관 벽면에 크게 부착된 "52일간 3만5383명 학살"이라는 숫자가 눈에 뜨인다. 전시관의 낡은 흑백사진에서도 처참한 떼죽음을 볼 수 있다. 전시관 옆에는 부녀자와 아이가 집단으로 죽임을 당한 당시 신천군당 방공호가 있고 원암리의 두 개의 창고도 있다고 한다.

북한은 신천박물관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살인귀 미제'로 가해자로 규정하고 강력하게 규탄하고 있다. 북한의 원색적인 언사는 워낙 많이 들어온 터라 무덤덤할 지경이다. 그래도 당시 전체적인 전황을 볼 때 미군은 황해도 지역을 북진하면서 신천에는 소규모 부대가 단시간에 통과하는 수준이었다. 미군이 직접 자행한 사건이라는 주장은 수긍하기 어렵다.
 

▲ 미군을 '살인귀'라고 부르며 학살을 강력하게 규탄하는 내용을 담은 신천박물관 표지판. ⓒ 신은미


이 사건이 미군의 학살이라면 유독 신천 지역만을 그렇게 한 전략적인 이유를 제시해야 한다. 그에 합당한 무력사용과 병력동원도 확인돼야 한다. 북한이 지목하는 학살의 원흉은 미군 해리슨 중위다. 단기간에 3만5000명을 학살했다면 일개 중위가 책임자로 언급할 게 아니다. 적어도 장성급은 등장해야 하는데 겨우 중위라니. 신천박물관의 '미제 원흉'은 정치적인 거친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나의 좁은 소견은 이러하지만 내가 참고할 만한 몇몇 현대사 저술들은 '북한의 주장 3만5천'이라는 숫자를 인용하거나 언급하고 있다. 우리가 검증할 방법도 없고 역사학계의 교류가 없으니 그 숫자에 대한 토론도 불가능하지만 숫자 자체에 대해서는 수동적이나마 북한의 자료로 수용하는 분위기다.

현지 방문자의 전언으로는 황석영의 장편소설 <손님>이 대표적이다. 이 소설은 작가가 1989년부터 북한을 다섯 차례 방문하면서 구상했다고 한다. 그는 1993년 귀국해 5년의 투옥을 거친 이후인 2001년 이 소설을 발표했다. <손님>은 지금까지 44쇄를 기록할 정도로 많은 독자들에게 읽혔다. 그러나 소설 <손님>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소설과 역사에 대해 한번은 짚어볼 필요는 있다.
 

▲ 신천 학살을 다룬 황석영 작가의 소설 <손님>. 북한을 다섯 차례 방문해 구상하고 집필했다. ⓒ 창비


역사학자 심재훈(단국대 역사학과)은 <손님>을 '역사보다 역사다운 소설'로 평가한 바 있다. 역사가는 특정한 시간이나 시대를 해설하는 사람이고, 그 해설에 다양한 방식과 경우의 수를 동원한다는 점에서, 황석영이 <손님>에서 시도한 신천 사건에 대한 '기억작업'은 역사가의 그것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손님>이 문학이면서도 한 시대를 해설하는 역사학적 행위라고 본 것이다.

문학작품은 기실(記實)과 우의(寓意)를 나눠 생각할 수 있다. 기실은 실제의 역사나 현실 혹은 그와 유사한 상황의 기술이고, 우의는 작가가 작품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다. 소설에서의 기실이란 사실과 유사한 플롯과 가상의 인물들을 통해 현실을 묘사하는 것이다.

<손님>에서 기실은 1950년 그때 그곳에서 벌어진 일들이고, 우의는 작가가 사건 당사자들을 소설적인 대화를 통해 화해로 끌어가는 것이다. 소설에서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류요섭 목사이지만, 사건의 주인공은 그의 형인 류요한이다. 소설 속에 펼쳐진 류요한의 시간을 좇아가보면 신천 사건의 전후좌우를 깊숙히 이해할 수 있다.

