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양귀비를 한 해에 두 번 볼 수 있는 이유
충남 부여군 충화면 가화리 금마마을에 꽃밭 가꾸는 박기완씨
붉은 두건을 쓰고 긴 허리를 흔들며 웃어주던 꽃양귀비의 시절이 다 지나갔다. 꽃양귀비는 강렬한 색감에 여리여리하고 단정한 꽃잎이 매력적인 꽃이다. 한두 송이 피었던 길가에는 씨가 떨어져 다음 해에는 그 자리가 군락을 이루는 번식력도 좋은 꽃이다. 하지만 꽃이 피었던 시간이 짧아 뭔가 아쉬운 꽃이다. 씨앗 발아는 잘 되지만 모종을 키워 옮겨 심는 번식이 어렵고 한해살이 꽃으로 알고 있다.
지금은 5월의 꽃양귀비 개화 시간이 가고 씨앗 주머니가 부풀어 말라가는 시기이다. 양귀비의 한살이가 끝나고 다음 해를 기약하는 때이다. 그 틈을 노려 노란 금계국이 물결을 치고 지나가고 한낮 폭염은 시골 마을을 다 삶아 먹을 듯하다.
지난 6월 말 이웃 동네(충남 부여군 충화면 가화리) 길가에 초록잎이 선명하고 허리는 짧고 붉은 꽃잎이 선혈 같은 꽃양귀비들이 줄 맞춰 피어 있는 것을 보았다. 한 박자 느리게 핀 꽃양귀비들이 사람들의 눈앞에 다시 싱그럽게 나타났다. 5월 초여름의 열정을 한바탕 소나기처럼 퍼붓고 지나간 꽃을 다시 보니 반갑기도 하고 의아했다.
꽃양귀비는 모종으로 번식하기 어렵고, 씨가 제멋대로 떨어지거나 바람에 날려서 떨어진 곳에 발아가 되는 꽃이다. 이웃 마을의 꽃양귀비는 저절로 발아된 꽃양귀비가 아니라 분명 인위적인 손길을 거친 것들이었다.
"저기 꽃양귀가 늦게 피었네요. 다른 데 꽃양귀비들은 다 지고 없는데 여기는 이제 한창이네요. 누가 새로 심은 것 같은데요."
"박기완씨가 심은겨. 우리 동네에 그 양반 말고는 그런 거 할 사람이 있간디..."
"그분은 쪽파 전문가인데....."
박기완씨는 쪽파 농사를 잘 짓는 분이다. 김장 김치가 질릴 무렵인 초봄에 수확하는 쪽파뿐만 아니라 한여름 쪽파와 김장철에 수확하는 쪽파까지 심어서 근동 주부들에게 완판시키는 분이다. 나 역시 해마다 그 분에게 쪽파를 사서 봄과 가을에 쪽파김치를 담근다. 평생을 땅에 뭔가를 심고 가꾸며 사는 분이라서 꽃을 가꾸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는 모양이었다.
다음 날, 버스 정거장에 서 있는 그를 만났다.
"이이!(충청도식 감탄사) 내가 심은 거 맞어, 보기 좋잖여. 나도 꽃 좋아한다니께."
이 대답 속에는 '나이 많은 남자도 꽃을 좋아할 수 있다'며 편견이나 고정 관념을 내려놓으라는 뜻으로 들렸다. 쪽파를 사러 그의 밭으로 가면 항상 저울 눈금 넉넉하게 쪽파 단을 묶어놓고도 한 다발씩 더 뽑아가란다. 그야말로 시골 인심의 끝판왕을 보여주시는 분이었다. 햇볕에 그을린 얼굴에 항상 미소가 머무는 인상이 좋은 분이었다.
"저기 꽃양귀비는 어떻게 심은 거에요? 다른 데는 지금 다 지고 없는데요?"
"첨에 꽃이 피고 나면 씨가 맺히잖여. 그걸 잘라다가 우리 하우스 건조장에 며칠 말리는 겨. 그런 담에 비료 포대에 넣고 밟으면 씨가 떨어지거든. 그걸 못자리 판에 상토 넣고 뿌리면 새로 싹이 나잖여. 그걸루다 새로 심었더니 꽃이 원판(매우) 좋잖여."
"양귀비는 모종으로 잘 번식이 되질 않는다는데요?"
"아녀, 안 해봐서 그런 겨. 저길 봐. 그렇게 올해 두 번째 심으니께 보기가 더 좋아. 키도 적당해서 뵈기 좋잖여."
이른 봄부터 싹이 터서 성장한 꽃양귀비들은 꽃이 필 때쯤이면 키가 너무 커서 꽃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쓰러지거나 비가 오면 아주 누워버려서 예쁘다가 마는 경우가 왕왕 있다.
