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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유체 소각에 관여한 조선인이 이후 벌인 일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구연수

등록|2024.07.21 15:22 수정|2024.07.21 15:22

▲ 일본 지역 탄광·광산 조선인 강제동원 실태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일본 니가타현 사도광산에서 강제징용 피해자들만 배출된 것은 아니다. 적은 숫자이기는 하지만, 일제의 한국 침략에 협조한 인물들도 배출됐다.

행정안전부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보고서인 <일본 지역 탄광·광산 조선인 강제동원 실태>는 일본 궁내성이 1889년 1월에 설립한 사도광산 학교와 관련해 "1892년 4월 제1회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졸업생 가운데에는 조선인 박창규·구연수·박치운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 뒤 이렇게 기술한다.
 
"이들 3인은 이후에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박창규는 1905년 3월 러일전쟁 일본전승축하특파대사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방문했고, 박치운은 1894년 일본군이 동학군 토벌할 당시 통역으로 일했다. 3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구연수이다. 구연수는 1894년 9월 광무국 주사를 거쳐 1895년 10월 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시 유체 소각에 관여해 일본으로 망명한 인물이다."

명성황후 유체소각에 관여한 사도광산 졸업생

이종각 주오대학 강사가 2009년 9월호 <신동아>에 기고한 '자객 고영근의 명성황후 복수기'에 따르면, 일본 사노시향토박물관에 소장된 <스기무라 군일기>는 구연수가 조선 훈련군 제2대대장 우범선의 지휘하에 이런 일을 했다고 알려준다.
 
"우범선은 구연수와 하사관에게 명해 왕비의 시체를 이불 위에 얹고 그 위에 다시 이불을 덮어 새끼줄로 묶어 옆 창고에 넣었다. 곧 시체를 동산 기슭으로 옮겨 석유를 끼얹어 태웠다. 타다 남은 뼈는 하사관이 못에 갖다 버렸다."

우범선은 '씨 없는 수박'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다. 구연수의 역할은 우범선의 지시하에 위와 같은 시신 소각에 관여하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실직 무사인 로닌(낭인)들이 경복궁에 침입할 때 안내자 비슷한 역할도 했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1권은 1937년 3월호 <야담(野談)>에서 아래 문장이 일제 당국의 검열로 삭제됐다고 알려준다.
 
"48명의 일본인 검객과 조선인 구연수 외에 왕후의 얼굴을 잘 알고 있는 일본인 소천실(小川實)의 딸이 수행을 하여 궁중에 들어갔다."

무기 중개상과 통역 등으로 알려진 오가와 미노루의 딸이 명성황후 민씨의 얼굴을 알게 된 연유는 1982년 10월 16일자 <조선일보> 1면 최하단에 언급돼 있다. 이 기사는 "외래문물이나 정세에 관심이 많았던 민비는 미국 여인이나 영국 여인, 일본 여인까지도 궁중에 불러들여 극진히 대우하고 대화를 나누곤 했으며, 이 소천녀(小川女)도 그런 혜택받은 여인 가운데 하나로 민비의 얼굴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일본 사람이었다"고 설명한다.

구연수는 1867년에 출생해 16세 때인 1883년 무과에 급제한 뒤 국비 유학생이 되어 도쿄보통중학교·도쿄제국대학을 거쳐 사도광산 학교를 졸업했다. 동학혁명 2년 전인 1892년에 25세 나이로 귀국한 그는 광무국과 공무아문에서 주사로 근무하다가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에는 농상공부 광산국 기사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오가와의 딸뿐 아니라 구연수도 황후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위 이종각의 <원흉과 원훈의 두 얼굴: 이토 히로부미>는 <우범선 최후사>를 근거로 구연수가 로닌들에게 명성황후를 지목해주는 일도 했다고 기술한다. 조선인이, 그것도 국록을 받는 조선인 관료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더 이상 조선에 머무는 것은 위험했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 구연수 편은 이렇게 설명한다.
 
