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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활쏘기 멘토, 이소룡

[활 배웁니다 16] '이소룡 어록'을 통해 배운다

등록|2024.07.20 19:09 수정|2024.07.20 19:09
어린 시절 사극을 보며 품었던 활쏘기에 대한 로망을 30대가 되어 이뤘습니다. 대학원생으로 살면서 활쏘기를 통해 많은 위로와 용기를 얻었습니다. 보다 많은 분들이 활쏘기의 매력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으로, 활을 배우며 얻은 소중한 경험들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기자말]

▲ 심사를 담당하는 심판의 책상 ⓒ 김경준


"아이고, 아까워라!"

주변에서 탄식이 쏟아졌다. '1급 심사'에서 한 발이 모자라 낙방한 것이다(승단대회에 나가기 위해서는 1급을 획득해야 하는데, 45발 중 22발 이상을 맞혀야 합격이다).

전통 '각궁'을 배우기 시작한 지 반 년, 꿈에 그리던 초몰기도 달성했고 평균 시수(성적)도 제법 잘 나와서 자신감이 차오르던 때였기에, 결과가 더 아쉽게 느껴졌다.

그후 몇 번 더 심사에 응시했지만, 번번이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평소에는 잘 맞던 화살이 이상하게 심사 때만 되면 과녁을 슬슬 피해가는 게 아닌가. 몇 번 떨어지고 나니 여유롭던 마음도 점점 초조해지고 날카로워져서 주변에서 살짝만 건드려도 터지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
   
우연히 발견한 '이소룡 어록'
 

▲ 영화 <용쟁호투> 스틸컷. 이소룡이 제자를 지도하는 장면. 그의 철학이 녹아있는 장면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 워너브러더스


며칠 전, 서가에 꽂혀있던 <물이 되어라, 친구여>(이소룡 어록집)를 문득 발견했다. 이 책은 무술가이자 영화배우였던 이소룡(브루스리)의 어록을 아포리즘(격언) 형식으로 엮은 것이다.

별 생각 없이 펼쳤다가, 그 자리에서 선 채로 완독했다.

"나에게 패배란 일시적인 것일 뿐이다. 패배의 쓴 잔은 내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더 노력하게 하는 자극이 된다. 패배는 단지 내가 하는 일이 뭔가 틀렸다는 점을 말해줄 뿐이다. 패배는 결국 성공과 진리로 나를 이끌어주는 길이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금고를 여는 것과 같다. 손잡이를 단 한 번 돌려서 금고를 열 수 없듯이, 조금씩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며 목표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는 것이다."


승급심사 낙방으로 예민해져 있던 상황에서 성공, 패배, 목표에 관한 이소룡의 충고를 보며 적잖은 위로가 됐다.

물이 되어라, 친구여

이소룡은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철학도이기도 했다. 그는 끊임없는 육체적 단련과 정신적 사유를 통해 자아를 찾으려 했다. 자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삶의 의지가 있었기에 어떠한 난관에도 굴복하지 않은 채,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나갈 수 있었다.

그의 사유와 경험이 녹아있는 어록들을 찬찬히 읽다 보니, 활쏘기에도 적용할 만한 구절들이 상당히 많다는 걸 느꼈다.

"마음이 유연해야 변화에 변화로 대처할 수 있다. 자신을 비워라! 마음을 열어라! 컵은 비어 있을 때 쓸모가 있다."

"내 잔의 물을 마시려면 먼저 너의 잔을 비워야 한다. 친구여, 고정 관념과 선입견을 모두 버리고 중용에 머물러라. 이 잔이 왜 쓸모가 있는지 아는가? 비어 있기 때문이다."

"물처럼 되어라. 물은 형태가 있으면서도 형태가 없다. 물은 지구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물질이지만 가장 단단한 바위도 뚫는다. 물은 스스로는 모양이 없지만 무엇인가에 담기면 그 모양을 취한다. 컵에 담기면 컵 모양이 되고, 꽃병에 담기면 꽃병 모양이 된다. 꽃의 줄기를 따라 굽이굽이 흐르기도 하고, 찻주전자에 부으면 찻주전자가 된다. 물의 적응력을 관찰해보라. (물에 젖은 행주를) 빠르게 쥐어짜면 빠르게 흐르고, 천천히 짜면 천천히 흐른다. 때로는 오르막길을 거꾸로 흐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열린 길을 찾아 바다로 흐른다. 물은 때로는 빨리, 때로는 천천히 흐르지만 목적지는 언제나 변함이 없다."