박기완씨는 그런 양귀비의 특성을 고려해 시기를 조절해 단계적으로 양귀비를 심고 있었다. 덕분에 마을 사람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들까지 조용한 시골 풍경 속에 꽃을 즐기는 여유를 느끼고 있다.
시골 사람들은 빈 땅이 생기면 콩이나 들깨부터 심는다. 그곳도 예전에는 콩을 심었던 곳이었다. 노동력을 농사 짓는 일에만 썼던 시골 사람들은 생존 욕구가 강해서 습관처럼 식량 작물부터 심는다.
"서리태나 쪽파를 심으셔야지 무슨 꽃만 심으신대요?"
"쪽파는 심는 밭이 따로 있지. 서리태는 가격이 안 좋아서 우리 먹을 것만 심을 겨. 이제 먹고 살기 힘든 시절도 다 지나고 애들도 걱정 없이 사는데 뭐 하러 욕심부려. 여러 사람 보기 좋게 꽃이나 심고 살아야지. 매일 꽃 구경하고 좋잖여...."
몇 년 전부터 버스 정거장 옆 손바닥 만한 빈 땅에 홍단풍 나무가 자리를 잡더니 그 아래 작은 꽃밭을 그가 가꾸기 시작했다. 사철 꽃이 피어 있는 마을은 푸근하고 평온해 보인다. 그런 마을에는 꽃처럼 환하고 온화한 사람들이 모여 살 것 같다.
버스가 지나갈 시간도 아닌데 가화리 사람들이 버스 정거장 벤치에서 도란도란 모였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특히 지난 5월 보랏빛 붓꽃이 피었을 때 마을 사람들이 더 많았다. 가화리는 드라마 서동요 세트장이 있는 동네다. 한옥 지붕이 살짝 보이는 풍경까지 더해져 저절로 그림이 되는 공간이 되었다.
어느 꽃 축제장의 액자 틀 장식품 하나만 가져다 놓으면 명소가 될 공간이었다. 꽃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마음에 평화와 위안을 주는 효과가 있다. 너무 한적해서 세월도 그냥 머물러 있을 것 같은 시골 마을 한 공간에 핀 꽃들이 사람에게 웃음꽃까지 피게 했다.
충남 부여군 충화면 가화리는 덕용 저수지의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고 서동요 드라마 세트장과 출렁다리도 있는 곳이다. 그런 풍경 속에 항상 꽃이 떨어지지 않게 심어 놓은 박기완 어르신의 '여러 사람이 보기 좋은 꽃사랑'까지 얹어져 마을이 더 환해졌다.
"여기엔 노란 맨드라미를 심었어. 이제 노랗게 피기 시작하면 이쁘지 않겄어. 내가 꽃을 심으니께 이집 저집에서 모종을 갖다줘서 이게 이만큼 늘어난겨. 저기 칸나 속에는 분꽃도 있으니께 그냥 설렁설렁 보질 말고 잘 보고 지나가."
올해 87세인 박기완씨는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지금도 2천 평의 밭에 쪽파와 완두콩, 참깨 등을 심은 전형적인 농부이다. 그가 가꾸는 버스 정거장 옆 가화리 손바닥 정원에는 양귀비를 비롯해 키 작은 해바라기, 봉숭아, 백일홍, 맨드라미 등의 정겨운 우리 토종 꽃들이 꽃이 피는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꽃을 좋아하셔서 그런지 항상 그대로세요. 허리도 안 굽으시고...."
"이잉, 난 아픈 데가 없어. 아직까지 무릎이며 허리가 쓸만 혀. 부여 장날마다 물리 치료는 받으러 다니는디 아퍼서 가는 게 아니고 예방 차원으로 가는 겨. 장 구경도 할겸...."
느긋하고 긍정적인 충청도식 마인드까지 장착한 박기완씨 다운 대답이었다. 자연주의 삶을 추구하며 정원을 가꾸며 동화 작가 겸 삽화가로 살았던 타샤 튜더 같은 분이 우리 동네에도 있었다. 그는 비록 화폭에 그림을 그리지는 못해도 땅에 꽃으로 그림을 그리는 분이었다.
올해 87세인 그는 국가적 질곡의 시절을 다 겪고 살아남은 세대이다. 살아남기 위해 전투적으로 살았던 세대라 꽃에 마음을 빼앗길 여유가 있으리라 짐작하지 못했다. 1년에 한두 번쯤 쪽파를 사러 갈 때마다 충청도 식 유머와 웃음으로 맞아주곤 했던 여유의 원천은 꽃을 좋아하고 항상 꽃을 가꾸는 여유 때문이었다. 그의 꽃양귀비 같은 미소와 여름 칸나처럼 붉은 그의 꽃사랑 열정을 오래 보고 싶다.
