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예측 다 빗나갔다... 멸종하던 정치 세력의 대부활
[목수정의 바스티유 광장] 프랑스 조기 총선, 1당에 등극한 신인민전선... 마크롱의 도박이 남긴 것
▲ 프랑스 좌파 연합 내 굴복하지않는프랑스(LFI)의 장뤼크 멜랑숑 대표가 지난 7일 파리 시내에서 총선 2차 투표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된 뒤 양팔을 번쩍 치켜들고 있다. ⓒ AFP/연합뉴스
대통령의 국회 해산으로 느닷없이 2년 반 만에 다시 치르게 된 프랑스 총선(7월7일)은 좌파연합인 신인민전선(NFP)이 제1당으로 등극하며, 뜻밖의 승리를 거두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선거의 최대 관심사였던 극우 세력의 과반 점유 여부는 (577석 중) 143석으로 귀결되며 그들만의 일장춘몽으로 끝났고, 프랑스 의회는 절대다수 진영이 없는 3개 정당의 군웅할거 형국으로 진입하며 불투명한 미래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결과의 일등 공신이자 최대 수혜자는 신인민전선(NFP)의 구심점이 된 굴종하지 않는 프랑스당(LFI)과 그들의 오랜 리더 장뤼크 멜랑숑이다. 이들은 1936년 좌파연합 세력인 인민전선(Front Populaire)의 극적 승리가 가져온 혁명적 변화를 환기시키며, 극우 세력 저지를 위해 신인민전선이란 이름하에 모든 좌파·극좌파 진영을 한데 결집시키는 데 성공했다.
좌파 진영의 군소 정당들이 하나둘 몰락해 가던 가운데 유일하게 제자리를 굳건히 지키며 국회의 왼쪽 날개를 사수해 오던 이들은 마크롱이 제공한 절호의 기회를 극적 회생의 계기로 삼아, 프랑스를 극우의 손에서 구한 구세주로 평가 받는다. 좌파 진영에선 여세를 몰아, 마크롱 대통령이 멜랑숑을 총리로 지명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인다.
과반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제1당이 되어 세력을 확대한 신인민전선의 목소리는 앞으로의 국정에 크고 작은 변화를 기대해 보게 한다. 특히 신인민전선(NFP)과 국민연합(RN)이 함께 공약한 바 있는 에너지·생필품 부분에 대한 감세 조치,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적극적 지원 반대 등의 대목에서는 고물가 속에서 고통을 겪는 민생을 다소나마 돌보고, 마크롱의 무도한 질주를 막는 제어 장치 역할을 기대해 볼 만하다.
결선투표-선거공학의 승리
▲ 프랑스 총선 결과 - 좌로부터 좌파연합 신인민전선과 동맹 194석, 집권당 연합 앙상블 163석, 공화당 66석, 극우 국민연합 143석. ⓒ CNEWS
1차 투표에서 33%를 얻으며, 유럽의회 선거 승리의 돌풍을 이어갈 것으로 보였고, 극우 총리의 가능성까지 점치게 했던 국민연합이 결국 3등으로 주저앉은 이유는 무엇일까?
1차와 2차 투표 사이 유권자들이 대거 마음이 돌아서기라도 했던 걸까? 놀라운 점은 이들이 결선 투표에서 얻은 표는 1차 투표 때와 거의 같다는 점이다. 그들의 지지자들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더욱 믿기 어려운 사실은 이번 선거에서 제1당을 차지한 신인민전선이 얻은 표보다, 국민연합이 얻은 표가 300만 표나 더 많다는 점이다. 만일 유럽의회 선거 방식대로 전체 정당 득표를 계산하는 방식이었다면, 이들은 예견되었던 대로, 1당이 되고도 남았을 터이다.
승자와 패자가 극적으로 뒤바뀐 원인은 결선투표제라는 선거 방식에 있다. 국민연합의 대표 조르당 바르델라의 표현대로라면 좌파세력과 마크롱세력의 "정치적 야합"의 결과로 그들은 표를 도둑질 당한 셈이다. 야합이라는 표현이 과도하지 않은 이유는, 이 두 당은 전통적으로 적대적 관계에 있으며 어떤 지향점도 공유해오지 않은 당이기 때문이다.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극우 차단이라는 명분 하에, 영리한 정치 공학을 구사한 것이다.