"1895년 11월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으로 피신했다. 1896년 4월 일본 정부에 광산 기사로 고용되었다. 1899년 5월경 잠시 부산항에 들어와 국내의 동조 세력과 접촉을 도모했지만, 8월 말경 일본 측의 권고로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고종 퇴위에도 앞장
 

▲ 1907년 일진회가 일본 제국 황태자 다이쇼의 대한제국 방문 때 서울 남대문 앞에 세운 대형 아치. 사진에는 일진회의 이름이 담긴 대형 아치 위에 태극기와 일장기가 교차해 있으나 아치의 중간에 '받들어 맞이한다'는 의미의 '봉영(奉迎)'이라는 문구와 함께 중앙에 일본 왕실을 상징하는 국화 문양이 새겨져 있다. ⓒ 위키미디어 공용


그가 사면을 받은 것은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넘어간 이듬해인 1906년이다. 귀국한 것은 1907년이다. 이 해에 송병준·이용구가 이끄는 친일단체인 일진회의 평의원이 되고 뒤이어 울도군수에 임명됐다. 1905년 2월 22일에 일본이 독도를 강점한 상태에서, 친일파인 그가 독도를 관장할 울릉도의 행정 책임자로 임명됐던 것이다. 독도에 대한 일본의 위협을 중앙정부에 보고한 심흥택 울도군수가 1907년 3월 13일 강원도 횡성군수로 전보된 후속 조치였다.

2015년에 <독도연구> 제19호에 실린 김호동 영남대 연구교수의 논문 '개항기 울도군수의 행적'은 구연수가 "1907년 6월 26일자로 울도군수에 임명"됐다고 한 뒤 "25일 만에 경무사로 임명된 것으로 보아 실제 도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구연수가 울릉도로 떠났다면, 그는 그해 7월의 역사적 현장에서 일본 편을 들지 못했을 것이다. 7월에 일본은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할 특사단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한 고종황제를 퇴위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 일에 구연수가 나섰다.

<친일인명사전>은 "1907년 7월 헤이그 특사 사건 후 이토 히로부미의 사주를 받은 송병준의 명령으로 일진회 회원 300여 명을 동원하여 왕궁을 포위하고 시위를 벌여 고종을 협박하고 퇴위시키는 데 앞장섰다"고 서술한다. 12년 전 명성황후 시해에 앞장섰던 구연수가 이번에는 고종을 정치적으로 시해하는 일에 나섰던 것이다.

울도군수 발령을 받은 인물이 울릉도에는 가지 않고 한양에서 "황제 물러가라!"라는 시위를 주도했다. 그의 마음속에서 대한제국이 얼마나 우스운 존재였겠는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장면이다.

일본과 친일세력은 그의 행동을 공로로 평가해 좌포도대장과 우포도대장을 합한 개념인 경무사에 임명했다. 이때가 1907년 7월 22일이었다. 고종이 퇴위조서를 발표한 지 나흘 뒤였다. 고종이 퇴위된 직후에 그의 보직이 변경됐던 것이다.

그가 경무사가 된 시점은 대한제국 치안이 매우 긴박할 때였다. 일본이 고종을 퇴위시킨 데 대한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이 한일신협약(7.24)을 통해 행정 간섭권까지 얻고, 뒤이어 순종을 압박해 군대해산 조칙(7.31)을 발표하는 일들이 이어졌다.

이런 속에서 치안 총수가 된 구연수는 민중의 분노가 친일 정권에 쏠리지 않도록 견제했다. <친일인명사전>은 "고종의 퇴위 직후 이완용의 집을 불태우는 등 곳곳에서 항위 시위가 잇따르자 구연수는 철시를 주도했던 상업회의소의 회장 조병택을 체포하는 등 진압 작전에 앞장섰다"고 설명한다.

죽어서도 15배의 연봉

대한제국을 무너트리는 데 가담한 사도광산 졸업생 구연수는 1910년 국권침탈 이후에 조선총독부 치안 간부로 근무하다가 3·1운동 4년 뒤인 1923년에 도지사급인 경무국 사무관으로 퇴직했다. 그런 다음, 지금의 국회의원 비숫한 중추원 참의가 되어 죽을 때까지 근무했다.

그는 국비 유학생으로 일본에서 공부한 뒤 조선왕조(대한제국)에 칼을 들이댔다.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고종을 폐위시키는 일을 주저없이 감행했다. 그의 친일은 일반 친일파도 꺼리는 막가파식 친일이었다.

구연수는 국권침탈 14년 전인 1896년부터 일제의 녹봉을 받았다. 1907년부터는 대한제국의 녹봉을 받다가 1910년부터는 다시 일본의 녹을 받았다. 그 상태로 1923년 5월 6일 죽음을 맞이했다.

1925년 5월 9일자 <조선총독부관보>는 사흘 뒤 그에게 연수당 3천 원이 지급됐다고 알려준다. 1922년에 21세인 경성일보사 직공 강대희의 월급이 17원, 연봉으로 치면 204원이었다. 일제는 이보다 약 15배의 연봉을 구연수에게 지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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