지금은 5월의 꽃양귀비 개화 시간이 가고 씨앗 주머니가 부풀어 말라가는 시기이다. 양귀비의 한살이가 끝나고 다음 해를 기약하는 때이다. 그 틈을 노려 노란 금계국이 물결을 치고 지나가고 한낮 폭염은 시골 마을을 다 삶아 먹을 듯하다.
▲ 그가 심은 꽃양귀비 꽃길로 걸어오는 박기완 씨꽃양귀비 씨를 시기를 조절해서 심어서 한 해에 두번 꽃을 볼 수 있게 해놓은 동네 길 ⓒ 오창경
꽃양귀비는 모종으로 번식하기 어렵고, 씨가 제멋대로 떨어지거나 바람에 날려서 떨어진 곳에 발아가 되는 꽃이다. 이웃 마을의 꽃양귀비는 저절로 발아된 꽃양귀비가 아니라 분명 인위적인 손길을 거친 것들이었다.
"저기 꽃양귀가 늦게 피었네요. 다른 데 꽃양귀비들은 다 지고 없는데 여기는 이제 한창이네요. 누가 새로 심은 것 같은데요."
"박기완씨가 심은겨. 우리 동네에 그 양반 말고는 그런 거 할 사람이 있간디..."
"그분은 쪽파 전문가인데....."
박기완씨는 쪽파 농사를 잘 짓는 분이다. 김장 김치가 질릴 무렵인 초봄에 수확하는 쪽파뿐만 아니라 한여름 쪽파와 김장철에 수확하는 쪽파까지 심어서 근동 주부들에게 완판시키는 분이다. 나 역시 해마다 그 분에게 쪽파를 사서 봄과 가을에 쪽파김치를 담근다. 평생을 땅에 뭔가를 심고 가꾸며 사는 분이라서 꽃을 가꾸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는 모양이었다.
▲ 한번 꽃이 지고 다시 핀 꽃양귀비충남 부여군 가화리 금마 마을을 환하게 밝혀준 꽃양귀비 꽃길 ⓒ 오창경
다음 날, 버스 정거장에 서 있는 그를 만났다.
"이이!(충청도식 감탄사) 내가 심은 거 맞어, 보기 좋잖여. 나도 꽃 좋아한다니께."
이 대답 속에는 '나이 많은 남자도 꽃을 좋아할 수 있다'며 편견이나 고정 관념을 내려놓으라는 뜻으로 들렸다. 쪽파를 사러 그의 밭으로 가면 항상 저울 눈금 넉넉하게 쪽파 단을 묶어놓고도 한 다발씩 더 뽑아가란다. 그야말로 시골 인심의 끝판왕을 보여주시는 분이었다. 햇볕에 그을린 얼굴에 항상 미소가 머무는 인상이 좋은 분이었다.
"저기 꽃양귀비는 어떻게 심은 거에요? 다른 데는 지금 다 지고 없는데요?"
"첨에 꽃이 피고 나면 씨가 맺히잖여. 그걸 잘라다가 우리 하우스 건조장에 며칠 말리는 겨. 그런 담에 비료 포대에 넣고 밟으면 씨가 떨어지거든. 그걸 못자리 판에 상토 넣고 뿌리면 새로 싹이 나잖여. 그걸루다 새로 심었더니 꽃이 원판(매우) 좋잖여."
"양귀비는 모종으로 잘 번식이 되질 않는다는데요?"
"아녀, 안 해봐서 그런 겨. 저길 봐. 그렇게 올해 두 번째 심으니께 보기가 더 좋아. 키도 적당해서 뵈기 좋잖여."
이른 봄부터 싹이 터서 성장한 꽃양귀비들은 꽃이 필 때쯤이면 키가 너무 커서 꽃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쓰러지거나 비가 오면 아주 누워버려서 예쁘다가 마는 경우가 왕왕 있다.
▲ 충남 부여군 가화리 금마마을 버스정거장 옆 꽃양귀비5월 중순 개화를 했다가 2차로 심은 양귀비가 개화하여 더 싱싱하게 마을 화단을 밝혀주고 있다. ⓒ 오창경
박기완씨는 그런 양귀비의 특성을 고려해 시기를 조절해 단계적으로 양귀비를 심고 있었다. 덕분에 마을 사람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들까지 조용한 시골 풍경 속에 꽃을 즐기는 여유를 느끼고 있다.
시골 사람들은 빈 땅이 생기면 콩이나 들깨부터 심는다. 그곳도 예전에는 콩을 심었던 곳이었다. 노동력을 농사 짓는 일에만 썼던 시골 사람들은 생존 욕구가 강해서 습관처럼 식량 작물부터 심는다.