결선 투표에는 원칙적으로 1차 투표에서 12.5% 이상을 득표한 후보들이 다시 진출할 수 있다. 1차 투표에선 소신 투표를 했던 사람들도, 자신이 투표했던 후보가 2차에 올라오지 않으면, 대부분 최악을 막기 위한 전략 투표에 임한다. 따라서 각당은 1차와 2차 투표 사이, 확실한 결실을 챙기기 위한 물밑 후보 연합 작업을 진행한다. 이번 선거에서는 신인민전선과 앙상블 사이에 각자 3위로 결선 투표에 오르게 된 후보를 사퇴시키는 협의가 이뤄져, 극우를 밀어내기 위해 '될 사람을 밀어 주는' 풍경이 연출됐다.
물론, 국민연합이 이제 와서 억울함을 호소할 순 없는 일이다. 오래전부터 결선투표제는 극단적 이념을 표방하는 세력에겐 불리하게, 이런저런 세력과 협력할 수 있는 열린 지향점을 가진 세력에겐 유리하게 작용하도록 설계된 제도이기 때문이다.
극우는 다시 한번 전진했다
▲ 국민연합 대표 조르당 바르델라가 지난 6월 14일 총선 첫 유세 일정으로 프랑스 몽타르지 인근의 한 농장을 방문하고 있다. ⓒ 로이터/연합뉴스
이번 총선에서 국민연합이 과반 득표에 실패하고, 3등으로 전락한 것이 그들에게 불운이며 프랑스 사회로선 재앙을 피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이로써 국민연합은 여전히 많은 유권자들 사이에 '아직 긁지 않은 복권'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또한 28세의 바르델라 대표에겐 마크롱과 함께 동거 정부를 이뤄 3년간 혼란한 국정을 선보이며, 민낯을 들킨 후 짧은 정치 생명을 마감하는 것보다 시간을 좀 더 벌 수 있게 됐다. 경험과 정치 이력을 쌓은 후, 3년 뒤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편이 더 매력적인 시나리오일 수 있다. 프랑스 좌파 유권자들로서는 3년 후 더 위력적으로 터질 수도 있는 폭탄을 미뤄둔 셈이다.
극우 세력이 이번에 얻은 의석은 143석. 2022년에 얻은 의석은 89석이고, 2017년에 얻은 의석은 8석이다. 불과 7년 만에 8석에서 143석으로 급성장한 이들의 돌파력은 정당사에 기록될 만큼 놀라운 수준이다. 무서운 성장세는 그동안 이들의 의회 진출의 걸림돌이 되어온 '결선투표의 매직'마저 깨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결과를 두고 실패라고 말하기는 사실상 어렵다.
치욕 속, 미소지은 집권당
▲ 에마뉴엘 마크롱 대통령이 지난 7일 총선 2차 투표를 위해 르투케파리플라주에 있는 투표소를 찾은 모습. ⓒ EPA/연합뉴스
극우 집권을 막아야 한다며, 극좌 세력과 연합 전선을 구축한 집권당의 모습은 야릇한 미소를 자아내는 광경이었다.
집권 이후 극단적 신자유주의자-글로벌리스트의 노선을 취해 온 이들은 공화당에게 우파의 공식 타이틀을 내주고, 자신들이 중도인듯 위장해 왔으나, 내용 면에선 공화당보다 더 선명한 글로벌 친자본 세력이다. 마크롱은 국민적 반대 속에도 고소득자 연금시장을 다국적 자산관리회사들에 개방하고자 연금개혁을 강행했고, 우크라이나 전쟁에 파병 가능성까지 시사하며 미국 네오콘과의 협력에 충실한 민심 이반의 행보를 계속해 왔다. 그래서 그는 국익보다 글로벌리스트들의 이해를 받드는 머슴으로 비쳐온 것이 사실이다. 집권당의 이러한 행보는 국익을 먼저 내세우는 국가주의 정당의 성장에 물을 줘온 것이기도 하다.
스스로가 자초한 폭탄 때문에 궁지에 몰리게 된 집권당은 신인민전선과의 연합 전선의 수혜자이기도 하다. 완벽한 몰락이 예고되었던 마크롱 진영은 참패를 모면하고, 2등 자리를 챙기면서, 내심 안도한 모습이다. "수치스러운 결과지만, 중도의 건재함을 보여준 결과"라는 자족적 평이 선거 당일 밤 엘리제궁에서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예상보다 선전했을 뿐이다. 마크롱 진영이 감당해야 하는 '수치'는, 그것도 자발적으로 판 무덤이란 점에서 더욱 명확하다. 2022년 245석을 얻었으나, 이번 선거에서 87석을 잃으며, 이미 통치불능 상태였던 기존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그들이 확보한 163석을 통해, 극우와 극좌가 손을 잡아도 대통령을 탄핵(의석수의 2/3)을 강행할 순 없는 저지선을 확보했지만, 의석수 1/2이 필요한 국회의 정부 불신임안 결의(즉 총리 불신임)는 막을 수 없게 되었다.
