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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결속에 오밀조밀 틈없이 매워진 이슬 같은 시"

김순아 시인의 네 번째 시집 <너만 기억하는 시간이 있다> 펴내

등록|2024.07.15 08:28 수정|2024.07.15 08:29

▲ 김순아 시인 시집 <너만 기억하는 시간이 있다>. ⓒ 작가마을


"기장군 연화리, 빛바랜 바다 무늬들이 엉겨 붙은 어물전 모퉁이, 아픈 다리 지탱하느라 한쪽 다리 절, 뚝 굽혀 앉은 한 늙은 여자 물간 생선 손질하다 대뜸, 야이 웬수야 그냥 콱 뒈져 뿌지 따라오기는 와 따라오노, 산 아랫마을 뒤로 하고 차들 질주하는 길 건너로 기우뚱 리어카를 끌고 온 노인, 움푹한 두 눈 툭 튀어나온 광대뼈 이마의 땀을 쓱 훔치며 늙은 여자 곁에 쪼그려 앉습니다. 웬수 같은 양반 젊을 때는 애먼 년 눈 맞춰 나 버려두고 밤도망질…, 늙은 여자 가래침 칵 뱉어냅니다. 저 웬수 뒤치다꺼리하다 내가 죽겠네, 바닥에 생선을 패대기치다가 다시 주워 손질합니다. 발길 뜸한 어물전 푸념처럼 비릿한 한숨이 흘러나오고, 노인은 그녀의 곁에서 가만가만합니다. 잠시 쏴아아- 파도 소리만 높아지는 해 질 녘 고요, 이윽고 여자가 생선을 주섬주섬 거두어 안고 리어카에 탑니다. 노인도 넙치 같은 손 오므려 힘껏 리어카를 끕니다. 장딴지 힘줄 파르르 떨며 끙차, 리어카 손잡이를 들어 올리는 노인, 그의 등을 밀물이 가만가만 밀어줍니다. 파도가 리어카 두 바퀴를 슬쩍 받쳐주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김순아 시인이 쓴 시 "불후의 풍경" 전문이다. 부산기장에 있는 바다 마을의 풍광과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 그려지고, 달려가 그 짠내음에 흠뻑 취하고 싶은 시다.

시와 평론, 비평에세이 등 전방위적 글쓰기 작업을 꾸준히 해온 김순아 시인이 펴낸 네 번째 시집 <너만 기억하는 시간이 있다>(작가마을 간)에는 이 시를 비롯해 긴 낭하(복도)의 끝에서 울리는 노래들이 담겨 있다.

"너와 나의 다른 시간에 대하여, 우주에 흩어진 그 무수한 2시 30분에 대하여, 우리 사이의 1분 1초에 대하여"(시 "2시 30분" 일부).

4부로 나누어 총 76편의 시를 담은 이 시집에는 거친 듯 고요한 시간이 흐르고 그 시간에 투영된 시인의 자화상이 모래알처럼 구르고 있다.

시인은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대면 체험의 기회가 줄어들고, 온라인상에 넘쳐나는 혐오 표현을 보면서, 나의 시는 무엇을 더 말해야 할까, 고민했다"며 "시가 세계(타인) 속에 자리한 고통을 감각함으로써 새로운 관계, 또는 새로운 시간의 가능성을 노래하는 것이라면, 졸시가 그 역할을 조금이나마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시집 출간 배경을 설명했다.

시집을 엮은 <작가마을>에서는 시간에 투영된 시인의 자화상이 "언어의 결속에 오밀조밀 틈 없이 메워진 이슬 같기도 하고, 광활한 바닷가 모래알처럼 끝이 없기도 하다"고 소개했다.

정훈 문학평론가는 "나를 나라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라는 제목의 서평을 통해 "시간이 이 시집의 핵심어이다. 인공지능 출현과 함께 존재의 정체성 찾기가 모호해진 시대에, 시인은 세계를 이루는 기본 범주인 시간에 대한 탐색과, 시간성을 고찰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아이러니와 수수께끼 같은 세계의 풍경 속으로 독자들을 깊숙이 끌어들인다"고 말했다.

배재경 <사이펀> 발행인은 "김순아 시인의 시에는 거친 듯 고요한 시간이 흐르고 그 시간에 투영된 시인의 자화상이 물스미 듯 녹아나 있다. 하지만 그 자화상은 단순한 연대기적 자화상이 아니다. 언어의 결속에 오밀조밀 틈없이 매워진 이슬 같기도 하고 광활한 바닷가 모래알처럼 끝이 없기도 하다. 이처럼 김순아 시인은 긴 낭하의 끝에서 울리는 자신만의 새로운 시 세계를 펼친다"라고 했다.

김순아 시인은 경남 양산 출생으로, 2001년 <한국문인>에 시, 2017년 <시와 사상>에 평론으로 등단했고, 시집 <슬픈 늑대> 등 3권이 있으며, 이외에도 비평집 <현대시로 읽는 식인의 정치학>, 에세이집 <인문학 데이트> 등 10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 김순아 시인. ⓒ 작가마을


비밀번호를 잊어버리다

모든 안은 문을 통과해야 이른다
비밀번호를 잊어버리거나 잘 못 누르면
그대로 벽이 되는 문

생각해 보니 그간 수많은 문을 통과해 왔다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밤비처럼 서성이며
쾅쾅 거칠게 밀어붙이기도
힘겹게 들어가
따스한 아랫목에 손을 넣고
말기에 이른 네 슬픔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러나 드나듦에 익숙해지면서 나는 까무룩 잊는다
활짝 열린 문은 바람에 쉬 닫힌다는 것
사람의 비밀번호는 늘 바뀐다는 사실을

익숙하게 드나들던 네 방문이 오늘은 굳게 닫혀 있다
도둑처럼 은밀하게 번호키를 눌러도
발길질하며 온몸으로 부딪쳐도
완강히 거부하는 문 앞에서 새삼 깨닫는다

충분히 열려 있다고 안심하는 순간
문은 차디찬 벽이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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