사건의 전후좌우

류요한의 고향은 황해도 신천의 찬샘골이다. 할아버지 류삼성은 기독교인이 됐고 평양의 성경학교를 나와 목사가 됐다. 아버지 류인덕은 류삼성과 함께 찬샘골 광명교회를 세운 장로로, 아들 이름을 요한과 요섭(요셉)으로 지을 정도로 독실했다. 류삼성에 이어 궁방전 농사를 착실하게 지어오던 류인덕은 일본이 국유지로 분류된 궁방전을 동양척식에 넘기자 그들의 과수원을 관리하는 마름이 돼 포실한 중농으로 재산을 불렸다.

사건의 주인공 류요한은 신천 학살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다. 빨갱이들은 루시퍼의 새끼들이고 계시록의 짐승들이며, 자신은 미가엘 천사와 한편이라고 주장하는, 강고한 기독교인이다. 찬샘골의 그의 집에는 동네머슴 이찌모(박일랑)와 아버지 과수원의 일꾼 순남이 아저씨가 있었다. 이 둘은 동네 사랑에 기거하면서 열 살 아래인 주인장의 맏아들 류요한과도 종종 어울렸다. 겨울엔 동네사랑에 모여 놀았고, 여름에는 서리나 천렵을 다니기도 했다.

순남은 열 살 무렵 그의 아버지가 조선인 마름을 앞세운 동양척식에게 땅과 재산을 전부 빼앗겼다. 가족은 흩어지고 순남이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스무 살에 과수원으로 들어왔다. 그는 야학을 같이 다니던 사람들과 만든 마을의 공제회가 지주조합에 의해 흐지부지되자 마을을 떠나버렸다. 은률로 간 순남은 공제회 일로 연행돼 경을 치고는 금산포 광산으로 갔다. 그곳에서 노동자회보를 통해 사회주의니 계급이니 하는 말들을 알게 됐다. 일제가 패망하자 광산은 문을 닫았고 그는 찬샘골로 돌아왔다.

박일랑은 산판에서 출생했다. 일본 십장이 지어준 이름이 이찌로였다. 어려서 할머니 손에 지냈다. 열여덟 살에 색시를 얻어 화전을 일궜으나 화전 단속에 걸려 징역 10개월 살았다. 돌아와 보니 할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아내는 어디론가 가버렸다. 박일란은 공사판을 전전하다가 류요한의 마을로 오게 됐다. 1945년 기독교인들이 조선민주당을 만들 때 한쪽에선 조선노동당이 당원들을 늘려갔다. 찬샘골에서는 이찌로와 몇몇 사람이 제일 먼저 입당했다.

류요한이 스물한 살 되던 해에 해방이 됐다. 황해도의 건국운동은 기독교인들이 활발하게 주도했다. 그러나 소련군이 진주하고 신천군 건국준비위원회가 인민위원회로 개편되면서 무게중심은 바뀌기 시작했다. 류요한이 보기엔 어중이떠중이, 머슴, 건달, 떠돌이 따위들로 인민위원회가 채워진 것이다. 기독교 세력은 인민위원회와 결별하고 교회를 중심으로 모이면서 교회 사이의 연락망을 유지해 나갔다.

찬샘골에서는 순남이 적위대를 꾸리고 보안 책임을 맡았다. 그는 공산당과 교회가 충돌하며 대의원 투표를 거부하는 찬샘골 광명교회에 들어와 류요한의 아버지와 날선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박일랑은 농민위원장이 돼 찬샘골의 토지개혁을 주도했다. 이 과정에서 박일랑에게 손찌검을 한 류요한의 아버지가 현장에서 체포됐다. 연행된 아버지는 자신의 땅을 포기하는 토지개혁 문서에 도장을 찍고서야 풀려났다. 1만2000평의 농지는 졸지에 5000평으로 쪼그라들었다.

해방 직후 알려진 친일파는 진작 도망갔고, 가을부터는 건준에 참가했던 지주나 사업가, 장로들이 고향을 떠나 월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농에 속하는 류요한 가족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류요한은 세상이 뒤집어지는 것을 두 눈으로 생생하게 목격했다. 뒤집는 그들이 다름아닌 자기네 머슴이고 일꾼이었던 사실에 더욱 분노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자본론과 성경, 십자군과 사탄의 싸움이라는 프레임이 철벽처럼 굳어갔다. 한편 류요한의 친구들은 폭탄 사건을 벌이고는 일부는 구월산으로 들어갔고 일부는 월남했다. 이들은 류요한에게 훗날 비밀연락을 하겠다는 약조를 하고 떠났다.