전임 엘리자베트 보른 총리 시절, 1년 반 동안 악명높은 헌법 49조 3항(국가 비상시기, 국회 표결을 거치지 않고, 정부가 만든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는 헌법상 예외 규정)를 무려 27회나 사용하며 의회를 무시하고 정부 법안을 강제하던 독재의 방식은 이제 쉽게 구사하기 힘들게 된 것이다.
관례상 새로운 선거 결과에 따라 대통령은 신임 총리를 임명하고 새로운 내각을 꾸려야 하나 선거 직후 사표를 제출한 아탈 총리의 사표를 마크롱은 일단 반려한 상태다. "불안한 정국이 안정될 때까지 자리를 지켜달라"는 말과 함께. 불안의 진원지인 그가, 어떤 해법을 자신의 변화 없이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의 판단을 더디게 하는 것은 압도적 다수가 나오지 않은 선거 결과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가운데 좌파 진영에선 망설이는 대통령에게 '우리가 승자임을 인정하라'는 압박이 연일 흘러나온다. 이번 선거로 재선 의원이 된, 굴종하지 않는 프랑스의 프랑수아 뤼팽 의원은 "이젠 에마뉘엘 마크롱이 민주주의 제도를 존중해야 할 시간"이라면서, 마크롱이 패배를 인정하고 좌파 진영의 총리를 임명할 것을 종용했다.
불안한 우산, 승리의 대가
▲ 조기총선 다음날 리베라시옹지의 1면 공화국 광장에 모여들어 승리를 축하하는 좌파 지지자들과 "우프" 라고 제목을 뽑은 리베라시옹지의 선거 다음날 표지다. 극우 프랑스를 막아낼 수 있었던 안도감을 표현한 이 표지는, 이 선거의 의미를 압축해준다. ⓒ 리베라시옹
'정치는 생물'이라는 말을 입증해 준 선거였다. 언론의 예견들은 대부분 빗나갔다. 농익은 정치 공학과 변화를 바라는 민심, 절묘한 타이밍, 탁월한 슬로건이 빚어낸 연금술의 결과였다.
신인민전선의 승리가 실질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압도적 과반의 승리가 아니더라도, 거대한 환호성이 광장에 터져나가게 만들었던 것은 모든 공식을 비껴간 예기치 않은 뜻밖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좌파가 멸종해 가던 정치 지형 속에서,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한 이번 승리는 기회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냉정히 따져보면, 그들의 승리는 적지 않은 대가를 요구할 것이다. 과거의 흔적을 잃고 급속히 고사해가던 사회당(2022년 의석수 31명)은, 신인민전선이란 큰 지붕 속에서 62명의 의원을 탄생시키며 부활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들은 마크롱을 배태한 정치세력이다.
심지어, 이번 선거에선 마크롱을 엘리제궁 경제 자문으로, 이윽고 재경부 장관으로 임명했던 전직 대통령 프랑수아 올랑드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그는 어떤 관점에서 보아도 좌파이기보다 오히려 좌파의 적이었던 인물이다. 신인민전선의 큰 우산 아래 다시 회생의 기회를 잡은 이들은 얼마든지 마크롱 세력과 연합하여 유권자를 배반할 수 있다. 자신들이 살기 위해, 스스로 실족사의 길을 가고 있던 마크롱 세력을 건져준 것도 신인민전선이 져야 할 짐이다.
많은 시민들이 국민연합의 바람을 응원했던 것은, 가장 커다란 변화가 그들을 통해 가능하리라 점쳤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변화의 열망을 이제 신인민전선이 짊어지게 되었다. 국민들은 그들에게 즉각적인 답을 요구할 것이며, 이제 곧 승자의 텐트 속에서 모략과 배반, 반전의 시간이 숨돌릴 틈 없이 다가올 것이다. 지난한 진흙탕 싸움 속에서 한송이의 연꽃이 피어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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