"서리태나 쪽파를 심으셔야지 무슨 꽃만 심으신대요?"
"쪽파는 심는 밭이 따로 있지. 서리태는 가격이 안 좋아서 우리 먹을 것만 심을 겨. 이제 먹고 살기 힘든 시절도 다 지나고 애들도 걱정 없이 사는데 뭐 하러 욕심부려. 여러 사람 보기 좋게 꽃이나 심고 살아야지. 매일 꽃 구경하고 좋잖여...."
몇 년 전부터 버스 정거장 옆 손바닥 만한 빈 땅에 홍단풍 나무가 자리를 잡더니 그 아래 작은 꽃밭을 그가 가꾸기 시작했다. 사철 꽃이 피어 있는 마을은 푸근하고 평온해 보인다. 그런 마을에는 꽃처럼 환하고 온화한 사람들이 모여 살 것 같다.
버스가 지나갈 시간도 아닌데 가화리 사람들이 버스 정거장 벤치에서 도란도란 모였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특히 지난 5월 보랏빛 붓꽃이 피었을 때 마을 사람들이 더 많았다. 가화리는 드라마 서동요 세트장이 있는 동네다. 한옥 지붕이 살짝 보이는 풍경까지 더해져 저절로 그림이 되는 공간이 되었다.
▲ 멀리 서동요 세트장이 보이는 풍경 속 2차 개화한 꽃양귀비 마을 주민 박기완 씨가 가꾸는 꽃밭에는 항상 꽃이 피어 있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정화해주는 것 같다. ⓒ 오창경
어느 꽃 축제장의 액자 틀 장식품 하나만 가져다 놓으면 명소가 될 공간이었다. 꽃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마음에 평화와 위안을 주는 효과가 있다. 너무 한적해서 세월도 그냥 머물러 있을 것 같은 시골 마을 한 공간에 핀 꽃들이 사람에게 웃음꽃까지 피게 했다.
충남 부여군 충화면 가화리는 덕용 저수지의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고 서동요 드라마 세트장과 출렁다리도 있는 곳이다. 그런 풍경 속에 항상 꽃이 떨어지지 않게 심어 놓은 박기완 어르신의 '여러 사람이 보기 좋은 꽃사랑'까지 얹어져 마을이 더 환해졌다.
"여기엔 노란 맨드라미를 심었어. 이제 노랗게 피기 시작하면 이쁘지 않겄어. 내가 꽃을 심으니께 이집 저집에서 모종을 갖다줘서 이게 이만큼 늘어난겨. 저기 칸나 속에는 분꽃도 있으니께 그냥 설렁설렁 보질 말고 잘 보고 지나가."
▲ 마을 앞 도로변에 칸나 역시 박기완 씨가 심었다.마을의 빈땅과 잡풀더미가 우거질만한 곳마다 꽃을 심어서 많은 사람들을 기분좋게 하고 있다. ⓒ 오창경
올해 87세인 박기완씨는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지금도 2천 평의 밭에 쪽파와 완두콩, 참깨 등을 심은 전형적인 농부이다. 그가 가꾸는 버스 정거장 옆 가화리 손바닥 정원에는 양귀비를 비롯해 키 작은 해바라기, 봉숭아, 백일홍, 맨드라미 등의 정겨운 우리 토종 꽃들이 꽃이 피는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꽃을 좋아하셔서 그런지 항상 그대로세요. 허리도 안 굽으시고...."
"이잉, 난 아픈 데가 없어. 아직까지 무릎이며 허리가 쓸만 혀. 부여 장날마다 물리 치료는 받으러 다니는디 아퍼서 가는 게 아니고 예방 차원으로 가는 겨. 장 구경도 할겸...."
느긋하고 긍정적인 충청도식 마인드까지 장착한 박기완씨 다운 대답이었다. 자연주의 삶을 추구하며 정원을 가꾸며 동화 작가 겸 삽화가로 살았던 타샤 튜더 같은 분이 우리 동네에도 있었다. 그는 비록 화폭에 그림을 그리지는 못해도 땅에 꽃으로 그림을 그리는 분이었다.
올해 87세인 그는 국가적 질곡의 시절을 다 겪고 살아남은 세대이다. 살아남기 위해 전투적으로 살았던 세대라 꽃에 마음을 빼앗길 여유가 있으리라 짐작하지 못했다. 1년에 한두 번쯤 쪽파를 사러 갈 때마다 충청도 식 유머와 웃음으로 맞아주곤 했던 여유의 원천은 꽃을 좋아하고 항상 꽃을 가꾸는 여유 때문이었다. 그의 꽃양귀비 같은 미소와 여름 칸나처럼 붉은 그의 꽃사랑 열정을 오래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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