이소룡은 특히 '물'과 관련된 어록을 많이 남겼다. 국내에서 출간된 어록집의 제목조차 <물이 되어라, 친구여(Be Water, My Friend)>이다. 형체가 없이 부드러운 물처럼 우리의 삶 역시 부드럽고 유연해야 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나는 활을 쏘며 이소룡의 가르침을 실천한 적이 있다. 활을 배운 지 1년쯤 지났을 때의 일이다. 당시 꾸준한 습사(활쏘기)로 시수는 잘 나오는 편이었지만, 어쩐지 자세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활을 잡은 왼쪽 어깨가 심하게 들려있는 것이었다.

당장은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근육에 무리가 올 것만 같았다. 잘 맞고 안 맞고를 떠나서 활은 편안한 자세에서 안정적으로 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부상 없이 오래 오래 활을 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민을 들은 선배 접장님 한 분께서는 자세를 교정해주며 활의 파운드(장력) 역시 과감하게 낮추라고 조언했다. 기존에 쓰던 활들은 50파운드 내외였는데, 33파운드 활을 권하는 것이었다. 33파운드 활은 장력이 약해 145m 너머의 과녁을 맞히는 게 쉽지 않다.

"아니, 근력 없는 어르신들도 이것보단 센 활을 쓰는데요?"
"그런 마인드면 문제를 개선할 수 없어요."


쏴보니 역시 과녁을 맞히기가 쉽지 않았다. 평소 표(조준점)보다 한참 높게 들어 쐈으나, 과녁 근처에도 미치지 못했다. 솔직히 자세가 조금 보기 안 좋아도 당장은 몸에 문제도 없고 시수도 잘 나오는데 원래 쏘던 대로 쏠까 아니면 과감하게 당장의 시수를 포기하고 자세를 고칠까. 활을 배우기 시작한 뒤로 마주한 일생일대의 딜레마였다.

그러나 '잔'을 비우지 않으면 채울 수 없다는 생각에, 선배 접장님의 조언을 전적으로 따르기로 했다. 기존에 쓰던 활은 봉인해둔 채, 33파운드 활로만 습사를 이어나갔다. 처음엔 감을 잡지 못해 한 발도 맞히지 못하고 내려오는 날이 많았다. 꾸준한 수련 끝에 비로소 과녁을 연달아 맞힐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예전보다 훨씬 편안한 자세로 교정됐음은 물론이다.

"잔을 비우라", "물이 돼라"던 이소룡의 어록이 무의식 중에 박혀 있었던 덕분에, 나는 과감하게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나의 활쏘기 멘토, 이소룡
 

▲ 활(각궁)을 당겨 과녁을 겨냥하는 모습 (서울 강서구 공항정) ⓒ 김경준


사실 <물이 되어라, 친구여>는 '이소룡빠'였던 내가 출판사에 다니던 시절 야심차게 기획·출간한 책이었다. 이소룡을 통해 험난했던 고3 수험생활을 극복했던 나의 경험을 근거로, 다른 이들도 이소룡을 통해 희망과 용기를 얻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관련 기사 : 이소룡에게 위로받던 고3 수험생이 취업하고 벌인 일 https://omn.kr/1du5m)

이후 삶이 힘들 때마다, 종종 그의 어록을 펼쳐보며 용기와 지혜를 얻곤 했다. 이제 그는 활쏘기에 있어서도 나의 훌륭한 멘토가 되어주고 있다.

* 공교롭게도 기사를 송고한 시점(7월 20일)은 이소룡 사망 51주기이다. 전혀 의도하지 않았기에 놀라운 우연의 일치라는 생각이다.
덧붙이는 글 본문에서 인용한 이소룡의 어록들은 <물이 되어라, 친구여>(필로소픽, 2018)에서 발췌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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