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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암 최익현, 어떤 사람인가

[김삼웅의 인물열전 - 면암 최익현 평전 1] 참으로 국가를 걱정하는 '선비'

등록|2024.07.07 11:19 수정|2024.07.07 11:20

▲ 1906년 4월, 면암 선생이 호남 의병대장으로 체포된 뒤 서울로 압송되고 있다. ⓒ 박도


독립운동가이며 사학자인 백암 박은식은 <한국통사>에서 "최익현은 국가의 원로요 유림의 태두(泰斗)였다."고 평가했습니다.

국적 제1호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루쉰 감옥에 갇힌 안중근은 일경의 <옥중 취조문>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합니다.

최 면암은 고명한 사인(士人), 격렬한 상소를 올리기 수 회, 도끼(斧)를 지니고 대궐에 엎드려 신(臣)의 목을 베라고 박(迫)한 것과 같은 일은 참으로 국가를 걱정하는 선비였다.

또 5조약에 반대하여 상소하고 뜻대로 되지 못하자 의병을 일으킴에 이르렀다.

왜군이 이를 체포하였어도, 나라의 의사(義士)라 하여 대마도에 보내어 구수(拘囚)하였다. 그러자 그는 백이·숙제 이상의 인물이다. 주곡(周穀)을 불식(不食)한다 하였으나, 최 선생은 물도 불음(不飮)한다 하였으니 만고에 얻기 어려운 고금 제일의 인물이다.

시조시인 노산 이은상은 찬시 <면암선생>에서 이렇게 우러렀다. 앞부분이다.

 가랑산 정기받아 큰 인물 태어날 제
 빛나는 눈동자, 범의 머리 제비턱을
 어버이 기이히 여겨 기남(奇男)이라 부르더니

 어려서 책을 끼고 화서(華四)의 문을 두들겼고
 총명한 열 다섯에 벽계(蘗溪)를 물러날 제
 스승이 면암(勉庵) 두 자를 크게 써서 주어라

 스승을 모시고서 용문산 환선대로
 설악 명산에선 시 읊어 정을 풀고
 명경과(明經科) 글 외는 소리 춘당대를 흔들더니

 삼십에 고을 살이 깨끗한 이름 드날렸고
 다만 한 가닥 나라 사랑 백성 걱정
 대원군 권세 앞에도 맞나어서 싸웠네.(후략)
 

▲ 성충사, 면암 선생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 박도



면암 선생이 항일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왜병에 붙잡혀 대마도 감옥에 갇혔다. 이때에 쓴 <일제의 옥 속에서 읊음>이다.

 일찍이 들었노라,
 세상의 온갖 일 뜻 있으면 이루음을,
 내 살아가며 벼슬에 몸 두기를 가벼이 하였나니,
 마음 속 한 가닥 충절 펴보지도 못한 채
 부끄러이 몸이 먼저 묶였으니
 다시 무슨 말로 우리 임을 보답하랴.

면암은 36세에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다. 오늘로 치면 대검찰청 차장쯤 되는 자리였다. 그동안 지켜봐온 대원군의 대표적 패악 4가지를 들어 탄핵하는 내용이었다. 대원군은 곧 고종의 아버지로 그의 권세는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막강했다. 탄핵은 대원군 뿐 아니라 고종까지 겨냥하고 있었다. 신출내기 사헌부 장령이 목숨 내걸고 상소를 한 것이다.

궐 내외에서 아첨배들이 들고 일어났다. 최익현을 역적으로 모는 상소가 이어졌다. 임금을 폭군의 대명사인 걸(桀)과 주(紂)·진시황에 견주었으니 역적이라는 것이다.

파면당한 면암은 겁먹지 않고 또 다시 폭탄 상소를 올렸다. 삭탈관직, 유배령이 내리고 관계에서는 역도처럼 취급당했다. 첫 상소문의 첫 대목이다.

예로부터 나라에 대간(臺諫)을 둔 것은 제왕의 총명만으로는 널리 국정을 살필 수 없으므로, 간관과 대관으로 귀와 눈을 삼아서 제왕의 덕업에 티가 없도록 하고 정교(政敎)에 실수가 없도록 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대간의 직분은 이와 같이 중대한 것이온데, 신과 같은 불초 용렬한 자가 감히 장령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은총을 받자왔으니 외람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하오나, 이미 전하의 명을 받자온 신으로 다만 유유히 복종만 하고 바른 말씀을 아뢰지 않는다면 이것은 국록을 거져 먹는 자가 될 뿐 아니라 신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바 올씨다.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면암 최익현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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