1946년 3월, 3.1절 사건과 토지개혁으로 공산당은 기독교에게 돌이킬 수 없는 원수가 됐다. 1948년 남북한 정부가 따로 세워지고 신천은 인민공화국 시대가 됐다. 오래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터졌다. 류요한은 인민군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마루 밑의 구덩이에 숨어지냈다. 일제강점기에는 안온한 중농의 아들이었으나 이제는 구덩이로 피신한 신세였다. 그를 지탱해 준 것은 교회였다.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서 단합했고 다른 교회와 연대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리라는 꿈으로 버텼다.

그러다가 교회 연락망을 통해 '자유의 십자군' 미군이 곧 진공해 올 것이라는 비밀전갈을 받았다. 구월산이든 어디든 도피하던 청년들은 교회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미군의 진공 이전에 선제적으로 봉기를 일으키기로 했다. 신천 옆의 재령에서 10월 14일 먼저 봉기를 일으켜 잠시 성공했으나, 운 나쁘게 퇴각하던 인민군이 들이닥쳤다. 반동 기독교인을 색출해 처형하는 피의 광풍이 이틀 동안 재령을 휩쓸었다. 인민군은 후속부대와 합류하여 제 갈 길로 가버렸다.

피의 광풍... 옮겨 적을 수 없을 만큼 참혹했다
 

▲ 신천 박물관 내부 모습 ⓒ 신은미


재령에서 인민군에게 당한 것을 알게 된 신천은 앉아서 당하지 말고 먼저 일어서야 한다, 한 사람이라도 살고 싶으면 싸워야 한다는 사생결단이 더 강해졌다. 삼사백 명이 모여들었다. 내무서에 거침없이 들이닥치면서 걸리는 대로 때려죽였다. 내무서를 장악하자 괭이와 낫은 총과 실탄으로 강력해졌다. 빨갱이 가족들은 인질로 잡아들였다. 그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각 면으로 출동해 철수하기 직전의 당원들과 가족들을 기습적으로 체포했다.

류요한은 찬샘골과 발산마을로 출동했다. 목표는 순남이와 박일랑이었다. 박일랑은 철수 준비를 하고는 나이 어린 부인과 두 어린아이와 함께 자고 있었다. 류요한은 차갑게 소리쳤다.

"너 이 새끼 우리 땅 뺏고 천년만년 리당위원장 해먹을 줄 알았네?"

그리고는 편하게 죽여서는 안된다고 철사줄로 코를 꿰어 읍내로 끌고 갔다. 그는 다음날 신천군당 방공호의 불지옥에서 타죽었다.

순남은 누군가 자기 집으로 접근해 오는 것을 알아채고는 잽싸게 뒷산으로 피했다. 그러나 세 식구를 인질로 잡자 결국 제 발로 내려오고 말았다. 가족은 현장에서 죽었다. 코뼈가 뜯어지면서 끌려 가던 순남은 류요한에게 여기서 끝내달라고 부탁했다. 류요한은 담배 한 대를 피워 물려준 다음 뚝방의 전봇대에 순남의 목을 매달았다. 터지는 분노 속에 그나마 베풀어준 인정이었으려나.
 

▲ ⓒ 이은영


10월 17일 미군이 재령에 진입했다. 미 육군 중위 해리슨의 소대 병력이 신천에 진출했다. 두어 시간 체류 후에 레이션과 약품, 무기 등을 일부 넘겨주고는 북상했다. 당시 신천을 장악한 청년들은 1000여 명이 무장한 상태였다. 미군이 북상한 이후 1.4후퇴까지 신천 지역에 정규군은 없었다. 대한청년단이 등장하고 자치경찰이 편성되었다. 치안대와 경찰의 결성식도 거행됐다. 그리고 본격적인 처형이 시작됐다. 황해도 서남으로 몰렸던 인민군 패잔병들도 많이 죽었다.

열렬히든 적당히든 북한의 권력에 앞장섰던 수백 명을 방공호에 가뒀다가 기름을 붓고 불을 붙였다. 펑! 소리와 함께 '신천의 지옥불'이 시작됐다. 10월 18일, 19일, 23일 대량학살이 연이어 벌어졌다. 류요한의 외삼촌인 안성만은 "그때 우리는 모두 미쳐 있었다. 이제 과거로 돌아갈 수 없고 누구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됐다. 태가 묻힌 땅을 피로 물들이고 꿈에도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곳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집단학살의 참상은 몇 군데서 그 증언을 읽어볼 수는 있다. 도저히 이 글에 그대로 옮겨올 수 없는 참혹한 이야기들이다.

1950년 12월 전황은 완전히 뒤집어졌다. 북진하던 유엔군과 국군은 중국군의 함정에 걸려 후퇴하기 시작했다. 최대 속도로 북진경주를 하더니 이젠 패닉에 빠진 듯 후퇴했다. 비극은 롤로코스터를 타고 격렬한 죽음의 춤을 췄다. 평양을 빼앗기자 신천에서도 후퇴를 준비했다. 후퇴 준비의 하나가 또 학살이었다. 신천 땅에서 빨갱이 기운을 조금이라도 남겨두면 자기들이 죽을 것이란 공포와 증오였을 것이다. 원암리 창고의 참사와 저수지와 다리에서의 살육도 이때 벌어진 것이다.

류요한은 아버지와 살아남은 가족들과 함께 남으로 갔다. 그는 다시는 고향에 돌아오지 않으리라, 여기는 마귀가 번성하는 지옥이라고 생각했다. 류요한은 남한에서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곧 미국으로 이민갔다. 재혼해 삼열(사무엘)과 빌립 두 아들을 뒀다. 그는 1960년대 이민자답게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성공해 말년에는 뉴저지 백인 주택가에 살았다. 그는 동생 류요섭 목사가 고향방문단의 일원으로 북한에 다녀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류요섭의 출국 3일 전에 숨을 거뒀다.

1950년에서 오늘로 시선을 돌리는데 내 뒷덜미가 굳은 것 같다. 숨을 고르고 <손님>의 작가의 메모를 읽었다. 황석영은 자신의 신천박물관 방문 이후에 신천사건을 다각도로 취재했다. 일본의 한 학자로부터 신천사건은 미군의 학살이 아니라 민간인들의 상잔(相殘)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뉴욕에서 만난 어느 목사의 경험과 목격담을 듣고는 이를 모티브로 소설을 써 내려갔다고 한다.

작가가 이 사건의 골격으로 세운 것은 기독교와 공산당의 극단적인 충돌이다. 이 골격 위에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 국내외 시대의 흐름을 붙여 시대라는 병풍을 그렸다. 그 안에 여러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각각의 스토리를 교차시켜 풀어냈다. 자본론-마르크시즘이나 성경-기독교 모두 우리가 외래의 신학문이라고 받아들였으나 우리는 오직 그것의 '열심당'만 했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줬다. 무속에서 천연두는 외래의 질병이란 관념에서 손님이라고 칭한단다. 그래서 작가는 공산당과 기독교 역시 천연두와 다를 바 없다는 뜻으로 <손님>이란 제목을 정했다고 한다.

신천의 <손님>에서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 개개인의 속내가 사회적 관계 속에 어떻게 작동하고, 그런 행위 하나하나가 역사의 물줄기에 어떻게 이어지는 지를 목도한다. 극단적의 반인간 행위인 학살은 인간이 저지르지 않은 게 없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성전이든, 인민을 위한 혁명이든, 그것들이 어떻게 상대방과 자신을 파괴하는지를 보여준다.

동시에 그런 파괴행위가 어떻게 국가라는 체제의 건설로 귀결되는지도 보여준다. 성전으로 공격하니 수령일가가 굳어지고, 혁명을 부르짖을수록 반공국가가 공고해졌다. 내 방향으로 가려는 의도가 강할수록 상대방은 그 반대로만 가는, 역(逆)의 국가건설 과정이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다시 전쟁이 터지면 이런 학살을 또 감행하고 정당화할 것인가. 서로 뒤바뀌는 가해자 양측을 모두 비난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비난이나 변명이든, 그것을 역지사지로 내 자신에게 가감없이 대입해야 한다. 그것이 성찰이다. 성찰하지 않으면 역사를 되새기는 것은 시간의 낭비다. 아픈 역사를 되새기면 감정까지 낭비될 뿐이다. 다시 신천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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